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노선'의 사전적 정의마저 뒤흔드는 행태… 더 이상 비웃음 사지 말라
  •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18일 저녁, 선거구 획정 관련 협상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려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18일 저녁, 선거구 획정 관련 협상을 하기에 앞서 악수를 나누려 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유령처럼 정치권을 떠돌던 총선 연기론이 하나의 가능한 시나리오로 진지하게 논의되는 등 선거구 획정 파행 사태가 끝을 모르고 계속되는 가운데, 이 와중에 19대 국회의원들은 재임 기념 서명을 남기고 있어 빈축을 사고 있다.

    24일부터 재외국민 선거인명부 작성 작업이 시작될 예정인데도 선거구 협상이 파행을 거듭하자,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은 19일 더불어민주당 대표실로 찾아가 더민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담판, 29일 본회의에서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쟁점에 대한 내용적인 합의가 이뤄진 게 아니라, 단순히 '29일 처리하자'는 날짜의 합의가 이뤄진 게 고작이어서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대충 23일 정도까지는 우리가 합의를 이룰 수 있겠거니'라는 생각을 기초로, 이 때까지 양당이 합의하면 선거구획정위에 합의된 가이드라인을 넘겨 24~26일 사흘 동안 획정위가 선거구를 획정하고 주말을 보낸 뒤, 29일에 획정위가 보내온 안을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차례로 처리한다는 계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양당이 23일에 합의를 이룰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설령 합의가 되더라도 29일 획정위가 실제의 획정안을 보내오면 선거구가 통폐합되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양당 지도부가 생각하는대로 물흐르듯이 안행위~본회의 형태로 통과될지는 불분명한 게 사실이다.

    결국 19일의 김무성~김종인 합의는 스스로 공언했던 '마지노선'만 뒤로 무른 쑥스러운 합의로 보인다. 애초에 양당은 18일까지 합의해 19~22일 동안 선거구획정위에서 획정하고 23일 본회의에서는 공선법 개정안을 처리함으로써 24일부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진행할 예정인 재외국민 선거인명부 작성에 차질이 없도록 한다는 다짐이었으나, 이는 공수표가 됐다.

  • ▲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주승용 원내대표가 19일 정의화 국회의장을 예방해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주승용 원내대표가 19일 정의화 국회의장을 예방해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새로이 29일로 설정된 '마지노선'도 미덥지가 않다. 이른바 '마지노선'이 지난해부터 끝도 없이 뒤로 물러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허용할 수 없는 최후 한계선'이라는 '마지노선'의 사전적 의미가 무색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해에는 선거구 획정의 법정 시한인 11월 13일을 '마지노선'이라고 했다가, 이후 예비후보 등록일인 12월 15일을 다시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다. 이후에도 1월 8일, 2월 23일에 이어 29일 등 '마지노선'은 끝없는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 김무성~김종인 양당 대표의 29일 '마지노선' 합의가 비웃음을 사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당장 24일부터 시작돼야 할 재외국민 선거인명부 작성 작업은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와 관련해, 정의화 국회의장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주승용 원내대표는 19일 국회의장실에서 모여 새누리당·더민주 양당의 무책임·무능력 정치에 절망감을 내비쳤다.

    정의화 의장은 이날 접견에서 "23일을 지나면 4월 13일로 예정된 선거가 연기될 가능성이 있다"며 "(총선 연기는) 안 될 것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그렇게 (연기가) 될 수 있다"고 총선 연기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시사했다.

    이에 안철수 대표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이고 국회의 비상 상황"이라며 "헌법마저도 모독하는 상황인데, 헌법을 지키지 않고 (우리 국회가) 어떻게 존재 의의를 갖나 싶다"고 분개했다. 그러면서 "선관위가 예비후보 등록을 받고 있는 것도 법이 없는 상태에서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라고 국회에서 떠넘긴 것"이라며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닌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 ▲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다홀에 제19대 국회의원 재임 기념 서명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문구가 게시돼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다홀에 제19대 국회의원 재임 기념 서명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문구가 게시돼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주승용 원내대표는 "23일을 넘길 수는 없지 않느냐"며 "23일에는 어떻게든 처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장이) 공선법을 직권상정해서 제대로 선거가 치러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국회 구성원들 스스로 보기에도 비정상적인 상황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예비후보들의 피선거권과 온 국민의 선거권이 침해되고, 6·25 전쟁 중에도 제대로 치렀던 총선이 연기될 가능성이 시사되는 등 위헌적인 사태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국회 한켠에서는 놀랍게도 19대 국회의원의 재임 기념 서명이 진행되고 있어 최소한의 염치조차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재임 기념 서명은 국회의원들의 의정활동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2대 국회에서 한 차례 시행된 이후 9대 국회에서 지금까지 쭉 내려오고 있는 국회의 전통"이라며 "서명록은 영구 보존하고, 사본을 본청 4층에 전시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자기가 할 일을 다하고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간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처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껴둔 채 서명할 기분이 나는지 일단 의문이다. 전쟁에서 이기기도 전에 개선문부터 만드는 꼴로 보인다.

    자신들의 임기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마지막 길은 뒤에 들어올 대의대표들을 위한 공직선거법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를 제쳐둔 채 재임 기념 서명이라며 법석을 떨고 있는 모습은 후안무치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지금 국회의원들이 뜻을 모아야 할 곳은 재임 기념 서명 용지가 아니라, 공직선거법 개정안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