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죽일 놈 같으니…』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까지 朴正熙로서는 金日成과 개인적인 원한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맞대결하는 관계였지만 그 職務를 떠나선 인간적인 감정이 개재될 계기가 없었던 것이다.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朴正熙를 죽이기 위해 서울 중심부까지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는 朴正熙로 하여금 金日成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그 2년 뒤(1970년 6월22일) 金日成은 또 다시 朴正熙의 목숨을 노린다. 북한의 무장특공대 3명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가 현충문 지붕에 무선식 기폭장치로 폭파되는 장치를 설치하던 중 실수로 폭발이 있었고 한 특공대원이 죽었다.
     
      이 현충문 안뜰에는 분향대가 있었다. 朴 대통령이 6월25일 이곳에서 분향할 때 근처 숲 속에 숨어 있던 특공대원이 무선 원격조종장치를 누르면 터지도록 할 작정이었다.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있었던 폭파사건(북한 공작원이 全斗煥 대통령을 노린 이 사건으로 17명의 장차관급 고관들이 사망)과 같은 수법이었다. 1974년엔 在日 북한공작 조직에 포섭된 文世光이 국립극장에서 8·15 기념 연설을 하고 있던 朴正熙를 저격하는 과정에서 옆 자리에 있던 대통령 부인 陸英修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암살을 끈질기게 추진하는 者에게는 聖人君子라도 원한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朴正熙의 金日成에 대한 관계가 바로 그러하였다. 1970년대에 朴正熙 대통령이 자주국방 전략을 추진하면서 방위산업을 건설해나갈 때 청와대의 담당 수석비서관으로서 朴 대통령을 보좌했던 吳源哲은 이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펴냄).
      吳源哲이 휴전선에서 땅굴이 발견되었다면서 사진을 붙여 보고를 했다. 朴 대통령은 사진을 뚫어지게 보더니 한참 후에 얼굴을 들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죽일 놈 같으니…”라고 했다. 격한 말투도 아니고 조용한 語調였다고 한다. 朴正熙 대통령의 청와대 일기 1975년 3월10일자에는 철원 북방 휴전선에서 북한 측이 판 제2 땅굴이 발견된 데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땅굴은 폭 2m, 길이 3.5km.
      북괴의 집요한 남침야욕의 또 하나의 실증을 우리는 얻었다. 이런 판인데도 북의 남침야욕이 없다고 운운하는 이 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소리가 이러고도 또 있을 것인가? 북한 공산당들은 언제나 민족적 양심으로 되돌아가서 동족끼리 단합해 통일된 조국을 재건 하여 만방에 떳떳하게 살아볼 날이 올 것인가.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공산당들에게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朴 대통령은 이따금 『김일성에 대해서는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란 말을 하기도 했다. 1972년 7·4 공동성명 이후 북한의 수석대표 朴成哲이 대통령을 예방하게 되어 있었는데, 吳源哲이 선물 목록을 써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으러 올라갔다. 그는 남한의 공업력을 자랑하기 위하여 비싼 전자제품을 선물 목록에 포함시켰다. 대통령은 목록을 앞에 놓고 『김일성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 것은 아닐 거야. 남북회담이 성공할지는 두고 보아야 해. 김일성의 眞意는 적화통일에 있으니 남북회담을 성공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회담을 통해서 우리와 미국의 태도를 시험해보려고 할 거야』라고 말하면서 값이 싼 현대 조선자기를 선물로 결정했다.
      朴正熙는 金日成의 失政에 대한 보도가 나올 때는 신중했다. 그는 『김일성이 모든 경쟁자를 숙청하고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의 능력은 인정해야 돼. 그는 군사력을 그만큼 강화하고 경제도 어느 정도 발전시켜놨으니 통치 능력도 있는 것 아냐?』라고 말한 적도 있다.
      朴 대통령은 『김일성은 적화통일에 가장 큰 장애물은 나라고 보고 있는 것이야. 그러니 나를 없애자는 것이지』라고 말했다. 이런 말 속에는 「김일성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은 나뿐이며 이것은 나의 역사적 역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反人類 민족반역 戰犯者
      
      朴正熙는 원래 험한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金日成에 대해서도 『죽일 놈』 정도가 가장 심한 욕이었다. 朴 대통령은 연설이나 일기를 통해서는 가차 없이 金日成을 공격했다. 예컨대 1970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한 연설이 있다.
     
      <오늘 광복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온 겨레가 너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가슴 아프고 서글프게 생각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국토분단의 비극입니다. 통일을 향한 민족적 悲願은 지난 4반세기 동안 하루도 우리의 腦裡에서 사라진 일이 없었으나, 한편 통일의 전망은 수많은 난관과 애로에 가로막혀 결코 밝다고 말할 수 없는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김일성과 그 일당의 민족반역집단이 북한 땅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狂信的이며 호전적인 공산집단은 조국 광복의 첫날부터 前 한반도를 폭력으로 적화하기 위해 시종일관 광분해왔습니다. 6·25남침의 잔혹한 同族相殘(동족상잔)에 이어, 휴전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7800여 건이 넘는 도발을 자행해왔고, 최근에는 무수한 무장공비를 남파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실증입니다. 정녕 김일성과 그 徒黨은 마땅히 역사와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할 전범자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徒黨은 언필칭 평화통일이니 남북협상이니 연방제니 교류니 하는 등 파렴치한 상투적 선전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 스스로가 저지른 戰犯행위와 긴장 조성의 책임을 전가해보려는 賊反荷杖의 흉계인 것이며, 무장공비 남파를 위장 은폐하고 소박한 일부 사람들을 현혹시킴으로써 감상적 통일론을 유발해보려는 간사한 술책이며, 국제 여론의 誤導를 노리는 야비한 속셈인 것입니다. 이 허위에 찬 북괴의 作態를 믿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나는 단언합니다.
      무릇 공산주의의 정치체제는 기본인권의 유린과 철의 紀律에 의지한 전체주의적 일당 독재입니다. 그 중에서도 북괴 김일성 체제는 같은 공산권 내에서조차도 빈축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형적인 극좌 모험주의와 역사 위조를 일삼는 개인 신격화가 판치는 폐쇄 사회입니다. 오늘의 북녘 땅은 그러한 전횡과 공포가 휩쓰는 가운데 전쟁 준비에 광분하는 하나의 兵營으로 化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듯 역사와 민족, 천륜과 양심을 외면한 흉악한 무력 도발 집단과 대치하여 통일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의 悲願인 조국통일의 난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 朴正熙는 북한 체제의 본질을 反인류 전범자, 민족반역자, 극좌모험주의자, 개인 신격주의자로 적확하게 定義해놓고 있다. 인류역사상 최악의 變種권력집단을 상대로 민족통일을 의논해야 하는 至難의 길이 대한민국의 앞날에 놓여 있다는 아주 예언적인 연설이기도 하다.
      
      무력통일보다는 평화공존 추구
      
      朴正熙 대통령은 통일보다 평화를 더 優位에 놓았다. 그는 1964년 12월9일 서독 방문시 교포들을 만난 자리에서 『통일은 꼭 이룩해야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력에 의한 통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69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에서도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북괴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아무리 국토 통일이 민족의 宿願이요, 국가의 至上목표라 하더라도,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수단만은 피해야겠다는 것이 우리의 진심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내의 한계를 넘으면서까지 자제를 해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朴正熙가 평화를 택한 것은 남북한 간 전쟁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 전략에 의해서 북한을 압도할 수 있고 그런 후에 북한을 평화적으로 흡수 통일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8년 11월30일 수출의 날 연설에서 이런 충고를 하고 있다.
     
      <전면 전쟁을 도발해서 우리 대한민국을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뒤집어엎으려 하느니보다 전쟁 행위를 중지하고 경제건설을 많이 하고 수출을 많이 해서 북한 동포들이 보다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 지금과 같이 북한 괴뢰가 날뛰는 것처럼 무력을 가지고 대한민국을 전복하겠다는 것은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朴正熙의 아주 실용적인 통일론은 實事求是를 생활철학으로 삼고 있었던 그에게는 아주 오래된 개념이었다. 예컨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2년 10월8일 휴전감시단의 체코 및 폴란드 장교들이 북한지역에서 남한지역을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도 한번 다녀가면 좋지 않겠는가. 우리는 공산주의 때문에 사는 민족도 아니고 또 남의 나라 민주주의 흉내나 내자고 사는 민족도 아닌 것이므로 무슨 主義니 제도니 하는 것보다도 민족이라는 실체가 보다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면 남북이 아웅다웅할 필요가 있겠는가. 김일성이 온다면 그 신변은 철저히 보장할 용의가 있으며 이념의 꼭두각시가 되어 작두 위에서 춤추는 행위는 이제 그만둬야 한다.』
      朴正熙는 1970년 5월23일 전국 대학생 대표들과의 면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자신 있는 內實을 기했을 때는 경부 고속도로를 연장하여 판문점에서 신의주까지 고속도로를 건설해줄 수도 있고, 북한의 능력이 부족하면 백두산, 금강산 개발도 우리가 해 줄 수도 있다.』
      金大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對北사업을 예언한 듯한 朴正熙의 비전은 그러나 金日成의 통일전략을 直視한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북한정권에 속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1971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朴正熙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말하기를 「북한은 남한 혁명의 기지이며, 남한의 모든 이용 가능한 것을 동원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겠다」고 했는데 새로운 소리도 아니다. 그들은 소위 평화통일이라는 것을 흔히 잘 들고 나오지만 그들이 말하는 평화통일이라는 것에는 전제가 붙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반드시 뒤집어엎어야 되겠다, 그러고 난 뒤에 남한에 남아 있는 좌익 단체, 소위 공산당에 동조하는 세력들과 함께 통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겠다는 뜻이다. 그 내용은 무력 적화통일이란 말과 同義語이다.』
      
      인내와 自制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朴正熙 대통령의 對北정책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인내한다는 것이었다. 이 평화의 시간이 길수록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對北 우위에 보다 확실하게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인내에는 한계가 있어야 했다. 朴 대통령은 1969년 4월25일 기자회견에서 『인내와 자제는 반드시 한계가 명백해야 되며, 그 선을 넘었을 때에는 자제하고 인내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오히려 큰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가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만약에 북괴가 또 다시 6·25와 같은 전면 전쟁을 도발해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결심은 명백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보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이때는 軍과 民, 전방과 후방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전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번만은 최후의 결단을 짓겠다는 각오로써 최후까지 싸워서 통일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1969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
      朴正熙가 북한의 침략에 대해 강조한 자주국방의 개념은 『북괴 단독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리 단독의 힘만으로써도 능히 이를 분쇄할 수 있는 자주 국방력을 언제든지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연설(1070년 1월1일 신년사)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자주국방 정신을 더 쉽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키겠다는 결심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의 힘이 부족할 때는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남이 도우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움이라고 생각해야지 우리 대신에 남이 우리를 대신해서 지켜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을 국방의 주체성이라고 말한다. 남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도 우리에게 국방의 주체성이 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1968년 2월26일 서울 대학교 졸업식 치사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주국방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자주 국방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 즉 미국의 지원도, 우방의 지원도 없이, 전부 우리 힘으로 하자는 것이냐 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자주국방이라는 것은 이렇게 비유를 해서 얘기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화재가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하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 줄 것이다. 국방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를 지킴에 있어 전쟁이 도발되었다든지, 무슨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1차적으로 우리 한국 국민들이 여기에 대해서 불을 끄자는 말이다. 우리가 불을 끄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미국 사람들이 와서 들여다보고 도와 주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주장하는 자주국방의 기본개념인 것이다.』(1972년 1월1일 기자회견에서)
      朴正熙가 권력을 잡은 뒤 자신의 신조를 국가 전략의 大綱(대강)으로 전환시킨 것이 있는 데 바로 自助-自立-自主 정신이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자주·자립의 정신무장이며 자조·갱생의 생활신조이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한국인이 의타심과 사대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겠다는 自助정신을 가져야 그 바탕에서 自立경제, 즉 외국 원조 없는 국가운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립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自主국방이 가능하고 자주 국방이 가능해야 진정한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주 단순한 이 3自정신은 朴正熙의 18년 장기집권 기간 중 일관성 있게 3단계 국가발전전략으로 승화되어 실천되었다.
     
     
      참고자료 2: 두 개의 메모와 하나의 술회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이범석) 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박근혜 씨와 비대위를 위하여 써놓은 글 같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誤算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1979년 1월29일, 朴正熙 대통령이 남북조절위 예비회담 대표에게 써준 메모는 이렇다.
      
      < 北傀의 陷井
      1. 南韓 政府 不認: 北傀外廓團體와 同一格下
      2. 調節委 技能無力化
      3. ‘大民族會義’로써 統一戰線戰略試圖
      *外軍撤收論議
      *連邦制지지논의
      4. 我側戰力增强計劃中斷, 現狀凍結, 裝備導入禁止
      5. DMZ內 工事中止: 南侵땅굴 防害 없이 工事해 내려오자는 것
      6. 平和攻勢로 美軍撤收促進
      7. 앞으로 中斷時 責任轉稼>
      
      이 메모를 읽어보면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 김일성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이를 한 장의 메모지에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하게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를 해설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 이런 함정을 파놓고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정부를 그들 외곽단체의 하나쯤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조절위원회의 기능을 無力化시키려고 획책할 것이다.
      셋째, 그들은 남북 간의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大民族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여 통일戰線전략을 밀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회의에서 외군철수 및 연방제 지지를 논의하자고 덤빌 것이다.
      넷째, 그들은 한국군의 전략增强계획을 중단하고 현상태로 동결하도록 요구하고 장비 도입도 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다.
      다섯째, 비무장지대 안에서 공사를 하지 말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이 남침용 땅굴을 파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여섯째, 평화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띄울 것이다.
      일곱째, 회담이 중단될 때 그 책임을 우리 쪽에 전가하기 위한 함정을 팔 것이다.>
      
      *1976년1월24일 朴正熙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준비된 원고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한 것을 녹음테이프에서 풀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 십년간 통일이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 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 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 소, 중, 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