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 건국절 주장, 오히려 상해임시정부 '법통' 존중하는 것
  • 편집자 주: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제정하자는 주장에 대해 ‘발작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일부 정치인과 ‘자칭 진보진영’에 있는 인사들이 많다.

    이들은 헌법 전문에 있는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아…”라는 구절을 내세워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이라면, 상해임시정부는 어떻게 되느냐”는 주장을 편다. ‘법통’이라는 말의 뜻, ‘상해임시정부’가 국가는 아니라는 점을 외면한 주장이다.

    ‘건국절’ 제정을 두고 일어난 정치권과 사회적 논란에 대해 김영중 前제주경찰서장이 소논문을 보내왔다. ‘건국절’ 제정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 모두에게 참고가 될 것이라 생각해 게재한다.

    다음은 김영중 前제주경찰서장의 ‘대한민국 건국절 논쟁’ 전문(全文)과 각주다. 

  • ▲ 1948년 8월 15일 건국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선포 기념식. ⓒ국가기록원 화면캡쳐
    ▲ 1948년 8월 15일 건국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선포 기념식. ⓒ국가기록원 화면캡쳐

    대한민국 건국절 논쟁

    前제주경찰서장   김 영 중


    1. 글을 시작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 서두에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건립됐으므로 그 날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반역사적, 반헌법적 주장입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대통령의 경축사를 비판했고, 덩달아 정치계, 언론계, 학계에서 이에 대한 논쟁이 분분해졌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생일인 건국절을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 수립일로 하느냐 아니면 1948년 8월 15일로 하느냐에 대한 이견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민주화를 이룩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생일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상해임시정부 수립과정은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임시의정원을 개원하고, 4월 11일 임시의정원 1차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으며, 최초의 민주공화제에 따른 선언문과 임시정부 헌법인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 발표하였고, 임시정부 행정부인 국무원을 선출하고,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2.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로 규정했을 경우의 문제

    ※ 상해임시정부는 1919.3.17.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4.13.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4.23. 한성(서울)에서 한성임시정부를 각각 수립했다. 3개 임시정부가 9월 11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선출하였다.

    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건국강령에 명시된 건국 개념과의 충돌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건국강령을 발표했다. 건국강령은 향후 건국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정책 대강을 천명한 문서이다. 이 건국강령은 임시정부의 활동 시기를,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시기를 복국기(復國期)로, 조국의 영토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시기를 건국기(建國期)로 규정하고, 건국강령 발표 당시 임시정부의 활동은 복국기 활동으로 정의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건국을 미래의 과제로 설정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57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 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워서 임시약법(臨時約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지속하는 시기가 복국의 제1기,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의 기구가 국내로 옮기어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한 시기가 복국 제2기, 국토와 인민과 정치·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하는 시기가 복국의 완성기이다.

    적의 통치기구를 완전히 박멸하고, 국토를 완전회복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 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며,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와 외교와 결재 등에 관한 국가의 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하는 시기를 건국 제1기,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급교육의 면비수학이 완성되고, 보통 선거제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는 시기가 건국 제2기, 건국에 관한 모든 기초적 시설, 즉 군사·교육·행정·생산·위생·경찰·농·공·상·외교 등 방면의 건설기구와 성적이 예정계획의 과반이 성취되는 시기가 건국 완성기이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55~57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나. 상해임시정부 요인 등의 성명 및 담화 내용과의 상충

      (1)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성명문 등

    ①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1945년 9월 3일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문에서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서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이다. 다시 말하면 복국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이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58~59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②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1947년 3월 서울 원효로에 건국을 위해 일할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건국실천원양성소’를 설립했다. ...... 김구 주석이 건국실천원양성소를 1947년에 설립했다는 것은 그때까지도 건국이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1919년에 건국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60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2) 김규식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박사는 1946년 12월 자신의 의장으로 있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기념식 참석 초청장을 보내면서 당시 정치 활동가들을‘건국도상에 다망하신’ 분들이라 표현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60~61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3) 온건 좌익정당인 사회당(당수 조소앙)의 성명

    임정 지도부의 한 사람이었고 1948년 4월 ‘평양 남북협상에 참여했던 조소앙이 이끄는 사회당의 1949년 8·15 성명’에도 ‘8·15 이날은...... 우리 민족 해방 4주년 기념이요, 우리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다. ...... 독립 1주년 기념일인 8·15를 맞이하는 우리는 ......’ 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32~33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4) 기타

       ① 민주국민당 당수 김성수 담화

    1949년 8월 15일 민주국민당 김성수 당수는 담화에서 ‘금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 해방한 지 만4주년이 되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세계에 선포한 지 1주년이 된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50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② 신생회 대표 안재홍

    1949년 8월 15일 “중도파 단체인 신생회 대표 안재홍은 대한민국 건국에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주의 민족통일 독립국가의 기업(基業)으로서 그 강화완성이 요청되고 있다. 건립 1주년에 그 업적은 경이(驚異)함직하다....... 국권강화의 실적이 있어 동서 15개국의 정식 승인을 받게까지 된 것은 경이라고 함이 타당하고 이 점 경하할 일이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50~151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③ 신익희 국회의장 등

    1950년 8월 15일 대구시 문화회관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 신익희 국회의장은‘대한민국 독립 2주년 기념일’
           ㉯ 허 억 대구시장은 개회사에서‘대한민국 독립 제2주년 기념일’
           ㉰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내무부장관의 해방 5주년 광복절 2주년 기념사’에서 ‘금년 8월 15일은 해방 후 5주년이 되는 날이요 대한민국이 탄생한 지 두 돌이 되는 거룩한 날이다’라고 말했다.
    (대구매일신문 1950.8.15.,「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55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④ 경향신문 

    “경향신문은 1949년 8월 15일 ‘건국 1주년 기념 문화인 간담회’기사를 보도했고”, “8월 16일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과 시가지 풍경을 보도하면서‘독립 1주년’,‘건국 1주년’, ‘정부수립 1주년’, ‘광복 돌맞이 날(광복 1주년)’ 등을 호환적 동의어로 사용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51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건국은 완전한 독립과 동의어이다. 1919년 4월 13일을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라면 그 때부터 1948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의 항일독립운동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건국되고 완전 독립되었는데 무슨 독립운동이냐 라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후 선열들은 건국(독립)을 위해 치열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면 이 독립운동은 바로 건국운동이요 그 준비와 완성을 위한 운동이었지 건국 자체라고 보는데 무리가 있다.

      ⑤ 김대중·노무현 前 대통령 8·15경축사

        ㉮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98년 8월 15일을 ‘건국 50년의 시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기해 제2 건국 운동을 펼쳐 나가자고 강조하면서 당시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의 창립선언문에도 ‘1948년을 정부 수립 및 건국 시점’으로 명시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중인 2003년과 200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1948년 8월 15일을 지목하며 각각 ‘민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이 나라를 건설했습니다’라고 언급했다.
    (chosun.com, 2016.8.17.03:18 이옥진 기자 입력, 2016.8.24.20:00 확인, 김용태 국회의원(새누리당, 서울 양천을구) 보도자료 기사)

    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에 대한 부정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 141쪽의 표현 ‘해방이후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한 헌법 ......’” 이라고, 대한민국 건국일을 1948년 8월 15일로 단정했는데 상해임정 건국설을 주장하면 이를 부정하게 된다.
    (조선일보 2012.12.21. A 38면, 류석춘 연세대 교수 칼럼)

    라. 대통령 및 국회의원의 선수(選數)와 대수(代數)의 기준 시점

    2012년 12월 19일 선거에 의해 당선된 현 박근혜 대통령은, 1948년 7월 20일 당선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기점으로 기산(起算)하여 제18대 대통령이며, 2016년 4월 13일 총선에 의해 구성된 현 국회는,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를 기점으로 기산하여 제20대 국회이다.

    이 모두 1948년 선출된 대한민국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제1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역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인정한 사실이며,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선거 홍보물과 당선인에게 교부하는 당선증에 이를 명기 공직선거법 공직선거관리규칙 제108조(당선증의 서식, 붙임 2 당선증)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이 1948년 8월 15일이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5·10선거는 법정 유권자의 91.7%가 등록하고 등록 선거인 95.5%가 투표해 국민 절대다수의 참여와 지지로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마. 관보 및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에 대한 해석

      (1) 1948년 9월 1일자 관보 제1호

    이승만 정부의 공식 기록인 1948년 9월 1일자 관보 제1호에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이 기록 하나만을 보면 1919년 임시정부 출범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스스로 생산한 문서에 1919년을 기점으로 ‘민국(民國) 00년’이란 표현을 즐겨 써 왔다. 당신이 임시정부의 수반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과시하는 전략으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승만 정부의 공보처가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현한 배경이다.

    그렇지만 이를 근거로 1919년 건국이 맞는다고 주장하려면 동시에 다음과 같은 다른 국가의 기록은 어떻게 해석할지 답을 제시해야 한다”
    (조선일보 2012.12.21. A 38면, 류석춘 연세대 교수 칼럼)

    ① 1953년 공보처가 발행한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에 실린, 1949년 8월 15일 기념사의‘민국 건설 제1회 기념일인 오늘을 우리는 제4회 해방일과 같이 경축하게 된 것입니다.’” 라는 기록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32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② 1950년 8월 15일 대구시 문화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는 ‘금년 8·15경축일은 민국독립 제2회 기념일’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39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③ 195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겸 남북통일 전취 국민총궐기대회에서 ‘행정부는 분명히 제3회 광복절이라 표기하고 대통령 기념사 역시 독립 3주년이라고 명시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39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바. 국가구성 4대 요소 구비 문제  

    건국(建國)이라는 말은 ‘국가를 세운다’는 뜻이다. ‘국가란 특정지역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면서 영토 내의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고,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특정 질서를 강제하며, 외부세력과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외부세력의 간섭을 받지 않는 포괄적인 정치적 결사이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7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그래서 국가의 구성을 위해서는 영토·국민·정부·주권이라는 4대요소가 구비되어야 완전한 국가가 되는 것이다. 

    “정치학이나 법학에서 국가 구성의 필수 요소 또는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대우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설명하는 유용한 준거로, ‘국가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몬테비데오 협약’...... 제1조”에 ‘국제법의 인격체로서의 국가는 ......    
    (a) 상주하는 인구,
    (b) 명확한 영토,
    (c) 정부, 그리고
    (d)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외교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8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이 협약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해임시정부는 중국 상해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의 개인이나 집단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인식을 가질 정도로 수비되는 영토’도 없었고,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에 대해 실효적 통제를 할 수 있는, 혹은 영토에 거주하는 인구가 준수할 법률을 제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에 미치지 못했으며, 국제적 승인을 받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하여 ‘대외적 독립성과 자주외교권 즉 주권’을 갖추지 못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는 건국을 위한 준비였고 출발이었지 객관적으로 완전한 국가를 건국하였다고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18~19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사. 대한민국 헌법 전문 해석의 의미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 ...... 을 계승하고’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이나 그해 출범한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9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이‘잉태’된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왕정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추구하고,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이상은 대한민국 정체성을 세운 것이고, 그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 대한민국이다. ......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이자 보통선거였던 5·10선거에서 국민주권이 구현됐고, ......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이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것은 국가의‘탄생’이었다. ...... 임정과 1945년 해방,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출범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
    (조선일보 2016.8.29. A 34면, 명지대 교수 강규형 칼럼) 

    그리고 ‘1948년을 대한민국 건국연도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며, 결코 임시정부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려는 의도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일’과 ‘광복절’ 고찰」 98쪽, 양동안, 백년동안, 2016.6.20.)  

    즉 1948년 건국설을 주장하는 어느 누구도 3·1운동이나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폄훼하거나 무시한 일이 전혀 없다.

    3. 결론

    이상 건국일과 관련된 여러 가지를 검토하였다.

    상해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치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정신과 노력의 결과는 오늘날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들은 선열들의 숭고한 항일독립정신을 계승해야 하고 영원히 기려야 한다. 다만 건국일의 관점에서 상해임시정부는 그 건국강령에 명시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본격적 체계적 제도적 시동을 건 복국(復國) 준비 단계인 임시정부이지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국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결론은, 1948년 8월 15일 명실상부한 국가구성 4대 요소를 갖춘 대한민국을 건국하였으며,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을 받음으로써 국제법적인 주권국임을 확인 받았다. 따라서 2017년 8월 15일에는 광복 제72주년·건국 69주년 경축식을 거행해야 한다.

    (1948.12.12.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UN총회에서 대한민국은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