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주영 저 [이승만과 그의 시대] 2011 기파랑 발행. 02-3288-0077
    ▲ 이주영 저 [이승만과 그의 시대] 2011 기파랑 발행. 02-3288-0077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이후의 대반격

     
       그 동안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으로 7월 7일 유엔군이 창설되고
    맥아더가 그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한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에게 위임했다.
    이른바 ‘대전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전세를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적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후방을 공격하는 상륙작전이었다. 
    맥아더가 상륙지점으로 지정한 인천은 바닷물이  나가고 들어 올 때의
    수심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미 합동참모부가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9월 15일 맥아더의 직접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
    뒤이어 대규모의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주일 뒤인 9월 28일에 서울을 다시 찾았다.  
  • ▲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그에 따라 서울 남쪽에 있던 모든 북한공산군이 고립되는 결과를 가저왔다.
       그 때문에 대구 북쪽에 있던 공산군은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산 서쪽의 공산군은 배를 타고 북한으로 가기 위해 서해안으로 몰려들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을 북쪽으로 쫓는 데 정신이 팔려 서해안의 공산군을 방치했다.
       그 결과로 2개월 동안 공산군은 영암군, 부안군을 비롯해 전라남북도의 여러 지방에서 무수한 앙민들을 학살했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피해가 컸다. 

       그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38선에 도달해 있었다.
    이승만은 공격을 계속하여 북한을 해방시킬 생각이었으므로, 9월 29일 맥아더를 만나 38선 이북 진격을 제안했다.
       맥아더도 동감을 표시했지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 ▲ 1950.9.28 서울을 수복한 국군들이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있다.
    ▲ 1950.9.28 서울을 수복한 국군들이 당시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리고 있다.

       12. 동맹국을 얻으려는
            약소국 지도자의 
    벼랑끝 전술

    1950년 10월 1일 38선 돌파 명령
     
       그때 미국 정부는 맥아더에게 38선을 넘지 말고
    유엔의 결정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이승만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면 적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갖게 될 것을 우려했고,
    맥아더도 그것에 동의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군의 단독 작전을 결정하고,
    9월30일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북진(北進)을 명령했다.
    그에 따라 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었다.

  • ▲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오른쪽)에게 유엔군보다 먼저 한국군의 북진 명령을 내렸다.
    ▲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오른쪽)에게 유엔군보다 먼저 한국군의 북진 명령을 내렸다.
       미군도 다음날 그 뒤를 따랐다.
    유엔도 10월 7일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허락했다.

       북한공산군은 거의 궤멸된 상태였으므로 진격은 빨랐다. 
    국군이 원산과 함흥을 점령하자,
    10월 12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위험을 무릅쓰고 원산을 방문했다. 

       10월 19일에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10월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했다.
    이 자리에는 그의 후원자인 노울랜드 미국 상원 의원이 동행했다.

       이승만이 단상에 서는 순간 어느 교회당에서 자유의 종소리가 울렸다.
       연설에서 이승만은 몇 주일 이내에 북한의 도민들이 도지사를 뽑게 될 선거가 실시될 것이며, 국회 의원 선거도 준비가 되는 대로 실시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을 북한에서 확립하겠다고 약속했다.
       연설이 끝난 다음, 이승만은 신변을 걱정하는 군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군중을 헤치면서 자동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대담성을 보였다. 
  • ▲ 평양 시청에서 '통일의 약속' 연설하는 이승만과 태극기를 든 시민들.
    ▲ 평양 시청에서 '통일의 약속' 연설하는 이승만과 태극기를 든 시민들.

       그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하여 서부전선에서는 일부 선발대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동부전선에서는 미군이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통일이 다가 온 것만 같았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 통치 문제를 놓고 유엔과 갈등을 빚었다.
       유엔은 북한에 대한 통치권이 유엔에게 있다고 보고 미군 장교들을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려 했다. 북한 지역이 안정되면 남한처럼 유엔 감시 아래 선거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이에 맞서 이승만은 10월 17일 북한 땅은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도지사를 파견하려 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유엔군이 무작정 후퇴
     
       그러나 이와 같은 논쟁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1950년 10월 19일 대규모의 중공군이 한반도로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쓰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십만 명의 중공군 앞에서
    미군은 평안북도 운산에서 패배했다. 이후 미군은 후퇴를 계속했고,
    그 뒤를 따라 수많은 피난민도 목숨을 걸고 내려왔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6 · 25전쟁은 11월 28일 맥아더 장군이 말했던 것처럼
    "전혀 새로운 전쟁"이 되었다.

  • ▲ 압록강을 물밀듯이 건너 한반도로 침입하는 중공군.
    ▲ 압록강을 물밀듯이 건너 한반도로 침입하는 중공군.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야전의 맥아더와 워싱턴의 트루먼 사이에 갈등까지 일어났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적당한 조건에서 휴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중공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미 공군기들이 중공군의 출발기지인 만주와 보급 통로인 압록강 다리를 폭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러자 맥아더는 “전쟁에서 승리를 대신할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만주 폭격을 포함한 확전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트루먼 행정부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한 항의에 대해 1951년 4월 11일 트루먼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매슈 릿지웨이를 임명했다. 

       그러는 동안에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적군에게 내주었다. 그러고도 전선은 더욱더 남쪽으로 밀려,
    평택, 안성, 제천, 삼척을 잇는 선에 이르렀다.
  • ▲ 정치선전대를 앞세우고 서울에 나타난 중공군.
    ▲ 정치선전대를 앞세우고 서울에 나타난 중공군.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 미국과 유엔은 싸움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한반도를 떠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갈림길에 놓였다.

       미군과 유엔군은 한 반도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를 제주도나 또는 서사모아로 옮길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또 다시 대한민국이 사라지게 될 위기가 온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이 한국에서 결코 물러날 수 없다고 믿었다.
       이승만이 보기에 소련은 6 · 25전쟁을 통해 자유세계의 투쟁 의지를 시험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이 한국에서 밀리면 다른 곳에서도 계속 밀리게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국은 결코 물러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전쟁 의지에 감격한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나는 여기 머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에 따라 유엔군의 반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51년 3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뒤이어 전선을 38선 근처에서 고정시키는 성공을 걷우었다.

       그리고는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마비시키기 위해 맹렬히 공중 폭격을 퍼부었다. ‘목조르기 작전’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폭격으로 평양은 제대로 된 건물 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다. <계속>
    이주영 /뉴데일리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