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탁통치 반대 ‘반탁’은 새로운 독립운동이다. 
    세계 최강들과 싸우는 국제적 ‘건국전쟁’이다.
    식민주의 일본이 물러가자 강대국들이 차지한 한반도, 북한을 점령한 공산독재 소련과 싸워야하고, 남한을 점령한 민주주의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 독립해야 한다.
    모든 싸움은 ‘지피지기(知被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요, 부지피부지기(不知彼不知己) 매전필태(每戰必殆)’라고 했다. 손무(孫武)의 손자병법(孫子兵法)3장 모공(謀攻)편의 결구 「너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적도 자신도 모르면 싸움마다 위태하다」는 말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도 한다. 
    자, 그러면 소련과 미국과 어떻게 싸워서 물리치고 우리 뜻대로 나라를 세울까.
    김구(金九)처럼 “미군정 물러가라. 임시정부가 집권하겠다”는 의병식 항일투쟁 발상으로는 강대국의 호통 한마디에 굴복하는 자살행위 밖에 안됨을 보았다.

    “충역(忠逆)이 역전되었구나...” 이승만의 말이다. 충신보다 역적이 많다는 말, 이것은 이승만이 귀국 직후 토로한 상황인식, 해방 당시 자유민주주의의 적(敵) 공산세력이 압도한 남한의 실상이다. 이 왜곡된 구조를 재역전시켜야 한다는 각오의 다른 표현이겠다. 
    “신탁통치가 강요된다면 우리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격”이라며 이승만은 “연합4국의 이해가 결코 일치될 수 없어 한반도는 열강상쟁의 수라장이 될 것”이라 경고하며 각개격파 작전을 준비한다. 
    이승만은 모스크바 발표에 통곡하는 임영신(任永信)에게 “나한테 계획이 있다”고 달랬다.
    무슨 계획인가. 이승만의 평생지론은 <미국의 힘을 이용한 용미(用美)외교 독립론>이다. 이 방법론은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 “미국 같은 나라 만들기 위해선 먼저 백성을 기독교정신으로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기독교정신이 만들어놓은 강국 미국으로 달려가 5년간 연구하여 당시 미국에도 없던 ‘국제정치-국제법 박사’를 따내며 업그레이드시킨 ‘기독교 신념의 독립 실천론‘이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그래서 “오래 준비하는 싸움, 총칼로 싸우지 않고서도 이기는 싸움”이었다. 그러니 사람들 눈엔 김구의 폭탄이나 공산당의 죽창만 보이고 이승만의 1천편 논설들이나 ’JAPAN INSIDE-OUT’은 안 보인다. 이승만은 폭력이 아니라 말과 글과 조직으로 싸운다. 그는 교사, 전도사, 목사, 자유 십자가 군병의 대장이다. 미국의 지도자들로 ‘신념의 자유 네트워크’ 2만5천명을 깔아놓고 그들을 동원하여 싸웠다. 독립운동의 강력한 인프라이자 신생국의 지원군이다. 해방 되나마나 더 큰 굴레를 뒤집어쓴 ‘분단’과 ‘신탁통치’ 앞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지닌 자산을 총동원한다. ‘용미의 건국전쟁’ 새 출발이다.
  • 김영삼정권이 1995년 폭파한 일본총독부 건물. 일본에 나라를 바친 고종의 경복궁을 점령한 대형석조건물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 건물은 일본의 항복후 미군정청이 사용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이루어진 곳. 제헌국회가 헌법을 만든 첫 국회의사당이며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운 건국정부가 첫 정부청사로 이용하였다. 영욕의 흥망사는 건물을 철거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사진은 철거직전쯤 
 모습)
    ▲ 김영삼정권이 1995년 폭파한 일본총독부 건물. 일본에 나라를 바친 고종의 경복궁을 점령한 대형석조건물이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이 건물은 일본의 항복후 미군정청이 사용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사가 이루어진 곳. 제헌국회가 헌법을 만든 첫 국회의사당이며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운 건국정부가 첫 정부청사로 이용하였다. 영욕의 흥망사는 건물을 철거한다고 지워지지 않는다.(사진은 철거직전쯤 모습)
    ◆“밖에 발설 말라. 남한에 정부 세워 북한을 청소하자”

    새해 1월 미소공동위원회 구성을 위한 양국대표 예비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 14일 감기몸살로 누웠던 71세 이승만이 돈암장 정례기자회견에 나섰다. 외국 기자들도 몰려왔다.
    이승만이 말한다. “나는 대한민족의 통일이 형식이나 실지로나 완성된 것을 선언한다” 여기서 통일이라 함은 남북한 민족세력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를 결성한 사실이다. 북한의 조선민주당 조만식에게도 연락하여 부당수 이윤영이 참여했다.
    “공산분자와 협동하려고 시일을 허비하였으나, 사실상 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성의를 다 하려 한 것이다. 중국 장개석도 좌우합작에 실패하였고 유럽 각국에서도 번번이 실패한 것어어늘, 유독 한국에서 어찌 홀로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파괴자와 건설자가 어떻게 합동하며,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찌 한길을 갈 수 있을까.....이제 우리는 38선에 관계없이 한족정신으로 합동하였다” ([대동일보]1946.1.15. [동아일보]1946.1.16.)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의 구성부터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반탁 시위만 할 것이 아니라 미소공동위라는 것부터 용납해선 안된다. 미국은 우리를 해방시켜준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는 막판에 뛰어들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우리정부조직에 간섭할 이유가 없다”
    다른 나라는 소련이다. 소련이 미소공동위에 참여하는 자체부터 막아내자는 말이다.
    특히 ‘소련의 야심‘과 달리 한국에 영토적 이익을 찾지 않는 미국을 강조한 것은 이승만의 오래된 지정학적 연구결과이며, 이는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인식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독촉중협을 ‘전 민족의 대표기관’으로 선언하고 미소공위를 거부하면서, 따로 움직이는 김구의 ‘비상정치회의’와 통합하는 작업을 벌였다. 

    미-소의 공동위 예비회담 개막 후 1월18일 이승만은 독촉중협 회의에서 말한다. 
    “내가 알아보니 미국정부와 군정청도 우리의 반탁-반공의 뜻을 이제야 인정하고 있다. 미국무장관 번스씨도 한인들이 원치않으면 탁치를 안해도 좋다는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느냐. 이에 우리가 할 일이 명백하다.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을 이유로 미국에 공동위 설치를 요구하면 미국이 불응하기 곤란할 터이므로 우리가 미국 측에 거부할 명분을 만들어 제공해야 한다.”
    이승만은 이처럼 ‘미국을 이용한 신탁통치 무효화’를 이끌어내려 물밑작업을 시작하였다. 

    ★‘국회 같은 국민조직’ 만들자...하지와 협력
    “나에게 양책(良策)이 있다. 트루먼 대통령의 의사를 띠고 굿펠로(Preston M. Goodfellow) 대령이 가져온 안이다. 우리 힘으로 모든 세력을 망라하여 ‘국회 같은 국민조직’을 완성, 미군정청 고문기관 같은 형식으로 독립을 추진해나가자. 미국은 물론 중국 영국까지도 환영할 것인 즉, 소련이 아무리 야심이 크더라도 별수 없이 양보할 것이다.”
    이 안에 김구도 김규식도 찬성하였다면서 이승만은 내일부터라도 실행하자고 서둘렀다.([독촉중협 제5회 회의록] 1946.1.18. [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13], 손세일 앞의 책)
    독촉중협은 이날 이름을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비상국민희의란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이나 건국 때에 쓰던 이름이다. 오랜세월 이승만은 이미 ‘건국혁명’을 진행해왔으니까 드디어 고국현장에서 건국투쟁기구를 만들었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도 미소공위에 극히 비관적이었다. “소련이 한반도 공산화를 노리기 때문에 남북한 통합은 불가능해 보이는데, 본국 국무부가 현장사정도 모르면서 자신의 건의는 무시한다”고 맥아더에게 불만을 전달했다. 남북한의 공산당에 우려가 깊은 하지는 이승만이 제안하는 ‘국회같은 국민조직’의 역할과 그 ‘민주정부로의 이행’ 등에 적극 공감하였다.

    ★스탈린의 ‘민주기지’에 대응한 ‘자유기지’ 선언
    1월21일 돈암장 독촉중협 회의에서 이승만은 ‘중대 발언’을 꺼낸다.
    “이 말은 밖에 누설되어선 아니된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것 같으니 말이지만, 군정측 사람들 말로는 소련 측과 결렬되는 형편은 불가하다 한다. 만약 결렬이 있으면 공동위라든가 신탁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하니 원컨대, 여러분은 일어나서 자기의 정부를 자기가 조직하야 정부를 세운 후에 북쪽을 소청(掃淸)해야 하겠다. 우리의 통일은 전에 비하면 더욱 공고하니까 우리가 직접으로 북선(북조선)의 관계를 해결하겠다고 내가 말했다.” ([우남이승만문서 동문선-13]
    즉, 자신이 반대하던 미소공동위 구성이 결렬될 수 없음을 알고 난 이승만은 미국 측에 실망하여 새로운 결심을 토한 발언이었다. 하지와 맥아더의 ‘반공’에 기대하였으나 결국 미국무부의 지휘를 거부하지 못하는 군인들의 한계를 어쩌랴. 

    그러므로 “우리가 자주 정부를 세워서 북한을 청소”해야겠다는 결심을 공개한 것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비록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의 이 발언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2월8일 출범하기 18일전에 나온 것으로서 지난해 ‘스탈린의 9.20지령’과 같은 남한판 단독정부 수립론이라 할 수 있다. 스탈린은 북조선에 ‘민주기지를 세워 남조선까지 혁명’한다했는데, 이승만은 남한에 자유민주정부를 세워 북한 공산당을 청소하여 통일하겠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남한 자유기지론’이라 하겠다. 이 비밀발언은 5개월 뒤 6월3일 ‘정읍발언’으로 나타난다. 

    이날 독촉중협 회의에 김구가 환한 얼굴로 참석하였다. 이승만이 통합을 요구한 자신의 비상정치회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한민당의 김성수와 장덕수 등이 노력한 결과였다. ([비상국민대회대표 회의록]1946.1.21.) 충칭시절 좌우합작 했던 좌익 김원봉 등이 이때 이탈함으로써 임정은 사실상 해체된다.
  • '과도정부의 모체' 민주의원의 역사적 성립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 '과도정부의 모체' 민주의원의 역사적 성립을 대서특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소련의 독주 막자”...‘과도정부의 모체’ 민주의원 설립

    비상국민회의는 2월1일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이틀간 열었다. 소련대표와 희의중인 미군정대표 아널드 소장과 러치 군정장관은 축사에서 “이 모임으로 한국민족의 통일은 완성되었다고 보며, 세계에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한민당의 함상훈 선전부장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건국회의”라고 규정하였다. ([조선일보]1946.2.2.)
    가장 관심이 집중된 일은 최고정무위원 설치 결정이다. 그 인선은 이승만과 김구에게 일임하였다. 이때 김구와 굿펠로가 돈암장에서 살다시피 매일 방문한다. 그렇게 각계대표 28명이 선정된다. 물론 공산당은 제외되었는데 인민당 여운형이 들어갔다. 이승만의 부탁을 받은 굿펠로의 포섭작업 결과였다. 이 명단은 11개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13일 공개하였다.
    이 최고정무위원을 미군정이 수용하여 ‘남조선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民國民主議院)이란 긴 이름으로 공식 탄생한다. 이 이름도 이승만이 주도한 것은 물론이다.
    바로 이승만이 하지에게 제의, 의기투합한 “국회 같은 국민조직”이다. 당장의 형식과 기능은 미군정의 자문기관이지만 이승만에게는 ‘새로운 임시정부’와 같은 ‘건국의 모체’인 것이다.

    오전10시 미군정청 (옛 총독부청사) 제1회의실에서 거행된 ‘민주의원’ 개원식 무대에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과 김구가 나타났다. 이승만은 개원 연설에서 민주의원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실하게 규정한다.
    “나는 오늘 개인자격으로 제위를 대하는 것이 아니외다. 왜냐하면 나는 국민을 대표하야 국민의 소리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까닭입니다. 오늘이야말로 한국의 발전과 주권국가로서 독립한 자주정부의 복구를 향하야 비약하는 신기원을 짓는 날이올시다. 깊이 영광을 느끼는 바입니다. 고문 자격으로서 하지 장군에게 협조하려는 이 (민주)의원은 한국을 급속히 독립국가로 만들려는 여러 정당 수뇌자들과 오랫동안 협의하고 신중히 고려한 나머지 성립된 것입니다. 이 민주의원의 성립은 우리가 모두 갈망하는 통일된 독립 한국의 목적 달성의 전조가 될 것입니다....우리를 분열시키는 사소한 논쟁을 배격하고 오직 우리 국가의 자유라는 큰 목적에 헌신하여야 합니다. (중략)....한국 국민에 대하야 우리의 부단한 노력을 맹세합니다. 세계에 자유 국민으로서의 성공의 모범을 보여줍시다. 한사람이라도 이 전무후무한 기회에 실패하였다는 말을 듣도록 하지 마시오. 진도는 다난하나 문제는 명료합니다. 자유와 독립이여!”

    이승만이 굿펠로와 하지 사령관과 힘을 모아 설립한 민주의원의 성격은 부의장 김규식이 낭독한 ‘의원 선언문’이 확인하고 있다.
    “한국의 여러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피선된 남부한국민주주의대표회의 의원이 된 우리는 이 땅에 머무를 미군 총사령관이 한국의 과도정부 수립을 준비하는 노력에 자문자격으로 협조하기를 동의함. 우리는 모든 활동을 이 대표회의로서 조정하고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여 한국인민의 현상을 개선하며 그로써 한국의 완전독립을 속히 실현하기에 공헌하기를 기함”

    하지 장군은 ‘민주의원’의 설립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기분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국무부의 훈령이 ‘현장을 모르는 헛소리’인지라 화나고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도와준 이승만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제 소련과의 협상에 자심감도 생긴다. 
    하지의 정치고문 굿펠로 대령도 “남한 최초의 임시정부(The First Temporary Government)를 세우는 임무 수행이 내 생애 큰 보람”이었다고 했다.

    과연 ‘용미(用美) 전략가’의 성공! 이승만의 용병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10월 귀국길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난 이승만은 그때 이미 굿펠로를 한국에 배속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동시에 하지 사령관의 정치고문으로 굿펠로를 적극 추천하였던 것이다. 맥아더는 그대로 들어주었다. 이듬해 1월초 한국에 온 굿펠로는 거의 날마다 돈암장과 미군정청을 오가며 이승만과 ‘민주의원’이란 독립기구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승만이 말했던 대로 미국이 소련의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도구 하나를 제공해준 셈이다.
  • 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이승만보다 4개월 늦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진은 김포공항에 마중나온 이승만과 일행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이승만보다 4개월 늦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사진은 김포공항에 마중나온 이승만과 일행들.ⓒ연세대이승만연구원
    ★‘자유와 독립’--민주의원이 ‘헌법 초안’을 만들다
    미군정의 자문단체로 발표된 민주의원은 사실은 ‘임시정부’이자 ‘국회’이다. 이승만은 개원과 동시에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을 직접 작성하여 3.1절 직전에 라디오 방송으로 발표하였다.
    ‘과도정부’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위원회를 열어 설립할 ‘남북한 임시정부‘를 말한다.
    이승만은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는 제목으로 그 내용을 설명한다.
    ▶민중의 평등, 18세이상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언론 집회 종교 출판 및 정치운동의 자유, 주요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의무교육제도, 최저임금제, 사회복지제도 등 ’당면정책‘은 국가경영의 모든 것을 종합정리한 ’헌법 초안‘ 같은 국가비전이다. (손세일, 앞의 책)
    그것은 만약 소련이 개입한 과도정부가 공산주의 정권이 되지 않도록 ’철갑을 두른 것‘이다.
    특히 토지개혁에서 ’유상 구입, 유상 분배‘ 원칙을 강조하며 ’농민 우선주의‘에 대하여 자세한 해설을 하였으며, 고리대금과 축첩까지 금지하는 법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어서 독립운동 기념일인 3월1일을 국경일로 제정할 것을 결의, 하지 사령관이 즉시 수용한다. 
    이때 민주의원이 결의하여 확정한 이승만의 33개항 정책들은 2년후 대한민국 건국 의회가 헌법을 제정할 때 거의 그대로 수용된 대한민국 헌법안이다. 이렇게 기능을 다한 민주의원은 건국국회 개원 전날에야 문을 닫는다. 

    민주의원은 의사당으로 덕수궁 석조전을 사용하기로 하였으나 미소공동위 개최 때문에 양보하고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으로 옮겼다. 
    이 무렵 약 6개월간은 이승만과 하지의 하니문(Honey-Moon)이라 할만하다. 곧 찾아올 '견원지간'에 비해서는 그렇다.
    또 하나의 하니문이 찾아온다. 민주의원 개원 1주일뒤 2월21일 워싱턴에서 귀국문제로 골치를 앓던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가 서울에 왔다. 4개월 만에 다시 만난 부부는 드디어 고국에서 감회어린 제2의 하니문을 맞았다. 그리고 프란체스카도 부부일심동체의 건국전쟁에 발 벗고 뛰어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