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3월20일 오후 2시,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양국 5명씩 대표단의 단장은 미국 아널드 소장, 소련은 슈티코프 중장이다. 관심이 집중된 슈티코프의 개막연설이 노골적이어서 충격을 불렀다.
    “한국 인민은 민주적 자치정부 기관으로서 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한국인민을 민주화시키는 과정에는 이를 방해하는 반동적 및 반민주적 그룹의 반항에서 기인하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있다.”
    그가 말한 한국인민이란 북한주민을 가리킨다. 한 달전 출범시킨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단독정부)를 가리켜 ’자치정부‘란 말로 위장발표하고 민주화(공산화)에 저항한 반공세력 숙청의 고충을 털어놓은 연설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새로 구성할 ’남북한 임시정부‘가 ’친소정부‘여야 한다는 점을 집중 강조하였다.
    “소련은 한국이 앞으로 진정한 민주적인 독립국가,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지 않을 우호적 국가가 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임무는 민주적 자치정부의 발전과 주권적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원조해야 한다.”
    첫날부터 ’북조선임시인민위‘를 부각시키며 그가 준비해온 협상 각본, 앞에서 본 ’2대1 공산정권‘ 구성 카드를 미국 측에 들이대는 압력이었다.
    이 연설에 대하여 미국 아널드 단장은 대표단회의에서 “개막연설이 아니라 폐막연설 같다. 하지 장군도 연설이 한국의 소비에트화와 식민지화를 추구하는 소련의 야심을 잘 나타냈다고 한다”고 말했다.(손세일, 앞의 책)
  •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대표들. 앞줄 왼쪽 미군정 하지 사령관,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 뒤로 소련장성들.(자료사진)
    ▲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 대표들. 앞줄 왼쪽 미군정 하지 사령관, 소련대표단장 슈티코프 뒤로 소련장성들.(자료사진)
    ★슈티코프의 ’북한 토지개혁‘ 3월중 완료...수십만 주민 엑소더스
    슈티코프가 연설하는 시간, 북한에선 전국의 대대적 토지개혁이 막바지 단계였다. 
    김일성의 북조선임시인민위가 소련군정의 결정과 지휘에 따라 3월5일 개시한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개혁은 한마디로 북한 전역의 산림과 농경지 전체를 국유화시킨 것, 아니 국민재산 전부를 ’공산당의 소유‘로 바꾼 만행이었다. ’지주‘ 딱지가 붙으면 주택과 다른 재산까지도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소작농의 고통을 겪었던 농민들은 공산당의 ’적개심 선동‘에 앞장서서 무엇이든 ’강탈‘하고 파괴하고 불태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불합리한 약탈적 토지개혁에 반기를 들었던 농민들과 학생들 시위는 물론 소련군이 무차별 진압하였다. 
    토지개혁은 불과 20일 만에 완료, 잇따라 중요산업 국유화, 남녀평등법과 노동법 시행, 사법기관 재편등 소위 ’민주개혁‘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인 붉은 태풍이 휩쓸었다. 
    슈티코프가 연설에서 말한 한국인민의 ’자주적 민주화‘ 바람이다. 
    이때 ’민주화된 농촌‘에는 무려 1만1,930개의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8~35세 청년들의 ’농민자위대‘가 나타나 중국의 홍위병처럼 저항하는 기독교계 등 ’반동-반민주‘세력 청소에 돌진한다. 이때 38선엔 소련군의 총탄을 맞으며 밤마다 대규모 엑소더스 행렬이 수십만명 이어진다. 장애물은 사라졌다. 1945년말 4천여명이던 북한 조선공산당원은 6개월후 37만명으로 늘어, 소비에트화가 급진전한다.
    스탈린의 오래 된 목표 ’한반도 먹기‘에 절반 성공이 이루어졌다. 밀려오는 피난민들로부터 북한의 토지개혁 소식을 들은 정치인들이 “우리도 서두르자”며 이승만을 찾았다.
    이승만은 말했다. “남의 손으로 하지 말자. 미군은 소련 대응도 못하는 군인들 아니냐. 어서 빨리 우리 정부 세워서 우리 법을 만들어 우리 손으로 개혁해야 한다. 북한식으로는 반드시 실패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더 잘할 수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자.”
  • 미소공위에서 대화하는 하지와 슈티코프(오른쪽).
    ▲ 미소공위에서 대화하는 하지와 슈티코프(오른쪽).
    ◆슈티코프, ’반탁‘세력 참여 거부...이승만 ’3남 시찰‘ 대장정

    개막 열흘 만에야 미소공위 성명 3호가 나왔다. 소련의 장난에 갈팡질팡하던 미국이 작업계획에 합의했다. ’임시한국민주정부‘ 구성을 위한 스케줄, 슈티코프가 오로지 ’정부구성‘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주정당 및 사회단체와 협의할 조건과 순서, 임시한국민주정부의 기구 및 조직원칙과 임시헌장에 따라 조직될 기관에 대한 제안의 준비 토의, 임시한국민주정부의 정당 및 법규의 준비 토의, 임시한국민주정부의 각원에 대한 제안에 관한 토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소위(小委) 설치 등이다. 쟁점은 금방 협의 대상 정당-단체의 선택에 모아졌다. 
    미국 대표단은 이미 대비했던 대로 남한대표를 ’민주의원‘으로 일원화하자고 제안하였다.
    소련 대표단은 민주의원을 남한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모스크바 결정에 찬성하는 정당과 단체만이 협의 자격을 가진다고 했다. 즉 공산당이 빠진 단체의 ’반탁‘ 이승만 김구를 거부한 것이다. 
    남한에 ’분열탄‘을 터트려놓은 슈티코프와 소련 대표단은 덕수궁의 미소공위보다 박헌영의 공산당과 좌익세력을 접촉하며 공작하는 일이 더 바빴다고 한다. (박병엽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앞의 책). 북한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범을 전후해 남한의 통일전선 조직체를 준비한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미군정의 민주의원 개원 다음날 2월15일 서울 YMCA회관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소련군정의 북한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맥을 같이했던 것임은 물론이다. 

    ’언론의 자유‘를 내세워 전원 참여를 주장하는 미국 지영에 혼선이 나타났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육군장관 패터슨(Robert P. Patterson)에게 제동을 걸어왔다. “하지 장군의 실패하는 행동 때문에 나는 동요가 크다”는 비난, 요컨대 하지 사령관의 ’반공 발언‘등이 장애가 되므로 회담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경고였다. (Byrnes to Patterson, Apr. 1. 1946. FRUS 1946, vol. Ⅶ) 어디까지나 소련과 협력하겠다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변함이 없었다.

    4월5일 슈티코프가 ’절충안‘이란 이름의 묘한 카드를 던졌다. 
    “모스크바 외상회의 결정을 반대해온 정당과 단체라도 앞으로 지지한다면 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불난 집에 불 지르기, 미소공위에 비관적이던 우익세력과 소극적인 미국 측에 달콤한 유혹의 불화살을 쏜 것이다. 미군정도 우익진영도 혼미에 빠진다.
    4월6일 AP통신이 ’미군정에서 이승만을 주석으로 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본국에 제의했다‘는 보도까지 함으로써 정국은 더욱 시끄럽다. 이승만에게도 질문이 날아든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런 보도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며 미소공위가 토의하는 기간에는 침목을 지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미소공위가 38선을 철폐하야 남북이 통일을 회복하기로 양국이 결정해주기만을 바란다”며 다시 한 번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하였다.

    그때 침묵하던 하지가 도쿄 맥아더를 찾아 날아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온다. 
    무슨 대응책을 찾았을까. 하지가 귀국한 다음날, 이승만은 민주의원 부의장 김규식을 시켜 ’남선순행‘(南鮮巡行) 계획을 발표한다. 4월15일부터 3주일간 남한 3남지방 순회여행이다.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은 번스에게 보고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좌익이 강한 지역에 자기 세력을 강화하러 여행 간다”고. 곧 소련의 이승만 거부에 대응하려는 하지와 맥아더의 묘안인 셈이었다. 이승만의 대중적 인기를 보여주겠다는 의도, ‘국민의 이승만 지지가 이렇게 높은 데도 참여시키지 않을 테냐’는 계산이다. 그러나 소련을 모르는 미국 군인들의 순진한 카드였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이승만은 선뜻 지방시찰에 나서기로 했다. 무슨 국면이든 그것을 역이용하는 전략가 이승만은 ’반공 여행‘ 기차에 오른다.
  • 3남지방을 순회하는 이승만 부부와 운집한 주민들. 앞쪽 가운데 한복차림 프란체스카와 그 뒤 이승만이 보인다. 장소 불명.ⓒ연세대이승만연구원
    ▲ 3남지방을 순회하는 이승만 부부와 운집한 주민들. 앞쪽 가운데 한복차림 프란체스카와 그 뒤 이승만이 보인다. 장소 불명.ⓒ연세대이승만연구원
    ★3남(三南)순회 연설여행...“우리의 국부” 수십만 열광의 환영대회
    지방에선 난리가 났다. 국민적 영웅의 행차, 전국 144개 군(郡)중에 114개군에 조직된 독촉국민회들이 너도 나도 “우리 지역에 꼭 오십시오” 갖가지 준비에 바쁘다.
    ◉첫 방문지 천안(天安)=프란체스카와 부부동반 여행은 온양(溫陽)온천에서 1박, 제일국민학교 3만군중에 연설, 
    ◉다음날 대전(大田)=본정국민학교 4만여 군중에 반공 연설, 유성(儒城)온천에서 환영간담회.
    대전 방문 직전 이승만 암살단 7명 검거.
    굿펠로가 군용기로 내려와 소련의 ’5호성명‘ 내용을 이승만에게 설명했다. 미소공위는 슈티코프의 ’절충안’을 받아들여 제5호성명을 18일 발표하였는데. 갈수록 소련의 음모에 끌려들어가는 미국이다. 성명은 “미소공위의 협의대상이 되고 싶은 정당과 사회단체는 ‘민주적’이어야 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실행에 협력한다는 서약 선언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도 서명을 설득하고 나섰다. 민주의원들은 난감하다. 이승만의 귀경을 기다려 결정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무슨 생각인지 예정된 여행을 계속한다.
    ◉김천(金泉) 가는 길에 태극기 물결=옥천(沃川) 국민 학교에서 연설하고 김천 동부 국민 학교 운동장에서 남녀학생들과 군민 4만여명에게 미소공위 진행상황 설명. 일치단결 호소.
    ◉대구(大邱)에서 해방기념 식수=기자단 회견에서 ‘5호성명’ 비판, 공설운동장 경북도민 환영대회 10여만 군중이 환호. 연설도중 비가 내려 방송으로 다시 연설하다.
    ◉경주(慶州) 영천(永川) 영일(迎日) 울산(蔚山) 4개군 연합환영대회=5만여 주민들에게 시국강연, 불국사에서 프란체스카와 이틀 휴식.
    ◉동래(東萊) 가는 길에 암살범 1명 검거. 온천장 호텔에는 민주의원 백남훈과 윤치영이 대기, 이승만은 미소공위가 요구하는 선언서에 서명하고 반드시 참가하여 주장을 관철시키라는 당부와 함께 ‘선언서’에 서명하여 주었다. “이것은 신탁을 지지하는 서명이 아니요, 신탁을 해결할 토의에 협동한다는 뜻을 표함이니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우리 뜻대로 안될 터이니 타협이 못 되면 그때엔 우리가 다른 보조를 취해도 늦지 않을 터이다.”
    ◉부산(釜山) 공설운동장 개설 이래 최대의 20만 인파=태극기와 환호성, 기독교 연합 합창단의 환영합창 속에 “우리의 국부(國父)”라는 소개와 함께 등단한 이승만은 눈물을 훔쳤다. ‘한덩어리로 뭉쳐서 자주독립을 찾자’는 노래 가사에 감격하여 ‘단결’을 외치고 외쳤다.
    “나는 공산주의와 극렬파들이 나와 정견이 달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통일을 지연시키고 자주독립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을 선동하여 근로대중을 못살게 만들고 국가 산업을 파괴하는 행위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쉬운 말로 해설하며 토지개혁문제도 자기 구상을 설명한다. “무상분배 한다고 하나 이것은 국민의 재산권을 무시함이니, 장차 우리 민주정부를 수립할 때에 국법을 제정하여 국민 생활복리를 옹호함이 지당하다.”
    이승만의 남선순행중 부산 강연이 ‘반공 캠페인’의 하일라이트 같았다. 
    ◉마산(馬山) 강연에는 거제도와 남해도에서도 배 탄 단체들이 모여들었다. 4만여 군중 앞에 미군 해병대 800여명이 군악행진을 벌여 이승만의 위상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함안(咸安) 의령(宜寜)을 거쳐 진주(晉州) 환영대회는 고성(固城) 통영(統營) 하동(河東) 산청(山淸) 등 9개군민 3만여명 집결.
    ◉순천(順天) 군수 김양수(金良洙)는 이승만의 하와이 동지회원, 목사 배민수(裵敏洙)는 주미외교위원부 출신, 오랜만에 재회한 사제는 3만여 군중 앞에서 감격의 독립운동을 다짐하였고, 배목사의 교회에선 “공산당이 일본보다 더 구속한다”고 비판하며 “자주독립과 자유신앙에 노력하자”고 설교하였다.
    ◉5월6일 벌교(筏橋)를 지나자 부인회가 “그냥 가시니 섭섭하다”며 꿀물을 대접한다. 보성(寶城)에서도 1만여명이 모여 강연과 기념식수를 했다. 장흥(長興) 환영대회를 거쳐 목포(木浦)다.
    산수 국민 학교에서 3만여명 강연. 그때의 호남은 오늘의 호남이 아니었다.
    ◉광주(光州) 서정 국민 학교에서 5만명 환영강연회, 두 시간이 넘는 연설회가 끝나고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38선 철폐를 거부하는 소련’을 집중 비판하였다. 
    그날 서울의 미소공위가 결국 무기연기 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이 미국과 순리적으로 잘 해결할 줄 알았더니 그걸 못하고 미국대표들도 좋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매우 유감이다. 38선문제도 소련이 해결 못하면 소련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큰 불행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결심으로 공산당의 제안을 접수치 않기로 하였고, 우리 강토를 단 얼마라도 남에게 양여치 않을 결심이니 이것을 소련사람들이 하루 바삐 각성하기 바란다.” 
    (이상 이승만의 ‘남선순행’ 내용은 [대동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보도 참조).
    5월10일 급거 귀경한 이승만은 즉시 하지 사령관과 요담하고 이튿날 굿펠로를 불러 돈암장에서 대비책을 궁리한다. 

    ★김규식 “제주도에 세워도 통일정부” 최초의 ‘단독정부’ 발언
    하루도 쉴 틈 없는 이승만은 12일 오후,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개최한다.
    남선순행 하며 이승만이 준비한 행사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주최, 100여개 우파 정당과 사회단체달이 참여한 대회는 10만여 군중들이 ‘신탁통치 절대 반대’ ‘38선 철폐하라’는 플래카드를 들었다. 소련을 규탄하는 ‘대회선언’과 미소공위 정회의 책임 규명과 국제여론 심판‘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23세때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와 싸우던 청년 이승만이 71세에 또 소련과 싸우는 방식의 하나였다. 
    이 대회에서 폭탄발언이 터졌다. 민주의원 의장대리 김규식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연단에 오른 김규식은 미소공위가 무기 휴회한 경위를 설명한 뒤 문제의 발언을 이었다. “이제 우리는 양국의 협력을 기대할 것 없다. 우리 민족이 일치단결하여 우리 손으로 정부를 만들어 열굴에 자랑해야 한다. 남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리가 정부가 아니다. 38선이 급히 터지면 북측 친구들이 와서 우리를 못 견디게 할 것이므로 38선은 드개로 두고 38선 이남에서 한인만으로 정부를 만들면 그 정부는 대구에 있든지 제주도에 있든지 우리 통일정부다” 
    이날 흥분한 시위대들은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등 좌익신문사들을 습격, 인쇄시설을 파괴하였다.
    좌익정당들은 김규식의 발언을 ‘단정 음모’라며 격렬하게 반발, 총공세를 퍼부었다. 김규식은 뒤늦게 “사실 무근이다. 나는 단독정부란 말을 안했고 통일정부라 했다”고 부인하였다. ([동아일보]1946.5.17.)
  • '정읍 선언'을 보도한 신문들.
    ▲ '정읍 선언'을 보도한 신문들.
    ‘정읍 발언’...“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세워 소련 추방후 통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의 무기휴회 때문에 중단하고 귀경했던 남선순행을 다시 떠났다.
    이번에도 프란체스카와 함께 기차를 타고 6월2일 출발, 정읍(井邑)서 1박후 다음날 3일 아침에 유명한 ‘정읍발언’ 연설을 한다. 바로 ‘6.3정읍 선언’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제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야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에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야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조선일보] 1946.6.5.)

    그날 오후 정읍을 떠나 전주에 도착한 이승만은 다음날 6월4일 오전 10시 공설운동장에 모인 5만 환영인파 앞에서 정읍 연설과 같은 연설을 했다. 그리고 6월5일 이리(裡里) 7만명, 6월6일 군산(郡山) 20여만명의 환영대회 연설여행을 강행한다. 군산연설 요지는 이랬다.
    ”공산 극렬분자에 대해서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손을 잡고 말리기 바란다. 미소회담을 기대하였으나 소련의 고집으로 무기휴회되었다. 우리는 냉정히 참고 참되 끝이 아니날 때에는 내가 명령을 내릴 터이니, 이때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아야 한다.“ ([대동신문]1946.6.8.)
    6월7일 충남 공주(公州)와 8일 충북 청주(淸州), 9일 진천(鎭川)과 장호원(長湖院)까지 강행군을 마친 이승만 부부는 그날 밤 9시 반쯤 서울 돈암장에 돌아왔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이승만의 정력적인 ‘반공’ 캠페인 여행은 끝났다. 도시마다 지역지도자들을 만나 조직점검과 작전 협의, 기자회견까지 쉬지 않았고 연설 주제는 한결같았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 콜레라와 같다. 극렬분자들과는 협력은커녕 타협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굴복하느냐 저항하느냐이다. 한국의 자유 독립을 달성하려면 신탁통치와 소련 공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고 물리치는 길 뿐이다.“
    과연 이승만의 3남순회 캠페인은 ‘국민적 반공의 시발점’을 만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클라이막스가 ‘정읍 선언’이다. 미국도 소련도 기대할 것 없음을 실감한 국민공감대를 확인하고 강화시키며, ”이승만 대통령이 나라 세우라“는 열광적 환호 속에서 이승만은 그의 평생신념  ‘반공-자유-자주 독립의 건국’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북한의 소련을 물리쳐 자유통일국가를 창조한다는 국민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강대국에 맞서 싸워 민족의 소원을 이루는 글로벌 지도자로 솟아올랐다. 

    김구도 이승만보다 먼저 지방 나들이를 떠났는데, 김구의 여행은 이승만의 정치캠페인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연고지를 찾아다니는 ‘센티멘탈 저니’(Sentemental Journey)였다고 손세일은 그의 책에 써놓았다. ([이승만과 김구] 제6권)

    ★공산당 등 좌익, 극악한 모략 선동...우익세력도 ‘반대’ 
    이승만의 발언내용이 ‘분단’이 아니라 ‘남북통일’이 목표임을 분명히 말하는데도 이를 무시한 공산당 및 좌익들은 일제히 맹렬한 비난을 쏟아낸다. 
    스탈린의 전술이다. 이미 해방 열흘만에 38선을 봉쇄하고 6개월 만에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단독정권을 수립한 소련의 위장작전, 스탈린은 ‘분단’ 카드를 이미 동원한 것이었다. 남몰래 급조한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임시’를 붙여 ‘임시위원회’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분단 책임’을 피하려는 계획적 음모, 분단 책임은 소련의 ‘공산화 협상 카드’를 거부하는 미국과 남한의 우익세력, 특히 철저한 ‘반소주의자’ 이승만에게 ‘분단의 원흉’ 낙인을 찍어 매장시키야 한다. 평양의 소련 군정이 날마다 서울 소련 영사관에 지령을 보내고, 제집 드나들 듯 비밀 왕래하는 박헌영 등 남한좌익들을 동원한 선전선동이다.

    이승만의 발언이 합동통신에 요지만 보도되자 좌익은 기다렸다는 듯 들고일어났다.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 좌익정파들은 물론,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부녀총동맹(부총) 등은 일제히 이승만을 ”반동 거두, 분단의 원흉“으로 몰아 폭언을 퍼부는다. 극좌적 선전선동은 ‘망국배족(亡國背族)의 분열주의자’ ‘독재몽(獨裁夢)을 꿈꾸는 파쇼주의 흉한(凶漢)’ 등등 극악한 인민재판이었다. [조선인민보] [청년해방일보] [경성인민보] [독립신보] [현대일보] 등 좌익언론이 선전삐라다.

    문제는 우파와 중도파를 자처하는 정당, 단체 및 언론들이다.
    ‘정읍선언’ 지지파는 한국민주당(김성수), 여자국민당(임영신), 조선민주당(조만식) 등 몇 개에 불과하고, 한국독립당과 신한민족당 등 자칭 민족계열은 ”단독정부 절대반대“를 주장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도산파와 한길수등 반이승만세력), 천도교청우당 등도 반대 일색이다.
    [동아일보]는 침묵을 지키는 반면, [조선일보]는 반대를 표명했고 [서울신문]도 비판적이다.
    이들 반대세력의 명분은 ”38선을 고착시켜 민족분단-국토분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엔 ‘북조선인민위’도 안보이고 소련의 38선봉쇄도 모르는 듯 했다. 무서운 소련의 국제적 술수와 공산화의 현실적 위협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없이 그저 우물안 개구리의 ‘낭만적 민족주의’를 읊조리는 명분론자들이었다. 소련과 미국에 끌려가자는 사대주의적 패배주의,  조선500년을 망친 그 후손들 아니랴. 
  • 1946년 3월26일 만71세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46세 프란체스카.ⓒ연세대이승만연구원
    ▲ 1946년 3월26일 만71세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사진을 찍은 이승만과 46세 프란체스카.ⓒ연세대이승만연구원
    ‘민족통일총본부’ 설치...”내가 ‘죽자’ 하면 죽을 각오 있소?“

     1946년 6월29일, 이승만은 마침내 ‘민족통일총본부’(약칭 민통총본부) 결성을 발표하였다.
    ‘정읍 선언’에서 밝혔던 ‘통일을 위한 과도정부나 임시기구’를 만들기 위한 전국적 조직체 통일단체이다. 이에 앞서 이승만은 6월10~11일 정동교회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2차전국대표대회를 열어 1,165명의 지방대표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는 절차를 거쳤다.
    이날 한 시간도 넘는 이승만의 연설은 총재추대 문제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
    ”여러분의 원(願)이라면 내가 피하지도 않겠고, 통일의 긴요함을 느끼는 만치, 내가 마정방종(摩頂放踵:온몸을 바쳐 남을 위해 희생함)할지라도 모든 단체와 협의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힘써 볼 터이지만, 나는 명의만 가지고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여러분이 내 지휘를 받아서 내가 ‘죽자’하면 다 같이 한 구덩이에 들어가서 같이 죽을 각오가 있소?“
    그러자 장내는 1천여명이 ”예“로 답하는 열광적 박수가 폭발한다.
    ”그런 사람은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참석자들은 일제히 손을 들어 보였다.
    ”한 손을 드는 것을 보니 절반쯤 각오가 드는 모양이야.“ 이 말에 웃음이 터지고 대표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옳지. 전심전력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겠단 말이지“
    장내는 박수와 환호소리에 터져나갈 듯,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다.
    ”통일을 속히 이루려면 통괄하는 총본부를 설치 전민족이 동일한 보조를 취해야만 할 터이지, 이를 위하야 사지(死地)라도 피하지 않고 복종할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알고자 하오“
    참석자들은 다시 일제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승만은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을 단호히 척결할 맹약을 요구하였다.
    대회는 ‘3천만의 총의로 통일정권 수립을 촉진할 것을 결의함’ 등 3개항의 결의문과 미소공위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였다.([대한독립촉성국민대표대회 회의록],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4] 연세대한국학연구소,1998)
    이어 일주일후 종로YMCA 강당에서 독립촉성애국부인회의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나는 여자의 힘이 남자의 힘보다 크다고 생각한다“며 이승만은 남녀단합과 여성 평등과 민주주의 강의를 이어갔다. 그리고 3남순회 때 못 간 개성을 방문하여 반공연설회를 열었다.
    이렇게 전국 순방을 끝낸 이승만은 전국민의 총의를 모아 남북통일정부 추진을 위하여 6월29일 민통총본부를 창설하고 ‘민족통일선언’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민통총본부는 이승만이 귀국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비상국민회의, 민주의원에 이어 만든 네 번째 민족통합 조직체이다. 이번엔 공산당 등 좌익이 배제된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참고자료를 통해 이승만의 해방당시 국제정세관과 독립의지를 확인해보자. 해방당일 8월15일부터 27일까지 소련, 영국, 중국, 미국(전문발송순)의 수뇌들에게 보낸 이승만의 전문 내용을 살펴보면 그 면모가 한눈에 드러난다. 이러한 이승만의 신념과 결의는 해방정국 3년간 한 치의 변함이 없었다.

    ★참조=8.15 해방시 이승만이 4대국 수뇌에게 보낸 전문
    Ⓐ이승만은 1945년 8월15일 해방 당일, 소련 스탈린에게 가장 먼저 전문을 보낸다. 독립운동기간 줄곧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한다“고 미국 정부에 경고했던 이승만은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자 극도의 위기감에서 전략적 수사를 담은 편지를 썼다.
    ”전쟁후 한반도에 건설될 ‘통일 민주 독립 한국’(A United Democratic and Independent Korea)은 소련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보호장치(Safeguard)가 될 것이니, 한국의 독립과 지역 평화 수호를 지원해 달라“---이는 소련의 한반도 공산정권 수립을 막기 위해 서둘러 ‘경고와 요구’를 날려 보낸 것이다. 
    그리고 8월21일 영국 수상 애틀리에게는 ”한국이 제2의 폴란드가 되어선 안되며 영국은 소련의 한반도 괴뢰정부 수립의 움직임을 막아서 한국이 평화의 안전판(peace stabilizer)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장제스에게는 미국 트루먼에게 빨리 전문을 보내서 소련의 음모에 동조하지 못하게 막아달라고 간곡히 당부하며 “통일 민주 독립 한국은 중국의 충실한 동맹이 될 것”임을 약속, 반공-반소 연합전선 구축의 손을 내밀었다.
    Ⓑ 8월27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은 “한반도에는 미군의 단독점령을 환영”한다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은 한민족을 갈라놓아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몰고 갈 것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어떤 종류의 공동신탁통치나 위원회도 절대 반대한다. 한국의 민주독립은 오직 미국대통령의 손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였다.
    동시에 맥아더에게도 공동점령과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미국정책을 비판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피를 흘린 것은 민주주의 승리를 위한 것인데, 왜 소련을 끌어들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가져오는가, 이는 내전의 씨앗이 될 것이니 미군이 단독 점령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vol.7, 연세대, 2009)
  • 이승만이 스탈린에 보낸 영문전문(오른쪽)과 독립운동기간 이승만이 교환한 2,954통의 편지 전보문 영인본을 묶은 책 8권중 7권째 표지.
    ▲ 이승만이 스탈린에 보낸 영문전문(오른쪽)과 독립운동기간 이승만이 교환한 2,954통의 편지 전보문 영인본을 묶은 책 8권중 7권째 표지.
    ▶결론적으로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분단’이 아닌 ‘자주통일 전략’의 선언이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에 맡겼던 한반도의 운명을 되찾아 우리 손으로 독립정부 만들자는 '이승만 독트린'이다.
    ”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야 정부를 세운 후에 북쪽을 소청(掃淸=청소)하여야 하겠다“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이 결단한 말이다. 모스크바 3국 결정을 거부, 소련의 남북한 공산화 음모에 정면 도전, 미국의 소련 협력주의에 반기를 들어 제2의 독립운동 '건국전쟁'에 돌입하였다.
    ‘북쪽의 청소’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과 그 꼭두각시 일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나 과도조직체를 만들어 유엔과 연대하여 소련을 물리치자“고 외친 ‘정읍선언’의 이승만이 어찌 ‘분단의 원흉’일 것인가. '정읍선언'은 '정읍독트린'이오. 이승만의 건국독트린, '이승만 독트린'이라 규정해야 옳다.
    이런 연설을 좌익들이 극악한 말로 폄하하면서 ‘정읍발언’이라 불렀는데 우파들도 그 ‘이름 짓기 선전’에 그냥 따라간 결과 오늘의 학자들까지도 ‘정읍발언’이라 부르는 것은 통사적 역사의식이 결핍된 우중적(愚衆的) 역사 문맹자들의 행태이다.
    이승만의 ‘정읍선언’은 북한점령 소련과 싸워 실지(失地)를 되찾겠다는 ‘건국전쟁 선포’이자  자주독립 선언이며, ‘공산당을 청소하겠다‘는 반공전쟁 선언, 국토통일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완성하겠다는 ‘자유통일 선언’이다. 스탈린이 미국보다 두려워한 세계유일의 반공자유전사 이승만, 그리하여 이승만은 건국까지 ‘혼자’ 싸워야 했다. 독립운동가들 누가 ‘준비된 글로벌 리더’를 흉내 낼 수나 있었던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