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유엔 총회에서 승인받기 위한 안간힘

      정부 수립이 선포는 되었지만, 미국은 즉각 승인하지 않았다.
    유엔 총회에서 한국 승인 문제의 결과를 보아 가면서 승인할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존 무초를 대사가 아닌 ‘특사’로 파견했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최우선 과제는 1948년 9월 21일부터 파리에서 열릴 제3차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 ▲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승인요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한민국 승인요청 대표단. 앞줄 왼쪽부터 모윤숙, 조병옥, 장면, 김활란.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
    그러나 승인 전망은 불투명했다.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은 물론, 영국 중심의 영연방 블록도 반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우선 급한 대로 8월 5일에 조병옥을 특별사절로 미국에 파견했다.
    그리고 8월 11일에는 장면을 수석대표로하는 유엔대표단을 출발시켰다.

    카톨릭 신도인 장면을 단장으로 선정한 것은 바티칸을 비롯해 유럽과 중남미 카톨릭 국가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대표단에는 김활란, 장기영, 모윤숙, 정일형 등이 포함되었다.
    미국의 올리버 박사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해 오던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의 승인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두 김씨는 8월 1일 김규식을 단장으로 한 ‘통일독립촉진회’ 유엔 대표단을 조직했다.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승인되면 분단이 영구화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 ▲ 김일성 만나러 평양에 간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
    ▲ 김일성 만나러 평양에 간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
       두 김씨의 대안은 유엔총회가 남,북한의 두 정권 대신 임시정부를 승인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김씨는 우선 중국에 있던 서영해를 선발대로 파리에 파견했다.
       그러나 별도의 유엔 대표단 파견 계획은 무산되었다. 왜냐하면 대표단장이 된 김규식이 한국인의 분열상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 출국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자,파리에 갔던 서영해는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그후 김규식은 조소앙과 함께 대한민국 비판을 삼가면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김구는 계속해서 남,북의 두 정권을 부정하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함으로써,
    끝까지 민족주의자의 명분을 지키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유엔의 승인을 얻다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대표단은 58개국 대표들을 일일이 접촉하면서 대한민국의 승인을 호소했다. 신생국의 경험없는 한국대표들에게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 진영의 대표들은 한국 승인 문제를 회의 의제에 올리지조차 못하게 방해했다.
    소련 대표는 입에 담지 못할 험악한 욕설로 한국 대표단을 비방했다.

     한국에서 들려오는 국내 뉴스도 대한민국의 승인에 불리한 것들이었다.
    제주 4⦁3사건으로 알려진 폭동이 10월초에 다시 터지는가 하면, 10월 19일에는 여수 주둔 14연대의 좌익 군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들에 의한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 ▲ 여수-순천 반란사건.
    ▲ 여수-순천 반란사건.
     그 때문에 <뉴욕타임스> 지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이 대한민국은 완전히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본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신생 대한민국은 살아 남을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또한 1948년 10월 13일 국회에서는 40여 명의 좌파 또는 중도파 성향의 소장파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안을 제출했다.
    그리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이 물러나게 한 다음 남,북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 메시지는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전달되었다.
  •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
     이러한 국내 뉴스들은 모두 파리 유엔총회에서 공산 진영 대표들이 대한민국 승인을 방해하기에 아주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파리의 한국 대표들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각국 대표들은 자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가 끝나는 대로 속속 귀국하고 있었다.
    특히 성탄절이 가까워오자 모두가 귀국을 서두르는 분위기였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국 대표들은 발이 닳도록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심야회의가 열릴 때는 새벽 2시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피곤하다며 뿌리치는 대표들을 붙잡고 설득했다. 
    한국 대표들의 힘겨운 노력이 성과가 있어서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인 1948년 12월 12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의가 소집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기 위한 표결이 이루어졌다.
    표결 결과는 찬성 47표 반대 6표로 대한민국의 승리였다.
    마침내 유엔은 대한민국의 적법성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권위가 전 한반도에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 ▲ 김일성(왼쪽)과 박헌영.

    신생국의 험난한 앞길


       신생국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승인은 받았지만, 그 앞날은 험난하기만 했다.
    경제는 사실상 마비상태 였다.
       일본 경제의 한 부분으로 유지되어 오던 한국 경제는 해방으로 일본 경제와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파행을 면치 못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 경제와의 관계도 갈라졌기 때문이다. 

       국민은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60 달러 미만으로 가난했고, 문맹률이 8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무지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는 동포들, 그리고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피해 북한으로부터 38선을 넘어 온 월남민들로 길거리는 실업자로 넘쳤다. 

       그렇다고 국가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의 뚜렷한 정강을 가진 확고한 정치세력도 없었다. 서로 다투기만 하는 정파들만 득실거릴 뿐이었다.
       국회에 무소속 의원들이 유난히 많았던 사실이 그러한 혼란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치와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조차도 대부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 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갖 태어난 신생국을 혁명(革命)으로 무너뜨리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활동이었다.
    도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산간지대에서는 게릴라가 준동했다.
    그들 가운데는 북한에 가서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한 뒤 다시 남쪽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 ▲ 공산당 반란군의 양민학살.
    ▲ 공산당 반란군의 양민학살.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이승만은 신생국을 이끌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해양문명권’에서 온 자유민주주의(自由民主主義) 체제를 정착시켜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외국인들 가운데는 이 신생국이 얼마 가지 못할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웬 래티모어 같은 미국의 좌파 지식인은 한술 더 떠서 대한민국은 금방 무너질 것이며,
    또 그렇게 되를 바란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