"대북정책 전면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과거 우리정부와 유사 해외국가의 실책 사레 정밀 분석해야"
  • ▲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 김영호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2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취임 후 14개월을 넘기는 시점에서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 통일부장관을 경질하여 김영호(金映浩) 성신여대 교수를 후임으로 발탁했다.
    이번 통일부장관 경질은 윤석열 정부가 대북정책의 전면적 정비를 단행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뜻에서 이 나라 대북정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필자의 관점에서 조명해 본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기 바란다.

    <대북정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1.  통일논의의 시원 : ‘수복통일’과 ‘해방통일’의 대치

    1948년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분단국가’로 출발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상반된 통일정책을 추구해 왔다. 
    건국 초기 남의 대한민국의 통일전략은 ‘수복(收復)’ 통일이었다.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추구한 통일전략은 ‘해방(解放)’ 통일이었다.
    남의 ‘수복’ 통일은 그 뿌리를 1948년 5월 10일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두고 있었다. 
    반면 북의 ‘해방’ 통일은 그 논거를 이른바 ‘미완성 해방’론에 두고 있었다.

    남의 ‘수복’ 통일론은 다음과 같은 논거에 입각하고 있었다.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 실시된 ‘제헌국회 의원’ 총선거는 1947년 11월 14일자 유엔총회 결의에 의거하여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선거였다. 

    그러나, 이 총선거는 북한 땅을 점령한 소련 군정당국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지역 출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1948년 2월 26일 파리에서 있었던 유엔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에 의한 선거감시가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실시되었다.

    유엔은 1948년 12월 12일 채택한 총회 결의 제193-III호를 통해 5.10 총선거를 통해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상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선포했다.
    이 결의는, 명문으로 그렇게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1945년 9월 9일 북한 땅에 따로 설립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불법국가’로 단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건국 초기 대한민국이 추구했던 ‘수복’ 통일은 북한이 5.10 총선거를 거부한 것이 불법이고 따라서 9월 9일 북한 땅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것도 불법이었기 때문에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했던 북한 땅에서 ‘인구비례에 의한 유엔감시 하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 총선거의 당선자들을 이미 5.10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회에 합류시킴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탄생을 가져온 19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 총선거는 뒤에 있을 북한지역에서의 선거 용으로 100석을 공석(空席)으로 비워두고 198명의 의원들을 당선시켰었다. 

    반면, 북한의 ‘해방’ 통일론은 다음과 같은 논거에 근거하고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에서는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반미(반제)ㆍ반봉건ㆍ반일(민족해방)ㆍ공산주의(인민민주주의) 혁명’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같은 ‘혁명’이 1945년부터 1948년까지의 ‘해방공간’에서 북한 땅에서는 소련군의 지원과 협력으로 완수되었으나 남한에서는 주한미군의 방해로 수행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미제’의 ‘식민통치’로 바뀌는 데 그쳤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남한에서의 ‘혁명’의 ‘미완수’로 인하여 1945년의 ‘해방’은 북한에서만 이루어진 ‘미완성 해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통일전략은 분단된 남과 북의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남한에서 ‘반제 반봉건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내용으로 하는 ‘남조선혁명’을 수행하여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을 선결과제로 추진한다.
    이를 통해 새로이 ‘해방’되는 ‘남조선’과 이미 ‘해방’되어 있는 ‘북조선’이 ‘합작’을 통해 통일을 이룩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남조선혁명’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동원하고 있는 전략이 ‘통일전선’ 전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1917년10월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러시아를 장악한 뒤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통일전선’ 전략을 개발하여 구사(驅使)해 왔다.

    ‘통일전선’ 전략은 우세(優勢)한 적(敵)을 상대로 전개하는 혁명투쟁에서 승리를 전취하는 방안으로 적대 세력을 ‘핵심 세력’과 ‘주변 세력’으로 구분하고 ‘주변 세력’과 연대ㆍ제휴하여 ‘핵심 세력’을 고립시키고 포위하여 전복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전술적 차원에서 일시적으로 제휴의 상대방인 적의 ‘주변 세력’의 입장과 주장을 전술적으로 수용하는 기만술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 있었던 ‘미-소 공동위원회’를 포함하여, 1945년 해방부터 1948년의 국가분단까지의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1948년의 국가분단 이후 1950년의 6.25 전쟁 도발까지의 기간 중 일관되게 전개한 ‘통일전선’ 차원의 위장 평화통일 공세의 단골 메뉴는 ‘남북정치협상회의’ 또는 ‘남북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주장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남북 정치협상회의’나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항상, 그들이 자의적(恣意的)으로 정한 일방적 기준을 근거로, 남한의 정당·사회단체와 개별인사들을 ‘통일지지자’와 ‘통일반대자’로 구분하고 이 같은 자의적 분류에 입각하여 그들이 말하는 ‘통일반대자’들의 참가는 배제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통일반대자’들은 곧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전략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쳐야만 했다.
    그들의 ‘통일전선’ 전략은 대한민국의 반체제·반정부 세력과의 제휴 및 연대를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와 체제 세력을 고립시켜서 포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지만,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을 통해 공산주의의 실체를 경험하고 특히 ‘6.25 전쟁’을 통하여 한-미 동맹이라는 철갑옷과 국가보안법 및 중앙정보부(당시) 등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법령과 제도로 중무장한 대한민국의 반공체제는 북한이 대한민국의 반체제·반정부 세력과 제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통일전선’의 2원화(元化)라는 전술적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하층 통일전선’과 ‘상층 통일전선’으로의 2원화였다.
    물론 ‘통일전선’의 기본은 ‘하층 통일전선’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정부와 체제 세력은 오직 전복과 타도의 대상이었을 뿐 대화의 상대방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 전략은 1970년대부터 전술적 차원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종래의 ‘남한 당국 배제’ 입장을 바꾸어 남북한 ‘당국간 대화’를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에 이어 체육회담, 경제회담, 국회회담에 이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북고위급회담’이라는 이름의 총리회담 개최를 수용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그 뒤에는 ‘장관급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접촉과 대좌 및 대화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해 왔다.
    그러나, 북한이 호응한 이 같은 남북 접촉과 대화들은 여전히 ‘통일전선’ 전략의 전술적 변형(變形)에 불과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이 수용한 ‘당국간 대화’는 ‘통일전선’의 원형(原型)인 ‘하층 통일전선’과 구별되는 ‘상층 통일전선’이었다. 
    북한판 ‘상층 통일전선’의 기능은 ‘하층 통일전선’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즉, 북한이 ‘당국간 대화’를 수용하는 것은 이를 통해 남북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북대화 진전의 ‘전제조건’을 제기함으로써, 남한 당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북한이 추진하는 ‘하층 통일전선’의 구축을 차단·방해하는 남한 사회의 법률과 제도를 제거하고 이와 아울러 남한 사회 내에서의 ‘반미(反美)’ 정서의 자극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하여 한-미 안보동맹에 파탄(破綻)을 선동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북한은 이를 가리켜 ‘법률적 조건’ 조성과 ‘사회적 환경’ 조성이라고 일컫는다.
    요컨대, ‘상층 통일전선’ 차원의 남북대화를 이용하여 남한의 당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남한 사회에 존재하는 북한이 추구하는 ‘남조선혁명’을 방해·차단하는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제거하고, 반대로, 그 같은 혁명에 유리한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 비해 훨씬 열악한 경제적 여건을 안고 출발하여 6.25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 복구에 전념하는 동안 이승만(李承晩)의 자유당 정권과 장면(張勉)의 민주당 정권을 거쳐 박정희(朴正熙)의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들의 통일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수세적ㆍ방어적이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이 제시했던 ‘통일방안’은 이승만 정권 때의 ‘북한지역 선거’론이 장면 정권 때는 ‘남북한 총선거’론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일관되게 ‘유엔 감시 하의 인구 비례 선거’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1960년 4.19 ‘학생혁명’ 이후 용암처럼 분출된 분방(奔放)한 통일논의는 1961년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건 5.16 군사 정변(政變)을 불러일으켰다.
    박정희(朴正熙)가 이끈 5.16 군사정권과 이를 계승한 공화당 정권의 국정 최대 과제는 ‘산업화’에 의한 ‘조국 근대화’였다.
    공화당 정권은 “싸우면서 건설한다”와 “선 건설·후 통일” 구호 하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경제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입했고 일체의 ‘통일논의’는 금기(禁忌)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의 국내외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는 월남전이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난 여파(餘波)로 아시아에서는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의 ‘괌 선언’과 중국 방문에 이어 미ㆍ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유럽에서는 헬싱키 프로세스가 진행되는 등 ‘데탕트(긴장완화)’가 시작되어 그동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특징지었던 동ㆍ서 양극(兩極) 구조의 냉전체제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2. 남북관계의 변화 :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한반도에서는 남쪽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산업화’ 정책의 성공으로 남북한의 경제가 북한 우위에서 남한 우위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국내외 상황의 변화를 업고, 1970년대 초부터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이 종래의 수세로부터 공세로의 전환에 시동을 걸었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을 전환점으로 하여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의 기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를 통하여 박정희 정권의 대북정책은 ‘적대적(敵對的) 공존’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슬로건은 ‘선 건설·후 통일’이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 평화·후 통일’로 바뀌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이 벤치마킹한 것은 1972년의 양독(兩獨) 기본조약 체제였다.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자유로운 통일 논의는 시기상조였다.
    대한민국이 이 시기에 추구한 대북정책 목표는 ‘평화 공존’이었다.
    박정희는 이를 위하여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1973. 6. 23),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1974. 8. 15)을 발표했다.

    북한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71년 8월 6일 평양에서 있었던 노르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 캄보디아 친왕 환영 대회에서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정당ㆍ단체 및 개별인사들과의 접촉” 용의를 표명했다.
    이 같은 김일성의 발언은 일체의 남북대화에서 남한의 ‘정부·여당 배제’를 절대화했던 북한의 종래 입장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71년 8월 12일 대한민국은 북한에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이를 북한이 수락하여 남북간에 ‘인도적 대화’가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에 따라 남북간에는 정치적 대화 통로로 <남북조절위원회>, 인도적 대화 통로로 <남북적십자회담>이라는 두 갈래 대화 통로가 개설되었다.
    남북관계가 ‘대화 없는 대결 시대’로부터 ‘대화 있는 대결 시대’로 바뀌었다.

    남한에서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金載圭)(중앙정보부장)에 의한 박정희의 시해(弑害)로 18년간의 ‘박정희 시대’에 비극적 종막이 내려지고 같은 해의 ‘12.12 사태’, 다음 해의 ‘5.18 광주사태’ 등의 격동기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최규하(崔圭夏)의 과도정권(1979년 10월-1980년 8월)을 경유하여 등장한 전두환 정권(1980-1988)을 상대로 북한은 ‘평화통일’ 공세를 강화했다.

    1980년 10월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라는 이름의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이 같은 북한의 대남 ‘평화통일’ 공세는 특히 ‘5.18 광주사태’를 전환점으로 남한 사회를 풍미하기 시작한 ‘민주화 운동’에 편승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이에 대해 남한에서도 역시 ‘통일방안’으로 맞장구를 시도했다.

    전두환의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19982. 1. 12)이 그것이었다.
    남쪽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후속 정권들이 등장할 때마다 <민주화합민주통일방안>을 부분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새로운 통일방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노태우(盧泰愚) 정권(1988-1993)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 9. 11)과 김영삼(金泳三) 정권(1993-1998)의 <3단계 통일방안>(1993. 5. 24) 등이 이에 해당된다.

    1980년대 후반기에 한반도의 내외정세에는 2차대전 종결 이후 최대의 격변이 진행되었다.
    한반도 밖에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탈냉전(脫冷戰)’이 진행되었다.
    1981년 출범한 미국 레이건(Ronald Reagan) 행정부의 ‘신봉쇄정책’(New Containment)에 밀린 소련의 붕괴와 이로 인한 동유럽 공산권의 와해가 시작되었다.

    1985년에 등장한 소련의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 체제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여 '전략무기제한협상)(SALT: 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을 타결시키고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Strategic Arms Reduction Talks)을 개시하는 데 동의했다.

    1989년 루마니아 차우세스쿠(Nicolai Ceaucescu) 정권이 붕괴하고 동독 주민들이 ‘대탈출’을 개시하는 것을 시발점으로 동유럽에서는 동독의 붕괴와 서독 편입에 의한 서독 주도의 독일 통일(1990), 소련 연방과 ‘와르샤와 조약기구’ 해체(1991) 및 동유럽 공산권국가들의 ‘탈공산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탈바꿈이 진행되었다.
    1960년대로부터 1970년대에 걸쳐 <문화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은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1976)에 이은 덩샤오핑(鄧小平) 체제의 등장(1978)으로 마오의 교조주의(敎條主義)로부터의 이탈을 통한 ‘개혁ㆍ개방’에의 대장정(大長征)이 막을 올렸다. 
    전 지구적으로 ‘탈냉전’의 거대한 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동안 한반도 안의 정세도 급변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말로부터 1990년대 초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탈냉전’의 격랑으로 배후 지지 기반이 함몰된 북한이 국제사회의 고아(孤兒) 신세가 되었다.

    북한은 1980년대로부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300여만의 주민이 아사(餓死)하고 굶주린 수십만 주민이 중국으로 탈북하여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고난의 행군’을 경험해야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94년에는 김일성(金日成)이 사망했다.
    이미 북한의 정치권력은 1980년대부터 그 축이 김일성의 맏아들 김정일에게로 옮아가 있었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김정일은 권력 세습을 공식화했고 북한은 김가(金家) 일문(一門)의 전제적인 ‘공산왕조(共産王朝)’로 변질되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에게 1980년대는 국운상승(國運上昇)의 기간이었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에 이어 1980년 5.18 광주사태의 아픔을 겪기는 했지만, 박정희 시대에 궤도가 깔아진 ‘조국 근대화’를 기치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력 신장은 멈추지 않았다.
    1988년의 하계 서울 올림픽은 그 같은 국운상승의 절정이었다.
    대한민국은 그 여세(餘勢)를 몰아 ‘북방외교’를 몰아붙였다.

    ‘북방외교’의 첫 수확은 해체 직전의 소련과의 국교정상화(1990)였고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1991)과 중국과의 수교(1992)로 이어졌다.
    압권은 남북한의 동시 유엔가입이었다.
    북한은 ‘남북고위급회담’ 수용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서 대한민국의 유엔가입은 물론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의 저지에 총력을 경주했지만, 덩샤오핑의 중국이 대한민국의 손을 들어 줌에 따라 그 같은 북한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그동안 북한이 줄곧 우위(優位)를 유지했던 남북간의 국력 격차가 남한 우위로 역전(逆轉)하기 시작함에 따라 확보한 자신감에 더하여 국제적 ‘탈냉전’의 도도한 격랑에 편승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버마 수도 랑군의 아웅산 묘지 폭파 테러(1984)와 대한항공 여객기 858기 공중폭파(1987) 및 동해안 잠수함 침투(1996, 1998) 등 이 시기를 얼룩지게 했던 일련의 과격한 폭력 행사가 보여준 것처럼 북한은 오히려 더욱 경직해진 태도로 한반도를 ‘냉전의 고도(孤島)’로 묶어 놓았다.

    이와 함께, 북한은 비장했던 최후의 생존 카드로 꺼내 들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영변 지역을 무대로 하여 핵무기 개발을 개시한 것이다.

    북한이 1990년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에 호응한 것은 하나의 의외였다.
    대한민국이 <남북고위급회담>을 추진한 것은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서 제기했던 남북관계에 관한 ‘포괄적 잠정협정’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반면, 북한의 목적은 딴 곳에 있었다.

    북한이 이 회담에 호응한 것은 전형적인 ‘담담타타(談談打打)’ 전술에 따라 상황을 관리하는 데 보다 큰 목적이 있었다.
    북한이 이 회담을 통해 챙기려 한 ‘부수입(副收入)’이 있었다.
    ① 대한민국의 유엔가입 노력을 좌절시키고,
    ② 팀스피리트 연례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시키며
    ③ 전향을 거부한 남파 간첩 출신 장기수(長期囚)들의 송환을 실현시키는 것들이었다.

    돌연 부상(浮上)한 핵문제에 대한 국제적 압력에 대해 대처하기에 바빠진 북한은 일단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이라는 ‘실익(實益)’을 챙기면서 그 대가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로 약칭)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 공동선언>(<비핵화선언>으로 약칭)이라는 2건의 중요한 합의문건을 타결시키는데 호응했다.

    특히 <남북기본합의서>를 타결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이 제기했던 ‘잠정협정’의 내용을 대부분 수용하는 의외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곧 북한이 이때 이들 합의문건에 합의한 것이 ‘합의’ 그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지 ‘실천’과 ‘이행’에 뜻을 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3. 남한에서의 ‘좌파’ 정권 출현과 왜곡되는 남북관계 

    그런데, 이번에는 남쪽에서 엉뚱한 정치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3당 통합’에 의한 김영삼 정권이라는 완충기를 거쳐 1998년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성립으로 대한민국에 ‘친북ㆍ좌파’ 정권이 등장하는 정치사적 이변(異變)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당시)의 평양방문과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이 실현되었고 여기서 <6.15 남북공동선언>이 생산되었다.

    김대중 정권과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정권은 <6.15 선언>을 근거로 일방적인 대북 경협을 추진하면서 “주어서 변화시킨다”는 논리를 내세워 ‘상호주의’ 원칙의 적용을 배제함으로써 격렬한 ‘퍼주기’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그의 ‘대북 퍼주기’는 북한의 ‘변화’는 이끌어 내지 못 하고 북한 독재체제의 연명(延命)을 도와주면서 ‘주는 쪽’인 남측으로 하여금 ‘받는 쪽’인 북측의 ‘볼모’가 되어 북의 주문대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남쪽의 ‘친북·좌파’ 세력들은 <6.15 선언>의 성과로 남북간 인적 왕래의 확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허구(虛構)였다.
    ‘6.15’와 ‘8.15’ 등이 계기가 되어 ‘민족’을 명분으로 남과 북에서 지난 수년간 진행된 각종 축전(祝典) 행사는 물론이고 금강산 관광·개성 공단 등 대부분의 남북 간 인적 교류와 협력 사업들은 예외 없이 남쪽 사회의 주류(主流)인 ‘보수·우파’ 세력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제된 가운데 북한과 남한의 북한에 동조하는 ‘좌파’ 세력만이 참가하는 ‘잔치판’이 되어 “북의 주문대로 남이 길들여지는” ‘통일전선’의 무대(舞臺)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

    남북관계의 이 같은 왜곡 현상은 2003년 이번에는 1980년대 대학 캠퍼스에서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에 대한 충성 서약을 일상화(日常化) 하면서 북한으로부터 주로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제공되는 ‘민족해방 혁명’ㆍ‘민중민주주의 혁명’ 이론 학습을 통해 ‘친북’ 노선과 ‘좌파’ 이념으로 중무장한 ‘활동가’들인 소위 ‘386 세대’가 청와대를 장악한 노무현 정권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노무현 정권 임기 5년 동안 ‘386 세대’는 정계는 물론 관계 및 재계와 학계, 그리고 방송·TV·신문 등 언론과 문화예술 분야를 장악하여 대한민국 사회의 좌경화를 주도했다.

    그 결과로 북한은 “과거 남조선 사회의 주류였던 ‘반공·보수’ 세력은 변방으로 밀려나고 친북·연공 세력이 남조선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구가(謳歌)하기에 이르렀다. 남쪽에서도 보수·우파 진영으로부터 비명이 터졌다.
    “공산화 통일은 아직 되지 않았지만 남한은 이미 공산화되었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정권의 ‘친북·좌경’ 행보(行步)는 임기 만료까지 4개월을 남겨두었을 뿐 아니라 후임 대통령 선거 투표일을 불과 2개월 남겨둔 2007년 10월의 시점에서 무리하게 성사시킨 노무현의 평양방문 및 김정일과의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노무현 정권은 이미 차기 대통령선거 운동 기간 중이었던 11월 중순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 개최를 강행하는 무리수(無理手)도 사양치 않았다.

    남북 쌍방은 10월 평양 정상회담의 합의사항을 ‘총론’의 차원에서 <10.4 정상선언>이라고 약칭되는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그리고 11월 서울 총리회담의 합의사항은 ‘각론’에 차원에서 <11.16 총리회담 합의서>에 각기 담아 내놓았다. 

    <10.4 정상선언>과 <11.16 총리회담합의서>의 내용은 황당했다.
    이들 ‘합의서’들의 주요 내용은 크게 보아 3개의 보따리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보따리는 <6.15 선언>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는 ① 6월15일을 기념일로 지정하고, ②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를 ‘통일지향적으로’ 정비한다는 합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보따리는 사실상 서해상의 NLL(북방한계선)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내용이었다.
    “서해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여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정”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세 번째 보따리는 경제적 타당성과 재원 염출 방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대규모 대북 경협 프로젝트들에 관한 방만하기 짝이 없는 합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세 번째 보따리에는 ① 해주경제특구와 해주항 개발, ②개성-평양 고속도로와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③ 안변과 남포 지역의 조선단지 건설, ④ 2단계 개성공단 건설, ⑤ 단천지구 등 지하자원 개발, ⑥ 농업분야 종자생산과 가공시설 및 유전자원 저장고 건설 등의 현지 조사와 ⑦ 금강산 면회소 쌍방 사무소 준공, ⑧문산-봉동간 철도 화물 수송 개시 등 8개 프로젝트의 연내 실시와 함께 이를 위해 도합 14건의 기능별 남북회담들을 2007년 중에 소집한다는 합의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밖에도 이 세 번째 보따리에는
    ① 농업, 보건의료, 환경보호 등 분야에서 협력,
    ② 백두산 관광과 이를 위한 서울-백두산 직항 항공로 개설,
    ③ 2008 베이징 올림픽,
    ④ 이산가족 사업 확대,
    ⑤ 자연재해 대책,
    ⑥ 국제무대에서 민족이익과 해외 동포의 권리 및 이익을 위한 협력 등에 관한 합의를 담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무리한 평양방문과 남북정상회담으로 피날레를 장식한 노무현 정권의 ‘친북·좌경’ 행보로 인하여 극대화된 국가안보와 정체성에 관한 국민적 불안감은 200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7대 대통령선거 결과를 통해 폭발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 결과는 한나라당 이명박(李明博) 후보의 압승이었다.
    표차는 이 나라 직선제 대통령 선거 사상 최대인 530만표였다.
    표심(票心)의 의미는 명백했다.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선거혁명’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2007년의 제17대 대통령선거전 양상에는 특이한 점이 있었다.
    정동영(통합민주), 이명박(한나라), 권영길(민주노동), 이인제(민주), 문국현(창조한국), 허경영(경제공화), 전관(참사랑연합), 금민(한국사회), 이회창(무소속) 등 9명의 후보가 완주한 제17대 대선은 사실은 오직 한 가지의 선거 이슈만을 가지고 치러진 선거였다.

    2007년 대선은 한 마디로 나머지 모든 후보가 한 편이 되어 BBK 문제를 가지고 이명박 후보 한 사람을 공격한 선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에 참가한 유권자의 48%인 1,150만명의 선택은 이명박 후보였다.
    여기에 담긴 의미는 ‘정권교체’였고, 그 뜻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버리고 새로운 대북정책을 채택하라는 강력한 요구였다.

    김대중 정권의 작품인 <6.15 선언>,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작품인 <10.4 정상선언>과 <11.16 총리회담 합의서>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 선언이기도 했다. 

    4. 남한은 60년 체제경쟁의 승자, 통일은 남한이 주도해야

    남북한은 1970년대 초 이래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때그때 양측 정권의 정치적 필요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통일 문제에 관한 ‘원칙적 합의’를 만들어 냈다.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ㆍ1992년의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약칭 <남북기본합의서>) 그리고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과 2007년의 <10.4 정상선언>이 그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들 ‘원칙적 합의’들은 예외 없이 남북 간에 ‘해석의 차이’를 불러일으켜 결국 문제의 ‘원칙적 합의’들의 ‘실천’과 ‘이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예정되었던, 그리고 예고되었던, 결과를 초래했다. 

    예컨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은 여기에 담겨진 소위 ‘조국통일 3대원칙’(‘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 문제였다.
    이 ‘원칙’에는 북한이 추구하는 주한미군 철수로 상징되는 한미동맹 해체와 함께 국가보안법의 폐기와 대공정보기관의 해체 등 ‘용공’ 내지 ‘연공’ 정권의 수립에 대한 장애물 제거를 목적으로 남한에게만 일방적으로 해당되는 요구들이 담겨 있었다.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 때 이 같은 북한의 불순한 요구는 당연히 거부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의 이른바 <10월 유신(維新)> 단행의 명분을 찾고 있던 남쪽의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7.4 ‘남북공동성명’에 수용하는 치멍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 뒤 간혈적으로 추진된 여러 갈래 남북대화들은 예외 없이 문제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거듭 포함시켜야 했고, 그리고는 이 원칙에 대한 해석 상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그동안 추진되었던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들이 거의 예외 없이 중도에 난파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야만 했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궁극적으로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60년의 분단사(分斷史)가 증언해 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분단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세 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대한민국의 체제로 이루어지는 통일, 북한의 체제로 이루어지는 통일 또는 두 체제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닌 ‘제3의 체제’로 이루어지는 절충형 통일이다.

    그런데, 통일의 체제 문제에 관해서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남북한의 두 체제 간에는 이미 지난 60년간 치열한 체제 경쟁이 진행되어왔고 그 경쟁의 결과가 지금 한반도의 남과 북에 극적으로 전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체제경쟁을 통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실험은 5천년 민족 역사를 통해 전례가 없는 기념비적 ‘성공담(成功譚)’으로 실증(實證)된 반면, 북한의 ‘공산주의독재’와 ‘계획경제’ 실험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실패작(失敗作)’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이 같은 체제경쟁의 결과는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세 개의 통일 시나리오 가운데 우리가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당연히, ‘실패한 체제’, 즉 북한의 ‘공산주의독재’와 ‘계획경제’ 체제가 아니라 ‘성공한 체제’, 즉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이라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있는 것이다.

    더구나 ‘성공한 체제’와 ‘실패한 체제’를 절충ㆍ혼합하는 ‘비빔밥 식 통일’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선례가 없는 비현실적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참고해야 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등장했던 다른 분단국가들의 통일 사례가 그러한 참고의 대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더불어 ‘철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막을 연 냉전시대의 양극 구조 속에서 지구상에는 좌·우로 이데올로기를 달리 하는 4개의 분단국가들이 생겨났었다.
    우리나라와 함께 독일, 베트남, 예멘이 그러한 국가들이다.

    이 4개 분단국 가운데 우리나라만을 남겨 놓고, 다른 3개국에서는 그 동안 통일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통일은 ‘공산국가’였던 동독이 스스로 무너져서 서독에 편입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반면, 베트남의 통일은 비참한 국제적 대리전쟁에서 ‘공산국가’인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무력으로 정복하는 형태로 실현되었지만, 공산화 통일 후의 베트남에서는 역설적으로 베트남판 개혁·개방인 ‘도이모이’의 추진을 통해 공산주의로부터의 이탈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합의통일’의 유일한 경우였던 예멘의 통일은 역설적으로 이념을 달리 하는 ‘분단국가’ 간에 ‘합의통일’이 현실적으로는 비현실적인 것임을 보여 준 사례였다.

    예멘의 ‘통일’은 일단 ‘협상’과 ‘합의’를 통해 남북 예멘이 화학적으로 ‘용융(熔融)’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혼합(混合)’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국가의 모든 ‘자리’에 남ㆍ북 예멘 출신의 사람을 이중적(二重的)으로 중복 임명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통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마 안가서 ‘반공’을 표방하는 북예멘 세력이 무력으로 남예멘의 ‘공산주의’ 세력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북예멘 중심의 ‘반공’ 통일을 성취했다.

    1940년대 중국에서 예멘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초래했던 ‘국공합작(國共合作)’ 협상의 경우와 함께, 예멘의 경우는 이데올로기를 달리 하는 ‘분단국가’가 ‘합의’에 의한 ‘통일’, 즉 ‘제3의 체제’에 의한 ‘통일’을 이룩하는 것은 하나의 ‘신기루(蜃氣樓)’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였다.

    5. <6.15 선언>은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불법문건

    사실은,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우리가 이룩해야 할 통일의 ‘방법’과 ‘내용’이 국가 기본법인 헌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3조의 영토 조항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 전역과 부속도서’로 명시함으로써 이 영토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주권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 법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가’로 보지 않고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보는 국가보안법의 법적 토대가 바로 헌법 제3조의 영토 조항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헌법은 제4조에서 “통일을 지향한다”는 표현으로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입장을 택했다.
    ‘통일’의 상대방이 되는 또 하나의 ‘분단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4조는 통일이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의 국가적 과제임을 분명히 함과 동시에 통일의 ‘방법’은 ‘평화적 통일’이어야 하고 통일의 ‘내용’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보장되는 것이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헌법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은 물론 ‘통일한국’에서 보장되어야 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구체적 내용을 여러 조항에 걸쳐 열거해 놓고 있다.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이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제11조에서 헌법은 대한민국에는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사회적 특수 계급도 인정될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분단체제하에서의 대한민국에서는 물론 앞으로 이루어질 통일국가에서도 ‘계급사상’이나 ‘계급관념’에 기초한 제도가 용인되는 것을 봉쇄한 것이다. 

    더구나 제8조에서 헌법은 “정당설립의 자유”와 “복수 정당”제를 보장”하면서도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배치되는 정당”은 헌법재판소에 의하여 ‘해산’될 것임을 분명히 해 놓았다.

    대한민국에서 헌법은 제4조를 통해 통일 ‘이전’은 물론 ‘이후’에도 공산당의 존재를 불법화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헌법은 제14조에서 제23조에 걸쳐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은 물론 통일한국에서 보장되어야 할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열거하고 있다. 
    ‘거주이전의 자유’(제14조), ‘직업선택의 자유’(제15조), ‘주거의 자유’(제16조), ‘사생활의 자유’(제17조), ‘통신의 자유’(제18조), ‘양심의 자유’(제19조), ‘종교의 자유’(제20조),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제21조), ‘학문ㆍ예술의 자유’(제22조), ‘재산권 보장’(제23조) 등이다. 

    그리고 헌법은 제10조에서 이 같은 기본권과 자유의 ‘불가침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 같은 헌법의 명문 조항들은, 이들 조항들이 사전에 개정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 추구할 수 있는, 그리고 추구해야 하는, 통일에는 ‘방법’과 ‘내용’면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2000년 6월에 있었던 김대중(남)과 김정일(북) 사이의 ‘남북정상회담’의 소산인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통일방안에 관한 합의가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내용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낮은 단계’이든지, ‘높은 단계’이든지, 한반도에서 ‘연방제’에 의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남북한이 각기 각자의 ‘주권’을 포기하고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합되어 ‘중앙정부’는 ‘공동’으로 구성하고 남북의 두 ‘분단국가’는 각기 ‘주권이 없는 지방정부’로 격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 경우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근본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의 헌법이 사전에 개정되거나, 아니면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가 사전에 해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라고 하는 ‘공산국가’가 대한민국과 함께 ‘연방’이라는 이름의 ‘통일국가’에 합류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북한 땅에 실존하는 하나의 ‘주권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들만의 헌법과 또 그 헌법에 의거하여 “국가보다 상위의 정치실체”(헌법 제11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지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인 <조선로동당>의 규약이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계급주권론’(헌법 제4조: “주권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테리와 근로인민에게 있다”)에 입각한 ‘공산국가’라는 사실이다.

    이 같은 북한이, 그 같은 내용의 ‘공산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변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이를 불허하는 대한민국 헌법이 여전히 발효 중인 상황에서,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통일국가’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내용으로 남한 정부와 ‘합의’하는 것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헌법 제69조에 의거하여 취임에 즈음하여 “국헌 준수”를 서약한 김대중 대통령(당시)은 북측의 김정일과 이 같은 ‘위헌적’인 내용의 <6.15 선언>에 ‘합의’함으로써 형법 제91조1항의 ‘국헌문란죄’(“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6.15 선언>과 이에 기초하여 이의 ‘재확인’과 ‘고수’를 다짐한 <10.4 정상선언> 및 <11.16 총리회담 합의서>의 해당 내용은 마땅히 헌법 제8조와 제111조의 관련 조항에 의거하여 <헌법재판소>(<헌재>)에 제소되고 <헌재>의 “헌법 불합치” 판결을 통해 무효화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방법에 의한 법적 구제는 <헌재법>이 제69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때로부터 90일 이내, 그 사유가 있은 날부터 1년 이내”라는 심판청구 시한이 경과함으로써 불가능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헌법적 부작위(不作爲)”의 상황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6. 대북정책의 정책 영역은 4중적 - 분업체제가 필요하다

    우리의 '통일정책'은 당연히 그 목적이,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원하는 '통일', 즉 "대한민국 주도하에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북한 사회의 자유화와 민주화를 내용으로 하는 북한체제의 선행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 같은 방향으로의 ‘현상타파’는 아직 현실성이 없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오늘날의 ‘탈냉전’이라는 전 세계적인 시대적 조류에도 아랑곳함이 없이 '민족해방혁명'과 '인민민주주의혁명'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혁명이론과 이에 바탕을 둔 '남조선혁명' 노선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오히려 북한 주도하에 공산화 통일을 달성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북한 내부에서 필요한 체제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있다.

    결국 당면한 우리의 대북정책은 우선 1단계로 '통일'에 앞서서 한반도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 입각하여 남북 쌍방 간에 '잠정적 특수관계'를 설정하고 상호 평화공존하는 가운데 북한의 체제변화를 통하여 남북 간에 필요한 정도의 '가치의 상사성'과 '체제의 상용성'이 확보될 때까지 "분단을 관리"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의 정책수단이 곧 '남북대화'다. 이 같은 사실은 한반도의 남북관계가 여전히 ‘분단관리’라는 '현상유지' 단계에 머물러 있어서 ‘통일’을 추구할 수 있는 단계에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는 남북대화를 통하여 곧바로 통일을 달성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러한 오해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북한의 현 정권 세력과의 ‘대화’와 ‘합의’를 통하여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북대화'의 북한측 상대방이 억압받는 '인민,' 즉 동포들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정권 세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장차 이룩할 ‘통일한국’에서는 북한의 현 ‘정권 세력’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은 독일의 통일과정이 웅변해 주고 있다.

    우리의 통일의 상대방은 북한의 동포들이지 '정권 세력‘이 아니다.
    '통일'의 과정이 실제로 전개되는 시점에서 오늘날 북한의 '정권 세력’은 '도태'의 대상, '심판'의 대상이며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그들의 '개전' 여하에 따라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공산 독재정권을 상대로 하는 ‘남북대화’에서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불가하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독재정권을 상대로 통일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지난 60여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북한에서의 ‘독재’와 ‘억압’을 추인(追認)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실현된 ‘통일국가’에서 북한에서의 그 같은 ‘독재’와 ‘억압’의 주역들에게 ‘주주(株主)’의 위상을 부여하고 나아가서 그 같은 ‘독재’와 ‘억압’을 ‘통일된 국가’에서도 최소한 일정 부분 수용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 간의 통일문제 논의는 북한이 변화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는 문제다.
    북한에서는 먼저 김정일 정권이 물러나고 민주화된 정권이 들어서거나 아니면 김정일 정권이 국내외 정세에 눈을 떠서 안으로는 개혁을, 그리고 밖으로는 개방을 수용하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은 먼저 남북관계에서는 이른바 ‘남조선혁명’에 기초한 ‘적화통일’ 노선을 포기하여 1953년의 6.25 전쟁 휴전체제인 남북간의 ‘적대적(敵對的) 공존관계’를 ‘평화적(平和的) 공존관계’로 전환시키는 데 동의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그 같은 ‘평화공존’ 과정에서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위치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스스로 정책 노선의 궤도를 수정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1990년 동독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으로 편입되는 통일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 뒤에라야 실현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분단관리’ 단계에서 우리는 북한의 '공산독재‘ 체제를 ’대화‘의 상대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체제 하에서는 그들이 북한의 '지역'과 '인구'를 실질적으로 통제 관리하고 있는 실권자(實權者)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상대로 하여 우선 현존 정전체제를 지속시키는 가운데 이를 남북 간의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논의해야 하고 상호 "신뢰구축 조치"들을 강구하여 서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 제도화된 평화공존의 테두리 안에서 이산가족을 포함하여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추진하면서 북한 내부에 필요한 변화가 생길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의 약칭)는 바로 그 같은 내용을 남북이 합의하여 담아낸 하나의 장전(章典)이었다. 

    통일 이전의 단계에서 남북대화 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북한의 체제변화가 보다 빠른 시일 안에 진행되도록 작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자칫하면 북한의 반발을 유도하여 예측할 수 없는 안보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내부 변화를 가속화 시키는 일은 북한이 반발하지 못하도록 우리 쪽에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합법 활동’의 영역이다. 당연히 이 일은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정보 및 공작 전담 국가기관들이 은밀한 방법으로 추진해야 할 일이다.

    한반도의 남북관계에는,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제4의 대북정책 영역’이 있다. 그것은 북한에서 1980년대 말 루마니아와 동독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북한에서의 ‘급변사태’에도 대비할 절대적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주관하는 가운데 한-미 연합작전의 작전계획 중 북한에서의 ‘급변사태’ 대비계획인 <작전계획 5029>를 한국 정부의 <평화계획> 및 <충무계획>과 연동시켜 시급히 완성시킬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남북관계에는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4중(四重)의 정책영역이 있다.
    즉,
    ① '통일정책'을 준비하는 영역과
    ②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영역,
    ③ 북한의 변화를 가속화 시키기 위한 '대북공작'을 수행하는 영역과
    ④ 북한에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영역이 그것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가운데 정책영역으로서 '통일정책'과 '남북대화' 간에는 상호 모순성이 존재한다. 우선 북한의 행위 주체와 관련하여   '통일정책'에서는 북한의 '공산당국자'들이 '도태'와 '청산'의 대상이 되는 반면 '남북대화'에서는 이들이 대화의 '상대방'이 되는 모순이 있다.
    '통일정책'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관리하는 정태적(情態的) 정책 영역인 반면 '남북대화'는 '현재'를 관리하는 동태적(動態的) 정책 영역이다.

    이 같은 정태적  정책 영역과 동태적 정책 영역을 뒤섞어 관리할 경우 당연히 정태적 정책영역은 동태적 정책 영역에게 세(勢)로 밀려서 퇴색이 되고 마는 것이 불가피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위험은 심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통일정책’이라는 정태적 정책 영역과 ‘남북대화’라는 동태적 정책 영역이 뒤섞여서 관리되는 경우 발생하는 위험한 상황은 ‘남북대화’에 밀린 ‘통일정책’이 실종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그 같은 현상이 이미 ‘현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는 지금 이미 ‘통일정책’이 실종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정책'과 '남북대화' 사이에는 또 기능상의 차이도 존재한다.
    전자가 정책연구와 교육홍보를 주 업무로 하는 반면 후자는 정책 부처 뿐 아니라 현업 부처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조정 통제하는 일이 주 업무가 된다.

    더구나 그동안의 ‘좌파’ 정권 기간 중에 ‘안보’와 ‘통일’이 경합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대한민국의 현실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관련된 문제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통일부로 몰아주어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되어 왔다.

    이 결과로 심지어 대외적으로 은밀한 추진이 불가피하여 고도의 보안이 요구되는 '대북공작'에 관계된 일까지도 통일부가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현상까지 초래되고 있었다. 

    합리성과 과학성을 자랑하는 서독 사람들이 통독 이전의 시기에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서독은 이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서독은 '통일정책'은 우리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내독관계성>(<전독성>의 후신)에 전담시켰다.
    <내독관계성>은 우리의 <민족통일연구원>에 해당하는 <전독문제연구소>를 산하에 두고 순수한 통독정책 연구와 교육홍보 분야의 업무를 전담하여 수행했다.

    반면 동독과의 협상, 즉 대화는 내각수상실에 <특수임무 담당 무임소국무상>을 두고 그 밑에 정부의 관계 부처에서 담당분야 국장급 간부들을 차출 받아서 하나의 태스크 포스로 '협상 전담반'을 편성하여 대 동독 협상을 전담케 했다.

    대 동독 협상 전담반을 수상실에 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양독 협상이 '고도의 통치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수반인 수상이 이를 직접 책임지고 장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 하나는 양독 협상의 현안들이 국정 전반에 걸친 사안들이고 복수의 이해 당사 부처들이 관계되기 때문에 이들 복수 부처의 입장들을 조정 통제하기 위해서는 수상실의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는 별도로 동독에 대한 '공작' 사안들은 당연히 정보전담 부서인 BND(연방정보부)의 소관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대북정책 추진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혼선을 수습하고 예방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도 이제는 '통일정책'과 '남북대화'를 차별화하여 관리하는 것이다.

    통일부는 '통일정책'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남북대화'를 전담하는 별도의 부서를 조직ㆍ운영할 필요가 있다.
    우리도 통일부의 조직과 기능 및 인적 구성을 바꾸어서 서독의 <내독관계성>이 했던 것처럼 통일부는 통일정책의 연구와 개발, 그리고 이에 관한 교육과 홍보 업무를 전담하게 해야 한다.

    통일부는 ‘남북대화’에서 손을 떼고 ‘남북대화’는 다른 방법으로 관리해야 한다.
    서독은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에 '협상 전담반'을 수상실에 두었었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중심제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는 그러한 '협상 전담반'이 대통령실에 설치되는 것이 옳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서는 현재 통일부 산하에 있는 <남북대화사무국>을 대통령실로 이관하여 대통령 직속 기구로 전환시키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국무위원 급의 책임자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총괄하게 하는 방법이 고려될 수 있다.

    국무총리 산하에 대통령에게 직보(直報)하는 <무임소 국무장관>을 두고 그로 하여금 ‘남북대화’를 전담하게 할 수도 있다.
    정부의 관계 부처와 <국가정보원>(<국정원>)은 그들의 전문성을 가지고 '협상 전담반'에 참여하여야 한다.

    물론 북한의 변화 촉진을 위한 '대북공작'에 관련된 업무는 당연히 국가정부기관인 <국정원>의 고유한 업무로 은밀하게 추진되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통일정책'의 영역과 '남북대화'의 영역, 그리고 '대북공작'의 영역이 각기 전문성에 입각한 분업체제를 구축하게 될 때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체제는 효율성의 극대화가 가능해 질 수 있는 것이다.

    7. 종말이 가까워지는 북한 체제 - ‘급변사태’ 대비 ‘비상계획’ 서둘러야

    1990년에 있었던 독일의 통일 과정이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은  만약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여 독일식 "편입 통일"이 우리에게 강요될 때는 실로 엄청난 국민적 부담이 불가피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독 이후 서독 국민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희생이 우리 국민들에게 강요될 때 우리 국민들이 이를 감내할 여력이 있느냐의 여부는 이미 왈가왈부(曰可曰否)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 하면 그 같은 상황이 만약 오게 된다면 그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우리에게 밀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에서 '체제붕괴'라는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우리의 제한된 국력을 최대한 가동하여 지혜롭게 이에 대처하도록 하는 '비상계획'을 반드시 미리 마련해야 한다.

    오늘날 북한이 처해 있는 상황으로 본다면, 북한의 종말(終末)이 결국 ‘급변사태’의 형태로 도래(到來)하고 그 시기도 상당히 앞당겨질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비상계획’을 마련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통일의 경우에서 더 크게 교훈을 삼아야 할 타산지석이 있다.
    그것은 서독이 독일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1990년 동독의 붕괴로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서독은 통일의 과정을 지나치게 서두르는 과오를 범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치명적인 정책적 실착이 나왔다.

    하나는 서독 마르크에 비해 가치가 4분의 1 미만인 동독 마르크를 등가(等價) 교환해 준 것이고, 또 하나는 동독이 국유화했던 토지에 대한 원 소유주의 소유권 주장을 인정해 준 것이다.
    이 두 개의 실착은 동ㆍ서 양독의 경제통합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되고 통독 이후 독일 경제의 침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특히 사회적 경쟁력의 차원에서 서독 주민들과의 일체화(一體化) 준비가 안 된 동독 주민들을 일거에 서독 주민들과 통합시킨 결과로 많은 원 동독 주민들의 ‘2등 국민화’가 초래되어 통일의 요체가 되어야 할 ‘국민 통합’을 성취하는 데 지장이 초래된 것이다.

    통일이 이루어진 후 30년 이상이 지난 오늘까지도 독일에서는 ‘베씨 (원 서독 주민)’과 ‘오씨 (원 동독 주민)’ 사이의 정치 문화적 괴리가 소멸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같은 과오가 한반도 통일의 경우 재연(再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북한의 체제변화가 발생하여 통일의 충분조건이 마련되더라도 서독이 했던 것처럼 곧바로 통일로 달려가는 졸속(拙速)을 회피해야 한다.
    그 대신 일정기간 남과 북을 별도 관리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북한지역을 별도로 관리하여 북한 지역에서 1865년 미국 ‘남북전쟁’이 북군(北軍)의 승리로 종결된 후 남부(南部) 11개 주에서 조성되었던 것과 같은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에서 북으로 몰려 가는 남한의 모리·협잡·투기배들이 북한의 이권을 ‘농단(壟斷)’하여 북한 동포들을 늑탈(勒奪)하는 일을 방지하면서 북한 동포들로 하여금 민주주의 정치와 시장경제를 체득(體得)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전개될 경우에 대비한 ‘비상계획’은 이 같은 과도적 ‘일국양제’를 축(軸)으로 하여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