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백인 독식 깨부순 44세 록시 "한 우물 팠더니 기회 왔다"8월 17일~9월 6일 뉴욕 앰배서더 극장서 총 24회 공연
  • ▲ 2015년 뮤지컬 '시카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 2015년 뮤지컬 '시카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가수 겸 배우 아이비(44·박은혜)가 뮤지컬의 본고장인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주연으로 당당히 입성한다.

    아이비는 오는 8월 17일~9월 6일 뉴욕 앰버서더 극장에서 상연되는 뮤지컬 '시카고'의 주인공 '록시 하트' 역으로 총 24회 무대에 오른다. 한국에서 활동해 온 배우가 현지 라이선스 공연의 성과를 인정받아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주연으로 발탁된 것은 한국 뮤지컬 역사상 최초다.

    아이비는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우물을 오랜 시간 팠더니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다"며 "대한민국 뮤지컬 배우를 대표해 가는 만큼 책임감과 부담이 크지만, 완벽한 무대로 K-뮤지컬의 저력을 보여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아이비에게 '시카고'는 뮤지컬 배우 인생 그 자체다. 2012년 한국 프로덕션에 합류한 이래 2024년까지 6개 시즌 동안 통산 592회 공연하며 국내 최다 '록시 하트' 연기자다. 사실 브로드웨이의 러브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4~5년 전 오디션 제안을 받았으나 당시 영어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그는 제안을 한 귀로 흘렸다.
  • ▲ 가수 겸 배우 아이비가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브로드웨이 진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신시컴퍼니
    ▲ 가수 겸 배우 아이비가 23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에서 브로드웨이 진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신시컴퍼니
    그러나 이를 계기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지난해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시컴퍼니 박명성 프로듀서의 "일생일대의 기회이니 도전해보자"는 격려도 큰 힘이 됐다. 합격까지의 과정은 혹독한 홀로 가기의 연속이었다. 약 1년에 걸쳐 세 차례 진행된 영상 오디션에서 미국 현지 스태프들은 까다로운 피드백을 보냈다.

    마지막 3차 오디션은 미국 체류 중에 촬영해야 했는데, 반주자를 구하지 못해 속을 태웠다. 클래식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연이어 거절당한 끝에 현지의 한 교회 집사가 밤새 뮤지컬 넘버를 연습해 자신의 집 거실을 촬영장으로 빌려주는 도움을 줬고, 기적처럼 합격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은어와 성적인 은유, 날 선 풍자가 가득한 가장 미국적인 작품이다.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아이비는 현재 비즈니스 영어, 발성, 무대 연기 등 각 분야의 원어민 교사 9명과 팀을 이뤄 수험생 못지않은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고 있다.

    영어로 대본을 다시 분석하며 작품의 새로운 매력도 발견했다. 아이비는 "한국어 버전에서 생략됐던 섹슈얼한 비틀기와 뉘앙스들이 원어 대본에는 고스란히 살아있어 훨씬 풍자적이고 재미있다"며 "영어는 소리의 위치가 달라 노래의 강조점과 말의 타이밍이 착착 맞아떨어지는데, 이 경험이 향후 한국 무대 복귀 시에도 큰 자산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 2024년 뮤지컬 '시카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 2024년 뮤지컬 '시카고' 공연 사진.ⓒ신시컴퍼니
    이번 브로드웨이 진출은 개인의 영예를 넘어 한국 뮤지컬 산업 전반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1990년대 이소정(미스 사이공)·이태원(왕과 나) 등 1세대 진출이 아시아계 배역에 국한됐고, 2010년대 홍광호·김수하의 웨스트엔드 진출이 서사적 틀 안에서 이뤄졌다. 반면, 아이비의 캐스팅은 전통적으로 백인 배우들이 독식해 온 서구 주류 캐릭터의 주역을 꿰찼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배제하고 오직 실력만으로 평가하는 브로드웨이의 '컬러 블라인드(Color-Blind)' 기조가 완벽히 적용된 결과이자, 세계 시장에서 높아진 K-컬처의 위상이 밑바탕이 됐다. 이달 말 출국을 앞둔 아이비의 1차 목표는 명확하다. "관객들에게 대사와 노래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아이비는 마지막으로 동료들과 대중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떨리지만 보여주고 싶어요. 영어를 뒤늦게 시작했어도, 저처럼 나이가 많아도, 글로벌 K-팝 스타가 아니어도 간절한 꿈과 노력이 있다면 브로드웨이 최고령 무대라도 설 수 있다는 것을요. 저의 도전이 많은 분께 용기가 되고, 더 많은 한국 배우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는 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아이비는 브로드웨이 일정을 마치고 오는 12월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시카고'에 출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