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일성 부친' 김형직이 3.1운동 주도했다고 역사 날조
  • 그날의 뜨거운 함성 재현하기 위해 한반도기 또는 인공기를 들어야 하나?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명을 반인민적인 부르주아 사대주의 민족반역자로 규정하고 3.1운동을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계급투쟁에 입각해 서울이 아닌 평양에서 주도한 인민봉기라고 주장하는 북한과 대한민국이 금년 3.1절 100주년 공동기념행사를 한다?  

    무엇보다 100년전 3.1운동에 참가한 우리 민족이 흔든 것은 태극기인데  공동기념행사를 한다면 그날의 뜨거운 함성을 재현하기위해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흔들며 만세3창을 불러야하고 집집마다 한반도기를 달아야 하는가? 또는 태극기와 북한의 인공기를 함께 흔들어야하는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해 9.19 평양 남북공동선언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정부가 최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3.1운동 100주년 공동행사를 서울, 개성, 평양 중 한 곳에서 열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행사 준비를 맡은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지난 1월 하순 공동행사 개최 장소와 형식·내용 등을 담은 우리측 계획안을 북측에 전달하고 현재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남북이 공동으로 하는 기념사업으로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와 한반도 평화대장정 등 남북대학생 교류, 학술회의·전시회 등이 계획돼 있다. 또한 금년 안중근 의사 탄생 140주년과 의거 110주년을 계기로 유해발굴과 독립운동 행적지 순례, 동양평화론 재조명 학술회의 등 공동사업도 검토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해 4월 27일 ‘도보다리 대화’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2019년에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를 남북공동으로 갖자고 제안해 동의를 얻었다고 청와대가 밝혔다.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는 100주년기념행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개최하며, 이를 위한 실무적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문서로 합의했다. 오는 4월 11일은 3.1운동 정신에 따라 상하이(上海)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공동기념사업추진대상에는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정부가 임정수립 공동기념행사를 강조할 경우 남북한간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해 제외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3.1운동 100주년 남북공동행사를 추진하고 있는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위원회’의 위원장은 한완상 전 통일·교육부총리, 위원으로는 김명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김주영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박유철 광복회 회장,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김호기 연세대 교수 등 문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이른바 진보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남북공동기념행사가 만약 서울에서 열린다면 이를 계기로 지난해 연말 무산된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이 때가 아니겠냐는 추측도 분분하다. 문 대통령이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김정은 답방이 이뤄지는 것이 순서라고 지난 1월 10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밝힌 바 있어, 미북간 핵협상이 진전되고 북미정상회담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탄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남북의 3.1운동 인식 전혀 달라: 북한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운동 주도했다고 역사 날조-발원지도 서울 탑골공원 아닌 평양에서 시작, 전국 확산됐다고 기록

    하지만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북한이 대한민국에 굴복하여 그들의 날조된 역사를 바로잡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주도하고 만세 시위에 7세의 김일성이 참가했다고 교과서, 사전, 역사서 등 모든 문헌에 기록하고 가르침으로써  3.1운동을 비롯한 우리의 근현대사를 김일성 가계의 혁명역사로 왜곡·날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북한과 공동기념행사를 거행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임정에 대해서도 임시정부 요인을 부패타락한 사대주의자로 매도, 폄훼함으로써 정통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북한은 △1919년의 3.1운동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의 주도로 그가 혁명의 씨앗을 뿌린 평양 숭실중학교 청년학생들이 주동했으며 △3.1운동 발원지도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이 아니라 평양의 숭덕여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서울 등 전국으로 확산됐다고 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역사서에 날조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3.1운동의 성격을 3.1인민봉기, 계급투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를 철저히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비굴한 투항자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이 외세에 의존한 부르주아 상층분자들이어서 운동자체가 실패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가 주권회복 등  국가의 독립과 자유 · 평등 · 행복 추구권과 함께 인간의 생명 및  인권 존중을 바탕으로 한 3.1정신을 거역한 북한 민족반역자들과 만약 기념행사를 같이 한다면 이는 헌법위반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호국영령을 포함한 독립운동가들과 애국 시민을 모독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동행사를 하려면 먼저 북한에 대해 날조한 역사 시정부터 요구해야 할  것이다. 
  • ▲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이끌어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급투쟁이며 인민봉기였다고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를 김일성혁명역사로 바꿔 가르치는 북한의 고등중학교 5학년용 역사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표지.
    ▲ 북한은 3.1운동에 대해 김일성 아버지 김형직이 이끌어 전국으로 확산시킨 계급투쟁이며 인민봉기였다고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사진은 3.1운동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를 김일성혁명역사로 바꿔 가르치는 북한의 고등중학교 5학년용 역사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표지.
    김형직은 3.1운동때 평양에 있지 않았는데도 역사 날조

    김형직은 평양 숭실중학교를 중퇴하고 시골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이력은 있으나 그와 3.1운동을 연결시킬 아무런 근거나 자료가 없다. 김형직은 소위 ‘조선국민회’ 가입사건으로 1917년 10월 평안남도 일경(日警)에 체포됐다가 1918년 10월경 풀려난 직후 평안북도 중강진으로 이사를 했고, 거기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따라서 김형직이 숭실중학교 학생들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3.1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은 허구이자 날조다. 김형직은 3.1운동 당시 평양에 없었기 때문에 평양 시위를 주도하지도, 참가하지도 못했다.

    조선국민회란 3.1운동 직전 숭실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이 주축이 돼 설립한 기독교 반일 지하독립운동단체로 숭실학교 출신인 장일환(張日煥)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Korean Military Corporation)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에 따라 귀국,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조직한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 선전 문서들은 조선국민회를 김형직이 결성했다고 허위 기록을 하고 있다. 김형직은 다만 25명 정도로 구성된 이 조직의 회원으로 잠시 가입했을 뿐이다.
  • ▲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2009년 3.1일 열린 북한의 3.1절 90돌 평양시 기념보고회 모습. 3.1절 평양시 기념 보고회는 지난 1999년 80돌 보고회에 이후 10년 만에 열린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캡쳐
    ▲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2009년 3.1일 열린 북한의 3.1절 90돌 평양시 기념보고회 모습. 3.1절 평양시 기념 보고회는 지난 1999년 80돌 보고회에 이후 10년 만에 열린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캡쳐

  • ▲ 북한의 3.1절 90돌(1999년) 기념우표. ⓒ연합뉴스
    ▲ 북한의 3.1절 90돌(1999년) 기념우표. ⓒ연합뉴스
    조작과 허구로 가득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도 김형직이 3.1인민봉기 이전 추운 겨울날 집을 떠나 의주, 창성, 벽동, 초산, 중강을 비롯한 평안북도일대와 만주지방에서 조선국민회 조직을 복구하고 동지들을 모아 광범한 군중을 결속하기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평양시위를 주도했다는 언급은 없다. 집필자(김일성)의 ‘불찰’인 듯 회고록과 교과서가 상호 모순되게 기술하고 있는 꼴이 돼버렸다.(아래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관련 부분 기술 참조)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을 일제에 투항한 부르주아 상층분자로 매도

    북한 교과서는 또 손병희 등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은 거명하지 않은 채 이들을 외세에 의존하고 부패타락한 부르주아 상층분자, 일제에 투항한 비겁분자, 변절자 등으로 매도하면서 “따라서 이들이 외세에 의존했기 때문에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3.1운동 직후 4월 11일 수립한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저희들끼리 ‘자치파’와 ‘독립파’로 나뉘어 서로 지도적 자리를 차지하려고 추악한 파벌싸움과 내각개편놀음을 끊임없이 벌였다고 아주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정부’안의 일부 숭미사대주의자들은 임시정부 직속기관으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라는 것을 두고 미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에 빌붙어 조선독립을 구걸하기 위한 청원운동까지 벌였다면서 “남조선 당국자들이 그 무슨 법통이요, 정통성 계승이요 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저들의 범죄적 죄악을 가리고 역사를 날조, 왜곡하는 뻔뻔스러운 기만술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광복 70주년을 맞은 2015년 9월 11일 박근혜 대통령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재개관식 참석을 ‘반역적 정체를 미화분식하는 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정통성을 폄훼한 바 있다.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1운동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수십만 명의 서울시민이 반일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기술해 왔으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역사적인 3.1 인민봉기는 평양에서 김형직의 혁명적 영향을 받은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의 대중적인 시위투쟁을 첫 봉화로 해서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김일성이 만 7살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양의 3.1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고 기술함으로써 김형직과 김일성을 3.1운동의 선도자로 치켜세우는 등 3.1운동을 김일성 가계의 혁명역사로 바꿔버렸다. 북한 교과서는 3.1인민봉기 때 김일성이 어른들의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해 짚신까지 벗어들고 뜀박질로 시위 대열을 따라갔다고 적고 있다.

    3.1운동 성격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계급투쟁, 명칭은 인민봉기로 규정

    북한이 3.1운동을 3.1인민봉기로 이름을 바꾼 것은 이 운동이 노동자, 농민, 학생 등 소위 프롤레타리아가 주체가 되어 일으킨 계급투쟁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평양의 백과사전출판사가 2000년에 펴낸 ‘조선대백과사전’ 13권 458쪽을 보면 3.1인민봉기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등 각계각층 애국적인 인민들의 희생적인 투쟁이었으나 평화적 시위가 폭동적 시위로 변하자 이에 놀란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분자들이 시위를 막아보려고 책동했다고 적고 있다.

    이 사전은 특히 408쪽에서 손병희 등 33인 민족대표를 부르주아 민족운동상층인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민족대표를 자처하여 나선 이들은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헛된 기대를 걸고 청탁과 구걸의 방법으로 조선독립을 이룩해 보려는 투항주의 분자들”이라고 매도했다. 이와 관련, 북한 역사서 ‘근대조선력사’는 3.1인민봉기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아니라 1917년 마르크스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도하에 단행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인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33인이 약속을 어기며 독립선언식 장소를 당초 예정된 파고다공원에서 요리집인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청년학생들과 애국적인 인민들의 투쟁기세가 고조되자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라면서 “태화관에 모인 뒤에도 그날 오후 2시 먹자판을 벌여놓고 독립선언서도 낭독하지 않은채 불교대표 한용운의 짤막한 연설에 이어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자수, 대부분 투항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전은 이어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 지도자 33인은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비굴한 투항자”로 평가하고 있다.

    ‘3.1인민봉기’의 가장 큰 실패원인으로‘탁월한 혁명적 수령 없었다’는 점 꼽아

    북한 교과서는 3.1인민봉기가 세계 여타 식민지예속국가 인민들의 민족해방운동에 고무적인 영향을 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면서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김일성이나 김정일 같은 탁월한 수령의 영도, 그리고 혁명적인 당(黨)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3.1인민봉기는 어떠한 혁명운동도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심각한 교훈을 조선혁명가들과 애국적 인민들에게 남겼다고 주장한다.

    교과서는 3.1운동 실패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원인으로 각각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과 미국의 책동을 들고 있다. 조선대백과사전은 13권 459쪽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일제의 탄압만행을 적극 지지하고 부추겼으며 저들의 선교사, 의사 등을 내세워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반일항쟁의 기운을 가라않히려고 책동했으며 투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독립청원운동’의 테두리안에 머물러있게 하려고 집요하게 날뛰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도 115-116쪽에서 3.1인민봉기의 실패원인이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있다고 기술하면서 ‘탁월한 수령의 영도’와 ‘혁명적 당의 지도’가 없이는 혁명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종래 외면해오던 유관순에 대해서는 1999년 펴낸 ‘조선 대백과사전’과 2000년 발간한 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교과서 ‘조선력사’에서 “1919년 3.1 인민봉기 때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일제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운 여학생” 정도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교과서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경 하얼빈(哈爾濱)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였던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해 독립투쟁정신을 평가하면서도 김일성같은 수령의 탁월한 지도를 받지못해 독립쟁취에 실패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의 고등학생용 역사교과서인 ‘조선력사’는 “안중근의 투쟁은 비록 일제놈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우리 인민의 애국적 투지를 과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은 이룩하지 못하였다”면서 “이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서는 인민대중이 탁월한 수령의 령도밑에 조직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였다”고 적고 있다.

    물론 북한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안중근 의사를 칭송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출생 125주년 기념우표, 안중근 의사 기념주화 등이 나온 바 있고, 심지어 안중근 의사를 주제로 한 영화까지 나왔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재조명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1979년 제작된 영화로 김정일이 직접 연출을 지도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북한에서 매우 공들여 만든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1912년 이전의 항일혁명투쟁은 뛰어난 지도자가 없어 실패에 그쳤으며, 안중근의 이등박문 사살도 결국 조선의 식민지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는 내용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의미를 격하하고 있다. 여기서 1912년은 바로 김일성이 태어난 해다. 즉, 김일성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 항일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음으로써 조선의 해방을 가져왔다는 북한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항일투쟁도 투쟁인 만큼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한 것은 일부 맞다. 1930년대 국외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계보를 보면 민족주의 계열로 남만(南滿)의 조선혁명군과 북만(北滿)의 한국독립군, 공산주의 계열로 동북항일연군과 중국 관내 화북의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만이 조국의 이름, 민족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두산을 근거지로 독자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항일무장단체를 결성해 조선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라 1920년대는 비적(匪賊)활동, 그리고 1930년대는 중국공산당을 위해, 1940년대는 소련공산당을 위해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그가 항일투쟁 시기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조직들은 거의가 조작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된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다. 그는 개인자격으로 중국공산당 부대와 소련군 부대에 스스로 들어가 각각 이들 부대의 일원으로서 주어진 항일임무를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 그 임무는 일본에 항거한 군대활동일뿐 엄격한 의미의 독립운동, 즉 주권국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그는 해방과 함께 원동(遠東)에서 소련의 국익을 위해 스탈린에 의해 간택된 인물이다. 항일투쟁을 전개함에 있어서 우리 겨레 무장력의 경우와, 타국 군대 산하 무장력의 경우는 차이가 매우 크다.

    전 북한 로동당 비서 황장엽은 김일성이 속했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의 항일운동이지 조선독립운동이 아니라고 말하고 김일성이 백두산에 밀영을 설치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며 항일투쟁을 벌였다는 북한의 주장은 백두산 밀영과 조선인민혁명군 자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않은 날조된 것인 만큼  허위라고 밝혔다. 북한 교과서와 역사서는 이런 것을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가르친다.
  • ▲ 1996년 평양의 조선로동당출판사가 출간한 '김일성 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제7권)'에 실려 있는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상상도. 하지만 이 회고록은 왜곡과 조작, 날조로 가득차 있다.
    ▲ 1996년 평양의 조선로동당출판사가 출간한 '김일성 동지 회고록-세기와 더불어(계승본 제7권)'에 실려 있는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 상상도. 하지만 이 회고록은 왜곡과 조작, 날조로 가득차 있다.
    <다음은 북한 교과서와 역사서 등 문헌에 나타나있는 3.1운동과 임정 수립 등에 관한 날조, 왜곡 기록이다>      

    ▲3.1운동이 김형직이 뿌린 혁명의 씨앗으로 일어났다는 북한의 역사기록

    3.1인민봉기의 불길은 먼저 평양과 서울에서부터 타올랐다. 평양에서는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이신 김형직 선생님의 혁명적영향을 받은 평양숭실중학교의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주동적인 역할을 놀았다. 이날 낮 12시에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하여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녀학교 운동장에 모여 들었다. 청년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선이 독립국가이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하자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렬(대열)이 거리로 떨쳐나오자 로동자, 학생, 사무원들과 점원, 지어(심지어) 보통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 뛰쳐 나와 대렬은 삽시에 10여만명에 이르렀다.

    그때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여덟살의 어리신 나이에 시위대렬(대열)에 참가하시여 만세를 부르시며 보통문앞까지 가시였다. 이날 우리 민족의 류혈(유혈)을 처음으로 목격하신 어리신 대원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끓어 번지시였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 지자 만경대와 칠골인민들은 홰불을 들고 만경봉에 올라 가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런 투쟁이 여러날 계속되였다. 어리신 대원수님께서는 이때에도 군중들에게 마실 물과 홰불로 쓸 겨릅대를 날라 가시느라고 바쁘신 어머님을 따라 만경봉에 올라 만세를 부르시며 밤늦게까지 계시다가 내려 오군 하시였다.

    3월 1일 서울에서는 평양에서보다 좀 뒤늦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이 부르죠아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투항주의적 행동을 박차고 반일행쟁에 나섰다. 오후 2시 30분, 서울탑골동원에 모인 군중들앞에서 청년학생대표가 《독립선언서》를 읽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선포하자 군중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날 고종왕의 장례식을 보려고 지방에서 올라온 농민들까지 합세하여 수만명의 군중이 결사적인 시위를 벌렸다. (출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 pp. 113-114.)


    ▲김형직의 결론: 시위나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안되고 민중이 총칼로 원수와 싸워야

    1907년 6월 네데를란드(네덜란드)의 헤그(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리준을 비롯한 고종황제의 밀사들은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계와 그와 결탁한 미영제국주의자들의 배신행위로 하여 밀사들의 노력은 걸음마다 좌절되였다. 이렇게 되자 리준은 항거의 표시로 회의장에서 자기의 배를 갈라 자결하였다.

    1919년 3.1인민봉기는 민족적량심을 가진  조선사람들은 누구나 다 참가한 전민족적인 반일투쟁이였다.

    하지만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침략자들의 총칼에 7500여명의 희생자와 1만 600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실패하였다.

    몇달동안 만세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던 침략자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었는 데 그것은 망상이었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아버님(김형직)으로부터 물려받으신 두 자루의 권총을 통하여 무장투쟁으로써만 발톱까지 무장한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할 수 있다는 아버님의 숭고한 뜻을 깊이 새기시였다.

    3.1운동의 교훈이 보여주는 것처럼 시위나하고 만세나 불러서는 침략자들이 물러가지 않는다. ...민중이 총칼을 들고 일어나 원쑤와 싸워  나라도 찾고 착취와 압박이 없는 새 세상도 세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가 고심하여 찾아낸 결론은 이러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 회고록에서(출처: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의 혁명력사(고급중학교 제1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13, pp. 27-28.)

  • ▲ 중국 하얼빈 흑룡강성 혁명박물관 벽면에는 1930년대 중국 동북 지방(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가득히 전시돼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이 자료에는 김일성이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한 줄도 없다.
    ▲ 중국 하얼빈 흑룡강성 혁명박물관 벽면에는 1930년대 중국 동북 지방(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을 설명하는 자료들이 가득히 전시돼 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이 자료에는 김일성이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한 줄도 없다.
    ▲김일성이 7살 나이에 3.1독립만세 대열에 참가했다(?)는 '회고록’ 기록

    아버지가 집을 떠난지 얼마 안되여 3.1인민봉기가 터졌다. 3.1인민봉기는 일제의 10년간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중략)...3월 1일 평양에서는 낮 12시에 종소리를 신호로 수천명의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장대재에 있는 숭덕녀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독립선언서》를 랑독하고 조선이 독립국가라는 것을 엄숙히 선포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벌리였다. 시위대렬이 거리로 밀려나오자 수만명 군중이 이에 합세하였다...(중략)...만경대와 칠골인민들도 대렬을 지어 평양으로 밀려갔다. 우리는 이른 새벽에 조반을 지어먹고 온 집안식구가 독립만세시위에 나섰다. 떠날 때 수백명에 불과했던 시위대렬이 나중에는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군중은 북과 징을 울리고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보통문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여덟살(전통적인 우리식 계산법에 따른 나이.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출생)이였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앞에까지 갔다. 성안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가는 어른들의 걸음을 나로서는 미처 따라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너덜거리는 신발짝이 거치장스러워 짚신을 벗어서 손에 들고 뜀박질로 대렬을 따라갔다. 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출처: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중 제1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 제3절 ‘독립만세의 메아리’)

    ▲3.1운동 실패원인이 탁월한 수령의 영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교과서 기록


    3.1인민봉기는 미제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결국 목적을 이룩하지 못한채 실패하고 말았다. 3.1인민봉기가 실패하게된 가장 큰 원인은 이 운동이 탁월한 수령, 혁명적인 계급과 혁명적인 당의 령도를 받지못한 데 있었다. 3.1인민봉기가 실패한 다른 하나의 원인은 부르죠아민족주의자들의 계급적 제한성과 승미사대주의에 있었다.

    3.1인민봉기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19세기 중엽부터 수십년동안 계속되여 오던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시기는 끝나고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은 점차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3.1인민봉기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그것은 우리 인민의 반일민족해방운동에서 커다란 력사적의의를 가지였다. (출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 p. 116.)


    ▲16세 여학생 유관순이 감옥에서 굴함없이 싸우다가 희생됐다고 전한 교과서 기록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반일봉기의 앞장에서 싸우다가 일제경찰에게 체포된 16살의 녀학생인 류관순은 재판정에서도 재판의 부당성을 견결히 단죄하였으며 감옥안에서도 굴함없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출처: 조선대백과사전, 평양:백과사전출판사, 1999;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 p.115.)


    ▲안중근의사 의거는 애국투지 과시했지만 수령의 영도받지 못해 실패했다고 기록
     

    1909년 10월 26일 애국렬사 안중근은 할빈역두에서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격살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웨쳐 조선사람의 기개를 과시하였다. 일찍부터 황해도, 평안도 일대에서 애국적인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을 벌리던 안중근은 연해주에 들어가 반일의병대를 뭇고 국내에도 들어와 투쟁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의 모든 투쟁들이 다 실패하는 것은 본 안중근은 이등박문과 같은 개별적인 침략의 우두머리들을 처단하는 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면밀한 준비밑에 절호의 기회를 타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은 려순감옥에 갇혀서도 ‘제일강산’ ‘인내’라는 글을 써붙이고 1910년 3월 사형당하는 순간까지 애국적절개를 끗끗이 지키며 일제교형리들과 맞서 싸웠다.

    안중근의 투쟁은 비록 일제놈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우리 인민의 애국적투지를 과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은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서는 인민대중이 탁월한 수령의 령도밑에 조직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였다. (출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년, pp. 102-103.)


    ▲“사대주의자 임정 요인들은 ‘독립운동자금’ 명목으로 동포들로부터 돈걷어 갈취했다”기록

    3.1인민봉기를 계기로 브르죠아민족운동은 전면적으로 쇠퇴몰락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것은 독립군운동이 흐지부지되였으며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상층분자들이 반일독립운동을 집어 치우고 일제의 품속으로 기여 들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매국배족적인 책동을 감행한데서 나타났다.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전면적쇠퇴몰락은 우선 독립군운동이 와해되여 간데서 나타났다...(중략)...

    한때 일제침략군과 큰 싸움도 벌리면서 힘차게 벌어지던 독립군운동이 이렇게 와해된 것은 독립군이 로동계급의 혁명적군대가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군대,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군대였기 때문이다. 독립군운동이 빨리 와해되게 된 것은 또한 그 안에서 심한 세력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전면적쇠퇴몰락은 다음으로 부르죠아민족주의운동의 상층부들이 3.1인민봉기후 더욱더 매국배족의 길로 나간데서 나타났다...중략...

    한편 해외에 있던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상층부들은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이른바 《림시정부》라는 것을 꾸며내고 그 안에서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권력싸움을 벌리였다. 이와함께 그들은 큰 나라들에 조선이 독립하게 해달라고 구걸하러 다니는 사대주의망동도 부리였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독립운동자금》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돈과 값진 물건을 동포들로부터 빼앗아 저들의 배를 채웠다. 이처럼 부르죠아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부패타락과 매국배족행위는 독립군운동의 와해와 함께 나라 부르죠아민족운동의 쇠퇴몰락을 가져왔다. (출처: 조선력사(고등중학교 제4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2000년, pp. 118-120.)   

    - 서옥식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政博, 전 연합뉴스 북한부장-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