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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전쟁] 반일(反日) 종교의 성전, 독립기념관

6.25 전쟁의 적군을 아군처럼 전시한 독립기념관국군 괴롭힌 중공이 항일 기치 아래 친구로 돌변무장독립군 궤멸시킨 홍범도, 독립영웅으로 소개

강유화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석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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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2-09-04 12:47 수정 2022-09-04 12:47

▲ 천안 독립기념관이 한중수교 30년을 기념해 개최한 '항일전쟁 시기 미술 작품전'에 중국의 모택동을 항일 영웅으로 추앙하는 공산당의 선전물(사진 좌)이 전시됐다. 우측은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소개된 홍범도의 모습. 다른 인물과 비교해 홍범도의 사진이 크게 배치돼 있다. ⓒ뉴데일리

청년들과 천안 독립기념관에 다녀왔다. 한국 독립기념관에 중국 공산당 선전물이 전시되고 있다는 비보를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전시 실태는 참담했다. 6.25 전쟁의 적군이 마치 아군처럼 비춰지는 전시였다. 항일이라는 테마 아래 한국 독립군과 중공군이 피해자의 위치에서 연대감을 형성했다.

독립기념관이 이러한 전시를 기획할 수 있던 것은 한국인 기저에 흐르는 종교성 때문이다. 단연코 한국인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는 ‘반일(反日) 종교’이리라. 일본 제품을 사면 매국노, 안 사면 애국자가 되는 단순한 종교성 아래 우리 역사는 뒤틀려 있다. 독립기념관 직원들도 보통의 종교인들이었는지, 전시테마는 독립이 아니었다. 반일이었다. 인해전술로 국군을 괴롭혔던 중국 공산당이 친구가 되는 이상한 셈법도 반일 종교에 도취되어 눈이 어두워진 탓이 클 것이다.

반일 종교의 가르침 아래 역사를 서술하다 보니 들어가야 할 내용은 빠져있고, 빠질 내용은 크게 부풀려져 있었다. 그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자유시참변과 홍범도 장군에 대한 소개였다.

1921년 6월 28일 러시아의 작은 마을 알렉세예프스크(현재 스보보드니, 자유시라고 불리기도 한다)에서 발생한 자유시참변은 대한 독립군이 러시아 적군에 의해 학살당한 참극이다. 가문으로 치면 대가 끊긴 사건이다.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의 씨가 말라 버렸다. 자유시 결집은 어쩌면 대규모 무장투쟁을 통해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단 한 번의 기회였다.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맥 하나를 위키백과 보다 못하게 전시해놓은 독립기념관.

자유시참변이 왜 중요한가? 답을 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1921년은 1919년 3월 1일 이후 1년여 이상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독립 만세 운동의 불길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전국 만세 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열망은 어느 때보다 고취되었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에서 성과를 거둔 무장 투쟁 노선을 걷는 독립군들의 사기도 올랐다. 만주와 연해주에 흩어진 독립군들은 하나로 합쳐 무장 투쟁을 결의할 방법을 찾는다. 이때 러시아의 도움을 기대했던 독립군들은 한 곳에 모여 전열을 정비하고자 한다. 독립군의 결집 장소가 바로 러시아 자유시다.

독립운동사를 다 뒤져봐도 1921년은 대규모 독립군 형성이 가능한 딱 한 번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를 러시아의 공산 혁명이 짓밟아 버렸다. 러시아 백군과 적군은 국내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틈바구니에서 적군은 우리 독립군 세력을 이용해 백군을 몰아내려 했다. 적군은 어느 정도 승기를 잡자 이방 민족의 독립군을 처리할 수를 모색한다. 무장한 소련 적군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의 자유대대(이르쿠츠크대대)와 결합해 자유시에 모인 독립군을 집단 학살했다.

소련 적군은 갈란다시빌리라는 전설적인 빨치산 부대 사령관의 기마부대와 장갑차를 동원했다. 무장해제 중이던 독립군과 무장군인의 싸움이라니, 반칙이다. 애초에 적군은 독립군을 한꺼번에 사살할 요량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소련 적군과 이르쿠츠크파 오하묵 자유대대의 공격으로 독립군 270여 명이 사살됐다. 31명이 익사했다. 250여 명은 행방불명됐다. 970여 명은 포로로 끌려가 소련 볼셰비키혁명군으로 편입됐다. 기록에 따라 사상자 숫자가 차이를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다. 이날, 독립군은 철저히 와해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적군의 야욕에 희생된 우리 독립군의 이야기는 너무도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이유야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핵심 중의 핵심은 반일 종교가 아닐까 한다. 반일본이 선이라는 믿음 아래 명·청나라의 속국으로 살며 괴롭힌 당한 역사나 러시아 공산당이 저지른 만행들은 눈에 뵈지 않는 것이다.

자유시참변의 책임자로 지목되는 홍범도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도 전에 민족의 신화 속 인물이 되어가는 것만 봐도 반일 종교의 영향을 가늠할 수 있다. 홍범도는 항일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항일은 자유시참변으로 막을 내렸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는 1921년 이후의 홍범도 행적과 관련해 홍범도가 러시아 적군의 편에 서서 자유시에 모인 항일 무장독립군을 궤멸시켰다고 주장한다. 홍범도는 자유시참변을 처리하는 고려혁명군사법원 재판관의 위원으로 참석했다. 자유시참변 이후 홍범도는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는 학계의 연구가 있다. 홍범도는 어느 순간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홍범도가 소련을 탄생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권총’을 하사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많은 것을 대변해준다. 홍범도는 자신을 자유시참변 책임자로 지목하고 보복을 하려한 생존자 김창수, 김오남을 레닌에게 받은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홍범도는 감옥에 수감되지만, 레닌의 증명을 얻어 석방됐다. 당시 소련 최고 실력자로부터 하사품과 면죄부를 얻은 홍범도. 소련공산당원에 가입하여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결정 때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던 한인계 소련 사나이.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군으로 살며 찬란했고, 공산당원으로 살며 결국엔 비참했던 홍범도의 인생에 개인적 정동을 느낄 수 있을 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1948년 8월 15일 탄생한 대한민국 독립을 대표하는 영웅이 되는 것이 정당성을 갖는지 강한 의문이 남는다. 홍범도는 반일 종교를 이어가기 위한 신화 생성은 아닐는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역사학계에 반향을 일으킨 서강대 임지현 교수는 “기억은 사람의 마음과 감성을 움직이는 정동적(affective) 차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이론이나 담론보다 실천적 효과가 더 크고 그만큼 파괴력도 더 크다”고 말한다. 그리고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따라 미래를 향한 실천방식이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임 교수는 기억에 따라 홀로코스트 학살 피해자 유대인들과 히로시마의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인이 연대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피해자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가 같은 희생자 의식을 공유하는 순간에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 행위가 옅어지고 일본 민족 전체가 피해자 의식을 공유하게 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반일 종교 아래 왜곡된 한국의 기억과 역사도 임 교수가 지적한 현상과 다르지 않다. 항일의 여부가 선과 악 혹은 피아 식별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순간 6.25 전쟁의 가해자가 친구가 된다. 6.25 전쟁 포화를 이겨낸 한국의 독립기념관이 중국 공산당의 선전 그림을 그대로 옮겨와 전시를 하듯이 말이다.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자, 공산당원으로 살다 죽은 홍범도가 무장 독립투쟁의 기록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듯이 말이다.

맹목적인 종교성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종교가 절대적 무오류성을 주장하며 모든 영역을 지배하면 문제가 생긴다. 인류가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만들어 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독립기념관이 반일 종교의 성전을 허물고 진정한 대한민국 독립정신을 기억하는 기념관으로 부활하는 날을 기대하며. bless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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