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어본 적 있어도 찾아본 적 없어서 국가·자유 소중함 몰라" 참석자들 개탄
  • ▲ 자유경제포럼이 26일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과 유언'을 주제로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좌측부터 여명 전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남정욱 작가,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장,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자유경제포럼이 26일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과 유언'을 주제로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좌측부터 여명 전 한국대학생포럼 회장, 남정욱 작가,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장,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교수.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하며, 경제에서 국방에서나 굳건히 서서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

    자유경제포럼은 26일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과 유언'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는 우남 이승만 탄신 14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됐다.

    사회는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장이, 발제는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가 맡았다. 남정욱 작가, 임종화 경기대 객원교수, 여명 전 한국대학생포럼 회장이 연사로 나섰다.

    현진권 전 원장은 토론회의 시작을 알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한민국의 체제가 계속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고 계신 분들이 많다. 이승만의 유언을 돌이켜보면 사회에 맞는 말씀을 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우리의 삶, 체제를 굳건히 하자는 의미에서 이승만을 기리기 위한 토론회를 마련했다."

    이동욱 프리랜서 기자는 이승만의 망명(亡命) 과정을 주제로 발표했다. 이 기자는 이승만의 말년 발자취를 취재해 지난 2011년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동욱 기자는 이승만의 망명설(說)에 대해 "석연치 않았다"고 했다.

    그는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지휘한 부정선거의 전모가 한 경찰관에 의해 폭로되며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촉발됐고 우남은 정국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며 이승만의 하야 배경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을 설명했다.

    이승만은 당시 4월 20일 국무위원 전원과 자유당 당무위원 전원의 사표를 지시한 데 이어 23일에는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외무장관에 허정, 내무장관에 이호 등을 임명하는 개각을 단행했다. 사흘 뒤인 26일에는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한다.

    5월이 되자 이화장에 머물던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하와이로 요양차 다녀올 방법을 주한미국대사관에 타진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이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만큼 은밀히 주선해 줄 것을 미 대사관 측에 당부했다.

    "일련의 사태가 마무리된 후, 동아일보 5월 29일자 '이승만 부부의 망명설'에 이어 경향신문이 대서특필한 '이승만 박사 부부 돌연 하와이로 망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잇따라 보도되며 이승만의 망명이 기정사실화됐다"고 이동욱 기자는 설명했다.

    지난 2013년 이동욱 기자는 당시 경향신문에서 해당 특종을 보도했던 윤양중 기자를 직접 만났다. 그는 "이승만이 망명하는 것이라고 확신해서 (망명 여부를 이승만에게) 묻지 않은 것이냐"고 물었고, 윤양중 기자는 "그렇다. (가혹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는 물어볼 수 없었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이동욱 기자는 "짧은 순간의 소통 장애가 요양을 망명으로 만들게 됐다"고 회고했다.

    다음으로 남정욱 작가는 '비약의 한국 근현대사, 운명도 비약으로 끝날까'를 주제로 발표했다.

    남정욱 작가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게 된 것은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 정세의 흐름을 읽었기 때문"이라며 "반대로 조선은 고종의 무능한 지도, 권력자들의 안목 부재, 민중의 무지가 몰고 온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남 작가는 "당시 우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민중이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하지만 이 나라에서 세계사적 안목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 것은 5천년 역사에서 처음 날아든 행운"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 왕정이 민주정으로 비약한 후, 냉전이라는 소용돌이가 동아시아를 휩쓸며 본격적인 기회를 찾아왔고, 이 시기에 근대화와 부국강병이라는 소명의식으로 돌파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 지도자는 '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국민이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를 잃어본 적은 있어도 찾아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나라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는 "소중함을 모르는 국민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역사는 친절히 가르쳐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 ▲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 걸려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 걸려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임종화 경기대 객원교수는 이승만의 '일본관'에 주목했다.

    임 객원교수는 "Japan Inside Out의 첫 챕터 '일본의 성전사명(聖戰使命)과 전쟁심리'에서는 일본사회의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해 논할 뿐만 아니라, 당시 국제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있었다"고 역설했다.

    이승만이 1941년 펴낸 저서 'Japan Inside Out'에는 "저들(일본)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 것이다", "일본이 정의나 정도에 대한 고려로 자신들의 행동을 바꾸지 않으며 폭력 논리 외에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이승만은 건국 이후 종교영역 및 사회에 잔존해 있는 일본적 색채를 극도로 꺼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임 객원교수는 "이승만이 반공이라는 사명감을 가진 심리적 근원은 막스 베버의 이론이 겨냥하고 있는 마르크스적 경제논리 속에 내재된 계급투쟁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역사의 멍에'를 주제로 발표한 여명 전 한국대학생포럼 회장은 "4·19 이후 이승만은 한국의 집권 세력에게 악(惡)이어야 했다"며 "자유당으로 상징되는 부패의 정치문란과 온갖 부정적인 것들의 우두머리여야 이른바 '혁명의 정당성'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상징이었던 김구가 영웅화(化)됐지만, 김구는 건국과정에서 이승만에 밀려 설 자리가 없어지자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글로 고춧가루를 뿌렸다"고 했다.

    여명 전 회장은 "당시 김구의 글로 인해 북한 공산주의에 맞서 단독정부 수립에 총력을 기울였던 우파 인사 대다수가 기회주의자로 역사에 기록됐다"면서 "김구는 김일성 초청으로 북한에 다녀온 후, 이미 견고한 북한 정부가 세워졌다는 것을 불과 두 달 만에 깨닫지만 침묵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향후 통일이 되면 이승만의 업적이 바로 설 것이고 김구 선생 역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날 발표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