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수수 인정’ 노 전 대통령 진술 존재 땐, 이 전 부장 처벌 근거 없어
  • ▲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거주하는 미국 워싱턴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미시USA회원. ⓒ 중앙일보 뉴스 화면 캡처
    ▲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이 거주하는 미국 워싱턴의 한 아파트 입구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미시USA회원. ⓒ 중앙일보 뉴스 화면 캡처
    노무현 전 대통령이 후원자인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시가 2억원 상당의 명품 시계를 받았고, 그 사실이 보도된 직후 권양숙 여사가 시계를 밖에 내다 버렸다는 이른바 '논두렁 시계' 사건이 10년 만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 뇌물수수 의혹 수사를 지휘한 이인규(60·사법연수원 14기) 전 대검 중수부장이, 서울중앙지검 기자단에 장문의 입장문을 보내면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이 전 부장의 국내 송환 조사를 요구한, 미국 내 좌파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미시USA' 회원의 1인 시위도 관심을 끈다.

    미시USA를 비롯한 친노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 회원들은 “논두렁 시계 방송 보도는 조작됐다”며 그 책임을 이 전 부장에게 묻고 있지만, 법리상 이 전 부장에 대한 강제 송환은 쉽지 않다는 것이 법조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이인규 전 부장은 지난해 9월 미국으로 출국해 현재 워싱턴DC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의 중산층 아파트에 거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장이 워싱턴에 거주한다는 소식을 접한 일부 좌파성향 교민들은 이 전 부장을 찾는데 현상금까지 내걸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특히 '미시USA' 회원 한 명은, 워싱턴 페어팩스 인근의 아파트 앞에서 이 전 부장의 검찰 소환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여성의 1인 시위 사진은 미시USA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중앙일보는 25일자 기사를 통해 이 여성의 1인 시위 사진을 게재했다. 

    여성이 손에 든 피켓의 내용은 이렇다.
    “이인규 보고 있나? 
    공소시효 지났다고 끝난 게 아니다. 
    논두렁시계 조작사건 니가 했냐, 맹박이냐?
    워싱턴 동포를 물로 보냐. 
    이인규! 끝까지 쫓아간다. 
    워싱턴 동포들.”

    피켓의 내용을 보면, 미시USA를 비롯한 미국 교포 사회 좌파 인사들이, 논두렁 시계 관련 보도를 '조작'으로 단정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건 자체를 조작으로 보면서 그 배후로 이인규 당시 중수부장을 지목했다. 동시에 이들은 이인규 전 부장에 대한 한국 검찰의 소환 조사도 요구했다. 검찰이 재수사를 통해 사건의 조작 과정을 밝히고, 가담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교포 사회 좌파인사들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논두렁 시계 사건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4월22일 KBS는 “노 전 대통령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피아제 시계를 받았다”는 내용의 뉴스를 내보냈다. 같은 달 30일 노 전 대통령은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올라와 대검찰청 중수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소환 조사 뒤 약 2주가 지난 5월13일에는 SBS가 “노 전 대통령 측이 (피아제)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보도했다.

    잇따른 보도를 통해 '논두렁 시계' 사건은 전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SBS의 보도 열흘 뒤인 5월 23일, 노 전 대통령은 비극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건 직후부터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사건이 조작됐다”, “무책임한 언론이 근거 없는 보도로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인규 “논두렁 시계 사건은 팩트...노 전 대통령 날인한 조서도 있어”

    이 사건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논두렁 사건의 진실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보도의 진정성 여부다. 이와 관련해 이인규 전 부장이 25일 한국 기자단에 보낸 입장문은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는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 번째, 이 전 부장은 “당시 방송 보도 배경과 관계없이, 사건 자체는 팩트”라고 강조했다. 이 전 부장은 그 근거로 검찰이 보관 중인 수사기록을 꼽았다.

    이 전 부장에 따르면, 시계를 전달한 박연차 전 회장의 검찰 진술이 존재하고, 노 전 대통령도 검찰 조사에서 “언론에 시계 사건이 보도된 이후 권양숙 여사가 밖에 내다 버렸다”고 말했다. 이 전 부장은 “노 전 대통령이 조서에 날인을 했으며, 해당 조서는 영구보존 형태로 검찰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의 본질을 뇌물로 판단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1억원 이상의 고가 시계를 받는 행위는 뇌물수수죄에 해당하고, 기소돼 유죄로 인정될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질 수 있는 중대 범죄다.”

    이 전 부장은 박연차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측에 시계를 전달한 경위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혔다. 다음은 이인규 전 부장이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 관련 내용 중 일부.
    “2006년 9월 노 전 대통령 회갑을 맞아 시가 2억원 상당 피아제 남녀 손목시계 두 개를 구매했고, 노건평씨를 통해 건넸다. 이듬해 봄 청와대 관저에서 노 전 대통령 부부와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직접 감사 인사를 받았다.”

    두 번째, 언론 보도의 진정성과 관련돼 이 전 부장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주장을 내놨다. 당시 KBS와 SBS 보도 이면에 국가정보원이 있다는 것. 이 주장은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조사에서도 드러나지 않은 사안이라, 그 후폭풍이 상당할 전망이다.

    이 전 부장은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이 임채진 검찰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노 전 대통령 시계 수수 사실을 언론에 흘려 망신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공조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원 전 원장의 고교 후배인 김영호 행정안전부 차관과 저녁 식사 중에 방송 보도를 봤고, 욕설을 섞어 원 전 원장을 강하게 비난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전 부장은, “KBS와 SBS의 시계 수수 의혹 보도에 검찰은 전혀 개입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입장문을 통해 “국정원 연루 의혹을 밝힌 이유는, 검찰이 더는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부장이 국정원 개입 의혹을 새롭게 들고 나오면서, 논두렁 시계 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인규 전 부장 처벌 어려워...국내 송환도 곤란

    국정원 개입 의혹을 폭로한 이 전 부장에 대한 처벌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전 부장의 주장처럼, 박연차 전 회장이나 노 전 대통령이 시계 수수 사실을 인정한 진술이 존재한다면, 이 사건으로 이 전 부장을 처벌할 근거는 전혀 없다. 친노 성향 누리꾼들은 '이인규 전 부장이 사건을 조작해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만, 이 역시 막연한 추론 내지 심증에 불과하다.

    시계 수수 사실을 입증할 만한 진술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이 전 부장을 강제송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곤란하다는 것이 법조인들의 일반적 견해다. 이 전 부장이 논두렁 시계 사건을 조작했거나 방송사에 압력을 넣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정황 혹은 단서는 아직까지 드러난 것이 없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 인물의 국내 송환을 위해서는 한미 양국간에 체결된 형사사법공조 협정에 따른 범죄인 인도 절차가 준용돼야 한다. 그러나 범죄 혐의 자체가 드러나지 않은 참고인 신분의 인물을 강제송환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전 부장이 표적수사를 이유로 송환에 거부하며, 미국 법원에 인신보호신청을 낼 수도 있다.


    이인규 전 부장 거주 아파트, 시가 9~10억 수준...

    일부 언론이 이인규 전 부장이 거주하는 '최고급' 아파트에 거주한다고 표현하면서, 해당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취재 결과 이 전 부장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서울 강남의 시가 9~10억원 수준의 아파트와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거주한 미국 허드슨 빌라는 시가 220만 달러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