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낙인 서재필·이승만이 구국운동‥ 역사의 아이러니가족·재산 다 잃고, 몸이 깨어져도… 변치않는 나라 사랑애국자들의 살과 피‥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으로 부활
  • ▲ 1919년 4월 14~16일 미국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1차 한인회의는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이 미주지역까지 퍼지자, 서재필·이승만·정한경 등 한인 지도자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개최한 결의 행사였다. ⓒ국가보훈처/연합뉴스 제공
    ▲ 1919년 4월 14~16일 미국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제1차 한인회의는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이 미주지역까지 퍼지자, 서재필·이승만·정한경 등 한인 지도자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개최한 결의 행사였다. ⓒ국가보훈처/연합뉴스 제공
    용산아트홀에서 “1919 필라델피아” 3차 앵콜 공연을 관람했다. 1919년 4월 14일에서 16일까지,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음악극이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탄탄한 각본과 연출, 배우들의 몰입이 어우러진 수작(秀作)이었다.

    “최초의 한국 의회(First Korean Congress)”로 불리운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는 대한민국의 진로를 결정한 역사적인 계기였다. 150여명의 독립투사들은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다. 독립은 단순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는 작업이 아니었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빼앗겼으나, 백성이 주인인 나라로 되찾으려고 했다. 남자가 여자를 차별하는 나라를 빼앗겼으나, 여자로 태어남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라로 회복하려 했다. 양반이 상놈을 억압하는 나라를 빼앗겼으나, 사민평등(四民平等)의 국민국가를 꿈꾸었다.

    “1919 필라델피아”의 주역은 서재필과 이승만이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풍운아였다. 개화당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고 그의 친가(親家)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었다. 아버지, 큰 형, 아내는 자살했다. 아들은 죽었고 딸은 노비로 팔렸다. 서씨 집안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마주 보고 앉아서 독약을 마셨다. 남자들은 처형당했고 여자들은 천민(賤民)이 되었다. 외가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뿔뿔히 흩어졌다. 역적의 친구들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서재필은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조선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쯤 되면 편안하게 눌러 앉을 법 한데, 기어코 가족을 죽인 나라로 돌아왔다.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과 같은 인재를 길러내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못다 이룬 개화의 꿈을 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집요하게 박해했다.

    결국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병원을 세우고 문구점을 운영했다. 본점과 지점들을 거느린 문구사의 직원만 60명이 넘었으니, 풍족한 생활이었다. 그의 88년 생애에서 거의 유일하게 누렸던 평안과 여유는 3.1운동으로 깨졌다.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3월 1일의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한라산을 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들렸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이 소식을 접했다... 나는 메스를 버리고 시험관을 내던진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3.1 운동 이후에 서재필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당시로서는 거금인 7만 6천 달러를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파산 당하여,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애를 이어갔다.

    이승만은 1898년 박영효를 추대하는 무력정변(武力政變)에 가담했다가 체포당했다. 탈옥까지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스물 세 살 청년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물을 부었다. 몽둥이로 몸을 때리고 망치로 손가락을 때렸다. 손톱 밑을 가시로 쑤셨다.

    1952년, 전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대통령 이승만은 한성감옥의 악몽(惡夢)을 꾸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77세가 되기까지, 무려 54년이 지나도록, 23세에 당한 고문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실은 91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68년의 기나긴 세월을 통증에 시달리며 보냈다.

    서재필과 이승만은 쿠데타에 가담했던 장부(丈夫)들이었다. 그 결과로 가족이 학살당하고 몸이 으스러졌다.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동지들의 죽음을 처참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이쯤 되면 이가 갈릴 만하다. 나라는 도대체 무엇인가. 자신을 사랑하는 위재(偉才)일수록 잔인하게 괴롭히는 나라가 왜 있어야 하는가. 조선 멸망기의 역사에는 반전(反轉)의 기록이 있다. 걸출한 애국자들이, 고문하고 죽이는 나라에 치를 떨어 매국노가 되고, 희망이 없는 나라에 절망하여 친일파가 되었다.   

    그러나 서재필과 이승만은 기이하고도 처절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몸이 깨어지고 추방당하고도, 자유대한을 향한 희망을 잃지 않았다. 최초의 조선인 의학박사에, 최초의 국제법 박사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기약 없는 망명자로 살았다.

    애국자들의 살은 썩어서 거름이 되고, 피는 고여서 수분이 되었다. 거름을 빨아들이고 수분을 섭취하여, 후손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의 꽃이 피어났다. 잔인하고도 숭고한, 역사의 법칙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부수어버린 조국을 향한 지독한 사랑, 그 위에 피어난 대한민국이여, 안녕(安寧)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