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한반도 비핵화' 내세워 미군 철수 압박협상 재개 현실론 vs 안보 기반 약화 우려비핵화 의지 부재 속 '남한만의 비핵화' 위험단계적 스몰딜 구상, 30년 전 패턴 재연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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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북한 비핵화'가 이재명 정부 들어 다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으로 회귀했다. 30여 년간 정권과 시대 상황에 따라 번갈아 쓰인 '용어 전쟁'의 부활은 북한 논리를 사실상 수용하는 위험한 선택이자, 30년 전 악순환을 되풀이할 함정이 될 수 있다.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공개된 일본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정책적 방향은 한반도 비핵화"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이 국가 지도자로서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틀 뒤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이 '30년 전쟁'의 단면이 드러났다. 공동언론발표문에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담겼지만,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북한 비핵화'를 강조한 것이다. -
- ▲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에서 환호에 답례하는 모습(오른쪽은 영부인 김옥숙 여사). ⓒ대통령 기록관
'한반도 비핵화' 개념을 최초로 공식화한 것은 노태우 정부였다. 조지 H. W. 부시 미국 행정부가 1991년 주한미군 전술핵 100여 기를 모두 철수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그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한 선언' '핵 부재 선언'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천명했다. 결국 그해 말 남북은 노 대통령의 선제적인 비핵화 선언에 기초해 비핵화 범위를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다.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제1조는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을 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했고, 제4조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하여 상대 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하여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협상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자산 전개 가능성을 문제 삼으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북한의 입장이 대폭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물론 노 대통령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와 북한 핵 포기를 의미한다. 남한이 자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의 핵전력이 이미 한반도에서 철수된 상태라면, 실질적으로 제거해야 할 핵무기는 북한의 핵무기뿐이므로 북한이 핵을 폐기하면 한반도 전체의 비핵화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 논리를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에 강조한 결과 2018년 싱가포르 미북 공동성명 제3항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다"는 표현이 담기게 됐다.그러나 북한이 주장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다르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핵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가 가능한 주한미군의 철수와 '핵 전쟁연습'인 한미 연합연습 폐지, 즉 미국 확장억제(핵우산) 무력화로 규정한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제1조를 근거로 미국 핵무기를 운반·탑재할 수 있는 전략폭격기·잠수함 등 미국 투발수단의 한반도 전개(통과·착륙·방문)를 봉쇄하려 했고, 제4조를 명분으로 모든 주한미군 기지와 원자력발전소를 사찰하겠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핵 시설에 대한 국제사찰 압력에 맞서 '상호사찰' 논리를 내세운 것이었다. 결국 상호사찰은 이뤄지지 않았고,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 대화와 비핵화 협상 재개를 위한 유화적 제스처이지만, 자칫 북한의 주장에 포섭돼 한국의 안보 기반을 스스로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북한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겠다며 표면적으로라도 비핵화 의지를 보였던 과거에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에 남북 모두에 핵무기가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북한은 2022년 9월 '핵무력정책법'을 통해 핵무력 보유의 불가역성과 비핵화 협상 불가 방침을 법령에 규정했고, 2023년 9월 헌법 개정을 통해 핵무력 건설 정책을 '국가의 기본법'으로 명시했으며, 비핵화 의제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거론하는 것은 결국 '남한만의 비핵화', 곧 주한미군 기지 사찰과 전략자산 전개 차단으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
- ▲ 이한주(왼쪽) 국정기획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6월 1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외교안보분과장을 맡은 홍현익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에게 위촉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위에서는 100대 국정과제를 정리하고 과제별로 추진 시점과 목표 등을 정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마련했다. ⓒ공동취재/뉴시스
다만 문재인 정부의 국립외교원장과 이재명 정부의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분과장을 지낸 홍현익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은 협상 재개라는 현실적 맥락을 강조했다.홍 명예연구위원은 "남한에는 이미 핵이 존재하지 않고 주한미군이 한미 연합연습을 위해 한반도에 전략자산을 전개할 때도 핵무기를 싣지 않고 오는데, 이를 '한반도 비핵화' 위반으로 연결하는 것은 억지"라며 "북한이 핵개발 명분을 키우기 위해 무리해서 광의의 해석을 하는 것인데 우리가 북한의 무리한 해석까지 수용할 순 없다"고 지적했다.이어 "북한은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가 나오면 아예 협상장에 나오지 않는다"며 "결국 협상의 문을 열려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
- ▲ 대통령실은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9월 3일 미국 타임 매거진 아시아지역 상임편집장 찰리 캠벨과 특집 기사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18일 밝혔다. 표지의 제목은 '가교(The Bridge):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을 리부트(재가동)하다'이다. ⓒ대통령실 제공
그러나 외교가에서는 이러한 현실론에도 북한이 이미 비핵화 의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상황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구호를 반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한만의 비핵화로 귀결될 수 있다는 비판이 여전히 제기된다.북한은 그간 '한반도 비핵화'를 명분 삼아 주한미군 철수와 전략자산 전개 차단을 요구해 왔고, 과거에도 협상 자체를 지렛대로 삼아 이익만 챙긴 뒤 합의를 파기하는 패턴을 반복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한반도 비핵화'에 기반한 이 대통령의 '한반도 비핵화 스몰딜' 구상도 지난 30여 년간 비핵화 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졌던 패턴의 반복이 될 우려가 있다.이 대통령은 "정책적 방향은 한반도 비핵화"라며 1단계는 핵·미사일 중단(stop), 2단계는 축소(reduction), 3단계는 핵시설과 핵무기의 완전한 해체(dismantlement)로 이어지는 '한반도 비핵화 스몰딜' 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이 대통령은 최근 미국 시사잡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단기 목표로는 그들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조치의 일부에 대해선 그들에게 보상을 할 수도 있고, 그런 뒤 군축(disarmament) 및 완전한 비핵화(complete denuclearization)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북한과의 '주고받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홍 명예연구위원은 이재명 정부가 이러한 비핵화 로드맵을 구상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완전한 비핵화는 당장 불가능하다. 일단 핵 활동을 중단시키고 이후 감축 단계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궁극적인 비핵화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간 신뢰가 쌓이면 북한 스스로 핵을 내려놓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게 목표"라며 "현실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을 통해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했다.이재명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부분적 비핵화와 그 대가를 주고받는 '스몰딜' 방식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진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은 지난 30여 년간 이재명 정부 로드맵의 1~2단계에 해당하는 동결·불능화에 머문 채 막대한 지원을 받아내고 결국 합의를 깨뜨린 뒤 핵개발로 되돌아가는 행태를 반복했다.전직 안보 관료는 뉴데일리에 "현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언급하지 못한 채 '한반도 비핵화'만 되뇌고 있다. 이는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수 있으나 결국 북한 논리에 편승해 안보 기반을 약화하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그러면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사라진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