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없어질 뻔 했던 나라가 살아남다

    건국 이전부터 북한의 남침 위협을 경고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이승만은 계속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경고했다.
       1946년 10월에 이미 이승만은 굿펠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25만의 북한 청년들이  소련군에 의해 군사훈련을 받고 무장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8로군이 평양과 해주에 주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북한의 급속한 군비강화와 병력증강을 경고했다.

  • ▲ 굿펠로우(왼쪽)와 이승만 부부.
    ▲ 굿펠로우(왼쪽)와 이승만 부부.

        1947년 2월 워싱턴에 간 이승만은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정부가 남한인들을 무장시키고 군사훈련을 시켜 주도록 요구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50만명의 한인들을 훈련시켜 북한군에 편입시키고 있는 데, 남한인들은 무기도 없고 군사훈련도 받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1947년 9월 제2차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 미국이 한국 정부 수립 문제를 유엔에 넘기게 되었을 때, 이승만은 남북한의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면서 미국의 군사원조를 강조하는 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남한에 정부가 세워질 기미가 보이던 1948년 3월 1일에 이승만은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중앙정부수립결정안 축하 국민대회’에서 5.10 선거후 국방군의  조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는 적정 규모의 국방군 수효를 20만명으로 보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된지 일주일이 지난 8월 24일 이승만은 하지와 한미군사협정을 조인했다. 그것은 미군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주한미군사령관이 한국의 안보를 보장하되, 국방군에 대한 통제권을 갖도록 한 것이었다.
       1948년 11월에 국군조직법을 제정하면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의 확대를 요구했다. 기존의 한국인 경비대 5만에 덧붙여 5만을 증강해 줄 것을 제안하는 한편, 미국의 군사대표부와 해군대표부 설치도 요구했다.
     
       그는 중국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주의자들이 유리해져가는 상황을 우려하고, 중공이 승리할 경우에 그 군대가 남한 침략에 동원될 수 있음을 걱정하면서, 미군의 주둔연장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프레스톤 굿펠로우를 사적인 사절로 동경의 맥아더에게 보내 탄약,탱크,함정,대포 등의 지원을 요구했다.

    미군철수의 위험성을 경고

       1949년에 들어서면서 신생국 대한민국은 질서와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운동도 진압이 되어 감에 따라 경제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외침(外侵), 즉 북한 공산정권의 남침(南侵) 위협이었다.
    1949년 연두 연설에서 김일성은 국토 완정(完征)의 의지, 즉 무력 남침에 의한 통일의 의지를 밝혔다.
       뒤이어 조직된 조국통일민족전선에서는 이승만의 축출을 결의하였다.
       그것은 소련의 지원으로 조직된 강력한 북한군의 존재를 토대로한 협박이었다.

  • ▲ 1945년 9월 북한에 몰래 김일성(왼쪽)을 데려온 소련의 군정사령관 스티코프. 스탈린의 위성국 북한정권 만들기 현장책임자다.
    ▲ 1945년 9월 북한에 몰래 김일성(왼쪽)을 데려온 소련의 군정사령관 스티코프. 스탈린의 위성국 북한정권 만들기 현장책임자다.
       남한의 대한민국에서도 북한의 공산화 통일 의지에 동조하는 세력이 강했다.
    그들은 정부가 수립된지 한 달 만인 1948년 9월부터 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에 따라 10월 13일에는 좌파 및 중도 성향의 소장파 국회의원 40여 명이 미군 철수안을 제출했다.  
       그와 같은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미군은 1949년 6월 29일 대한민국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했다. 북한에서 1948년말까지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미군이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미군철수는 즉각 대한민국의 생존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한국군은 탄약 저장량이 겨우 3일을 버틸 정도로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미군 철수를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5일에는 조병옥 특사를 통해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방위 공약 선언을 계속 요구했다.
       그에 대해 미 국무부도 이승만의 주장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철군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 때문에 미 군부에게 설득당한 트루먼 대통령은 순진하게도 6 · 25남침이 있기 직전인 1950년 6월 1일에 앞으로 5년간은 어떤 전쟁도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 ▲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한 중화민국(대만) 장개석 총통이 진해에서 회담을 마치고 기념촬영했다. (1949.8.7)
    ▲ 이승만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한 중화민국(대만) 장개석 총통이 진해에서 회담을 마치고 기념촬영했다. (1949.8.7)

       미국의 방만한 태도에 초조해진 이승만은 방향을 바꾸어 동아시아에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집단 방위 기구, 즉 태평양반공동맹을 조직하려 해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필리핀 대통령과 협의하고 그로 하여금 1949년 3월 23일에 태평양동맹을 제안하도록 했다.
       5월 16일에는 직접 자신의 구상을 발표하고, 8월 8일에 그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자유중국(대만)의 장개석 총통을 진해로 초청했다. 
       그렇지만 태평양동맹도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우선은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중립의 길을 가려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원인은 소련과의 협조를 강조하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참여가 없는 동맹이란 의미가 없었으므로, 그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중국의 공산화에 한반도의 공산주의자들이 고무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아시아의 각 지역은 공산화 위협을 심각하게 받고 있었다.
       공산화는 중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모택동의 공산당과 오랫 동안 내전을 벌이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1949년 가을 타이완(臺灣)으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공산화의 다음 차례는 대한민국, 그리고 그 다음은 베트남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중국 대륙의 공산화(共産化)에 자신감을 얻은 북한은 거의 매일 38선에서 군사적인 도발을 해왔다. 그때마다 미국은 한국군이 북한군에 맞서기 보다는 38선 이남 3마일 밖으로 물러나 충돌을 피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곤 했다.
       미국의 그러한 소극적인 태도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은 1949년 3월 북한군이 남한 땅인 개성(開城)에 박격포를 퍼부으며 처들어왔을 때였다.
       반격에 나선 한국군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과 아주 가까운 송악산 능선으로 이동하자, 무초 미국 대사는 한국군이 38선을 침범했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력히 항의했던 것이다.

  • ▲ 미군정사령관 하지(가운데), 무초 미국대사, 이승만.
    ▲ 미군정사령관 하지(가운데), 무초 미국대사, 이승만.

       1949년 초가을 4천명의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와 옹진반도를 공격했을 때도, 미군군사고문단(KMAG) 단장 윌리엄 로버츠 장군은 한국군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을 공격할까봐 걱정했다.
    허세에 지나지 않았던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 구호를 심각하게 받아 들인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연간 1천만 달러로 낮추고,  무기도 소화기만 주었다. 군사훈련도 소규모의 중대 단위 전투까지만 시켰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대한민국 국군의 전투력을 공비 소탕에나 맞을 작은 규모로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소련으로부터 전투기,탱크,중포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군대를 육성해 놓고 있었다.

    미국을 동맹국으로 얻기 위한 안간힘
     
       1949년 2월에 케네스 로얄 육군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자, 이승만은 또다시 국군 증강을 요구했다. 그는 장비만 제공된다면 호국군과 청년단체들로부터 15만에서 20만에 이르는 병력을 즉각 충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북한주민은 대부분이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한이 공격만 하면 붕괴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북벌 의지를 나타냈다.
       1949년 4월의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북한 내부의 반공 세력의 봉기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군의 강화는 남북통일 후 만주의 중공군에 대비한 것임을 강조하고, 국군은 상비병 10만, 예비병 20만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각국 지도자들과 외교관등에게 보내는 편지는 직접 타이핑쳤던 이승만 대통령. 이 타이프라이터는 독립운동때부터 수십년 쓰던 것으로 경무대서도 4.19때까지 사용했다.
    ▲ 각국 지도자들과 외교관등에게 보내는 편지는 직접 타이핑쳤던 이승만 대통령. 이 타이프라이터는 독립운동때부터 수십년 쓰던 것으로 경무대서도 4.19때까지 사용했다.

        미군 철수가 현실로 닥아오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승인을  위해 특사로 미국에 파견된 조병옥으로 하여금 미국정부에 상호방위군사협정 체결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조병옥은 애치슨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군함과 비행기를 요구하고, 10만의 상비군, 5만의 예비병, 5만의 경찰을 무장시킬 무기와 탄약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미국이 태평양집단안전보장을 제도화하고 외부의 침략에 대한 방위를 미국이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1949년 5월에 이승만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북한의 공격 위협 앞에서 남한의 방위가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한-미공동방위 군사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의 도움이 없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암담하고 피비린내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9년 12월에 이승만은 20만 민병을 조직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할 계획임을 밝혔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이승만은 북한의 위협을 더욱 더 자주 언급했다.

    미국에 무기 지원을 계속 요구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에 대해 해군함정, 전투기,야포와 같은 중화기를 끈질기게 요구했다.
       그렇지만 요구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탱크 제공을 요청하자,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아시아에는 탱크가 있는 곳이 없다는 말로 거절했다. 특히 한국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과 논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탱크가 필요 없다는 주장이었다.

  • ▲ 딘 애치슨 미국무장관.
    ▲ 딘 애치슨 미국무장관.
       그러는 가운데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북한의 남침 유혹(誘惑)을 불러일으킬 만한 중대한 발언을 했다.
       워싱턴의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대한민국과 대만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 밖에 있다는 것, 따라서 대한민국이 북한과 소련의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일차적으로 그 스스로 방위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던 것이다.
       자신의 답변이 너무나 무책임하다고 느꼈던 지, 유엔의 지원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유엔이 침략을 막기 위한 행동에 나선 적이 없었으므로, 애치슨의 발언은 한국이 침략을 받을 경우에 어떤 도움도 없을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지금까지 보다 더 강한 목소리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미국에 경고했다.
       이승만의 경고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유엔한국위원단은 마지못해 38선의 병력 배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존 포스터 덜레스를 단장으로하는 군사사찰단을 파견했다. 6 · 25남침이 일어나기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 ▲ 1950년 6.25남침 일주일전 38선을 시찰하는 유엔군사사찰단 덜레스 단장.
    ▲ 1950년 6.25남침 일주일전 38선을 시찰하는 유엔군사사찰단 덜레스 단장.

       이승만은 덜레스에게 북한군의 공격으로 매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장차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실전으로 바뀔 위험이 있음을 경고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면전쟁이 일어난다면 한국은 미국 측에 가담할 것이라고 했다.

       유엔 군사사찰단은 북한측의 거부로 38선 이북을 조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38선 이남만 조사하고 한국군이 38선 가까이 배치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6 · 25남침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6월 24일에 완성되었다. 따라서 조사단의 활동은 아무 쓸모 없었던 것이다.   (계속)
    [이주영 /뉴데일리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