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문 [中 근현대사] 박사"193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장개석 정부가 김구 투쟁자금 지원"
  •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김구 선생이 1930년대 중국 상해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 
    중국정부로부터 거액의 지원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이 1941년부터 1945까지 출자한
    [특별지출금액]의 43%가 김구 선생 손에 건네졌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을 이끌었다는 김구 선생이
    중국 군부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광복 이후 그가 보여온 행동에서 비쳐지는 정체성 논란도
    상당 부분 설명이 가능해 지고 있다.

    서상문 중앙대 강사는,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나섰다. 

    서상문 강사는 동국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대만국립정치대학에서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해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날 서 박사는,
    <학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과 임정 내 내홍>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중심으로
    김구 선생이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정부의 경제지원을 받은 사실에 대해 설명했다.



  •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중국, 한국독립운동 지원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에서 있었던
    윤봉길 의사의 [항일 폭탄 투척] 사건은,
    중국 내부의 여론을 흔들었다.

    당시 중국의 언론은 윤봉길 의사의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정부의 총통인 장개석은 한국독립운동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32년 4월 말부터 중국정부는 한국독립운동단체에 비공식적으로 지원금을 댔다.
    운영경비뿐만 아니라 투쟁가들의 생활비까지 제공했다.

    같은 해 4월 말부터 10월 9일까지
    김구 선생이 중국의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현금 지원액은
    총 2만9,200달러에 이른다. 

    중국정부는 1933년부터 중국화페로 매달 1,500원을 지원했다.  
    당시 중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이 6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1941년 12월, 6만원을 지급했던 중국정부는
    1942년 20만원을 지급했고
    1944년에는 50만원,
    1945년에는 300만원을 각각 지원했다.

    중국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서 오르는 물가를 감안해 지원금을 지급한 사실을 봤을때
    중국정부가 한국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한 것은 결코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지원금은 당시 중국정부의 총통인 장개석이
    [특별지출금액]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지급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장개석이 출자한 [특별지출금액]의 43%가
    김구 선생에게 지원금으로 들어갔다.


    "중국이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환국할 때까지
    중국정부가 물질적 원조를 했다."

       -서상문 박사


    다음은 이날 서 박사의 발표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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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8회 이승만포럼


    2013. 6. 13(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경제지원과 임정 내 내홍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 아래 졸고는 본인이「抗戰時期 中國國民政府對在華韓國獨立運動之資助」라는 제목으로 臺灣의 학술지『近代中國』, 第91期(1992年 10月)에 실은 원고를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차  례

    머리말
    Ⅰ. 항일전쟁 이전 중국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Ⅱ. 중국국민당의 지원원칙 제정과 그 변화
    Ⅲ. 중국국민당의 경비보조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Ⅳ. 중국국민당의 경비지원과 임정의 내홍
    맺음말


    머리말



    중화민국(이하 <중국>으로 칭함)이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을
    도와준 것은 의의 깊으며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국민정부 수립 전부터 전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함)가
    환국할 때까지 중국정부가 정신적 지지, 군사인재양성, 외교적 지지,
    물질적 원조 등 4개 분야에서 제공한 지원은 점차적으로 증가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가운데 물질적 원조는 어떤 독립운동에서든 그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광복 후 반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이 주제에 대해 상세하게 논구한 연구는 거의 없다.

    한국학계에서도 이 주제에 대해선 연구를 진행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중국에서도 관련 인물 개인의 회고적 글은 제법 나와 있지만 관련 자료들이
    각처에 분산돼 있는 탓에 본 주제에 대한 계통적인 연구는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항일전쟁 이전, 중국이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주요 특징은 정부 차원이 아닌
    개인 및 각종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것이다. 개인과 사회단체 인사들 가운데는
    중국국민당 인사들이 반이 넘는다.

    이 기간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정식으로 지원을 논의하거나 추진하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중국국민당에게 정책적으로 채택된 것은 1937년 이후의 일이었다.

    본고는 먼저 항전 이전 중국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상황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국민정부의 지원방침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경비보조는 어떻게 이뤄졌으며,
    또한 임정 내 한인 당파싸움에 미친 영향이 어떠했는지 검토함으로써
    기존 관련 역사서술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다소라도 메워보고자 한다. 



  •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Ⅰ. 항일전쟁 이전 중국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멀리 中國同盟會 시절 이래 조기 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 형태는 정신적 지지에 머물렀으며, 비조직적 및 개인 원조 형태로 이뤄졌다.

    중국정부 차원에서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虹口에서 거행된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해 일본 요인들을 폭살시킨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중국언론에 대서특필 됐으며, 중국조야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국민당 주석이자 중국정부의 총통 蔣介石은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으며,
    중국국민당에게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개시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건 후 중국 측의 한국지원은 자연스레 크게 중국군부와 중국국민당
    두 계통에서 취해졌는데, 전자는 임정 내 김원봉 일파를 지원했으며,
    후자는 김구 일파를 지원하게 됐다.

    윤봉길 의사의 虹口사건으로 김구는 일본경찰로부터 배후 지령자로 지명수배 됐으며,
    김구는 물론, 임정 요원들과 그 권속들도 상해를 떠나 중국국민정부가 후퇴하는 곳을
    따라 여러 곳으로 전전하다가 四川省의 重慶으로 옮겨가게 됐다.

    이 과정에서 江蘇省 주석(오늘 날 성장에 상당함) 陳果夫, 廣東省 주석 吳鐵城 및
    貢沛誠, 朱慶瀾, 査良釗, 褚輔成 등의 중국국민당 인사들이 피난중의
    임정 한인들에게 임정 운영경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제공했다.

    이 시기 1932년 4월 말부터 이 해 10월 9일까지 김구가 중국의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원조는 상당했는데, 현금 지원액은 총 9건 미화 2만9,200달러에 달했다.

    모두 윤봉길 의거 후 6개월 이내에 답지한 것이었다.
    김구는 중국 측으로부터 받은 돈을 기재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실제 지원받은 액수는 이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蔣介石과 김구와의 회견이 이뤄지는 등
    중국과 임정 간에 주목할 만한 변화를 초래해 새로운 이정표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1933년 초, 김구가 장개석에게 임정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자
    장개석은 중앙군관학교 洛陽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해
    군사인재를 배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다.

    이에 필요한 경비는 중국국민당 중앙당부가 매월 당시 중국화폐(法幣)로
    1,500백 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한적 학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대우했다.
    피복 및 기타 물품을 대원들에게 지급한 것 외에도 매월 12원 씩 급료를 지급했다.

    이 금액 중 한달치 식대로 6원, 국민당 당비로 급료의 12분의 1을 제하면
    실제 학생들이 수령한 금액은 3원 6각이었다.

    중국의 군부계통에서 키우려던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이 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장개석과는 사제지간이었다.

    1931년 9․18만주사변 발발 후 김원봉은 사제관계를 이용해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장개석은 황포군관학교 동창회의 勝傑, 康澤, 干國勳 등에게 김원봉에 대한
    지원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1932년 8월에 이르러 김원봉은 장개석으로부터
    <조선의열단>을 조직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 조직의 활동비용은 김원봉이 <민족운동위원회>로부터 받았으며,
    그가 요청한 금액은 일정치가 않았지만 대략 매월 약 400원에서 1,000원 전후 쯤 됐다.

    <민족운동위원회>는 장개석의 지시로 만들어진 단체로서
    <조선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모든 경비는 김원봉이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上校(현 한국군의 대위에 해당) 계급의 참모 명의로 직접 장개석에게 신청했다.

    그 경상비는 매월 2,000원에서 3,000여 원 등 일정치 않게 지급됐다.
    필요에 따라 금액은 가감이 있었으며, 지출도 지방출장비
    명목으로 대략 1,000원에서 수천 원, 혹은 많을 때는 1만원까지 포함돼
    <임시특별비>에서 지급됐다.

    김원봉은 1932년부터 경비와 군사활동 면에서 비밀리에
    중국 군사정보계통의 지원과 지휘를 받았다.

    중국 군사정보계통의 지원과 지휘를 받은 것이
    그가 1935년 한인 좌파연합체인 <대일전선통일동맹>을 토대로
    <조선의열단>을 확대해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전후 경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 단체 중
    대체로 김구가 이끄는 우파세력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세력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두 파가 대립하는 국면이 됐다.



    Ⅱ. 중국국민당의 지원원칙 제정과 그 변화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盧溝橋사건이 발생하자
    장개석은 7월 17일 이른바 <盧山談話>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대일 항전을 선포했다.

    중국정부는 그 때까지 일본에 대해 인내해 온 방침을 버렸으며,
    외교적으로도 일본에 대해 꺼릴 필요가 없게 됐다.

    따라서 그 전까지는 비밀에 부쳐졌던 임정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도
    공개적이 됨과 동시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장개석은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줄곧 깊은 동정을 보냈다.
    한편, 실제적 관점에서 출발해 중국은 이미 일본과 전면적 지구전에 돌입해 있는 이상,
    일본이 순조롭게 한국 내 전쟁자원과 병력자원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임정 등의 재중국 한인들이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개석은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등 2개의 한인 군대의 존재를 승인했다.
    한국광복군이 1940년 9월 17일 重慶에서 정식으로 창립되고서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비로소 중국국민당 및
    국민정부의 정책 가운데 일부분이 됐다.

    항전 시기, 중국 거주 한인들은 좌파든 우파든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모두 무력의 건립은 광복을 성공시키는데 없어선 안 될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그것은 중국 내 한인들이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의 활동상을 내외에 알릴 수 있는 상징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정 역시 일찍이 1936년에 군사계획을 작성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임정은 정규군을 양성해 일본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이듬해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시 한 번 군사위위원회를
    군무부에 설치해 관련 군사계획 일체를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피난 중에 있던 임정은 재정 부족에다 중국군부가 동의하지 않았던 관계로,
    또 광복군의 창설을 반대한 조선의용대 김원봉의 저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김원봉은 이미 1938년 10월 10일 장개석이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하고,
    이 조직을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의 戰地工作隊에 소속시켜
    직접 중국군의 작전임무를 맡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구와 임정내 우파 인사들은 김원봉의 활약을 보고 심리적으로 자극을 받아
    중국 군사당국에 조선의용대 외에 임정에 소속될 [한국국군]의 창설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중국 군사기관 당국자는 김구의 요청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백범일지에 기록돼 있는 김구의 발언이다.

    즉 그는 중국당국에 한국독립운동의 지원에 대해 상의했으나 당국자 徐恩曾이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책임을 지고 선생의 계획서를 상부에 보고 올릴 테니 계획서 1부를 만들어 보내주시오."
    그리고 얼마 후 장개석에게서 답신이 왔는데, 김구의 광복군 창설계획을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徐恩曾은 중국국민당 중앙조사통계국 부국장이었다.
    김구는 먼저 徐恩曾을 통해 중국국민당 중앙조사통계국 국장 朱家驊로 하여금
    1940년 3월 2일 <松字第42號>로 장개석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1940년 4월 11일, 장개석은 임정이 중국내에서 또 다른 한국군을 창설하는 것을 승인했다.

    광복군 창설 초기 장개석은 군사위원회에게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방안에 대해 초안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현재 입수 가능한 자료 중에 중국 최고 지도자가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원칙을 정하라고 지시한 것으로는 가장 이른 것이다.

    이 사실은 장개석이 아마도 처음으로 과거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일정한 원칙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임시로 조치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 기회에 원칙을 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정의 광복군 창설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게 중국 내 한인들의
    군사활동 가운데 독점적 지위를 잃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안겨줬다.

    이로 인해 김구 일파와의 대립, 분열이 심해졌다.
    다른 한편 당시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의용대를 떠나
    중공군 지역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광복군 제1지대장  본부 구대장 겸 부관주임을 지낸 김승곤의 증언에 의하면,
    1941년 초 조선의용대 제3구대는 장개석의 승낙을 얻어 만주로 진군하던 도중
    황하강을 건너 중공군 지역으로 넘어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특히 1941년 말 경 조선의용대 부대장 석정과 중공군 팔로군이 암암리에
    내통해 대원 100여 명을 연안으로 도주시킨 사건은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측 인사들을
    크게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장개석은 1941년 10월 30일 중국국민당군 참모총장 何應欽 장군에게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공히 국민당 군사위원회에 소속시켜 참모총장이
    통일적으로 운용, 관리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장개석은 군사위원회에게 조속한 시일 내로
    한국독립운동 지원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11월 15일 장개석은 정식으로 한국광복군을 지정해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총장의 통합 지휘를 받도록 하고,
    동시에 광복군과의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尹呈輔와 王平一 등의
    중국군 장교를 광복군 참모장과 각처 처장에 보임케 했다.

    중국 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중공이 이미 화북지역으로 넘어간 다른 한국군대, 즉 조선의용대를
    지원 및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점이었고,
    다음으로는 조선의용대원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인 좌우파 군사조직이 동시에 모두 중국군에 예속돼 운용된 사실은
    김원봉 세력의 쇠퇴를 의미하고, 반대로 중국당국이 비교적 임정과 광복군을
    중시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임정의 광복군은 ‘한국광복군 원조방법’에 의거해 정식으로 중국군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중국군에 소속돼 지원을 받게 됐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른바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에 종속됐음을 의미한다. 

    전술했다시피 조선의용대원들이 빈번하게 중공지구로 넘어간 사건은
    중국군으로선 그냥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朱家驊가 1942년 2월 11일 장개석에게 일부 조선의용대원들이
    또 다시 북상한 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보고하면서 김구에게 조선의용대를
    접수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그 결과 장개석은 조선의용대에게
    1942년 5월 15일 정식으로 광복군에 편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른 한편,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 창설 초 장개석의 지시를 받고
    한인들 사이에 내부 파벌투쟁이 극심하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는
    한국지원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1941년 10월 재차 장개석의 지시를 받았지만 1942년 7월에서야
    <재중국 한국 혁명역량에 대한 지원운용 지도초안>을 만들어
    김구를 정치 영수로 삼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8월 중국국민당 한국문제전문위원회(戴傳賢, 何應欽, 王寵惠, 陳果夫, 朱家驊, 吳鐵城, 王世杰이 한국문제에 대한 전문소조를 구성)는 몇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한국문제를 논의한 결과 군사위원회가 만든 ‘재중국 한국 혁명역량에 대한 지원운용 지도초안’을 견본으로 삼았다.

    吳鐵城은 한국문제를 논의한 결론을 장개석에게 보고했고,
    10월 9일 장개석은 전적으로 하나의 당만을 지원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만약 하나의 당만을 지원상대로 삼으면 반드시 한인들의 단결을 이뤄내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吳鐵城은 장개석의 지시를 받은 후 한국문제전문소조 구성원들과 논의한 결과
    <조선복국운동을 지원하는 지도방안>을 만들었다.

    이 안은 장개석이 지시해 제정한 다당 동시지원 원칙에 토대를 두고
    1942년 12월 27일 실시하도록 승인이 났다.

    그런데 이 안이 실시되기 전 군사위원회가 파견한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장 王平一이 1942년 7월 28일 朱家驊에게 보낸 서한은
    광복군 내부 싸움의 문제는 군사위원회 판공실 군사처에서 일을 맡아보는
    侯成의 선입견이 너무 깊어 고의로 두 계통을 배양한 데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건의했다.
    광복군은 군사문제일뿐만 아니라 정치문제로도 봐야 한다.
    그래서 중앙당부에 단일 기구를 설립해 전문적으로 관련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군사부분에 관해서는 군사위원회가 사람을 파견해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

    王平一의 이 의견은 군사위원회 중간 집행실무자들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대한 행보가 통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 뒤 朱家驊는 王平一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장개석에게 한국문제 처리의견을 보고하면서
    광복군 내의 분규가 층층이고, 중국측 관련 기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으며
    지도운용에도 또 차이가 나는 게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설명했다.

    그리고 반드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대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42년 12월,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참모장 何應欽, 중앙조직부장 朱家驊와
    중앙비서처 처장 吳鐵城 3인을 한국독림운동에 대한 지원 정책을 주관하는
    책임자로 지정해 전문적으로 이 일을 처리하게 하면서 한국독림운동 지원 조치에 관한
    행보를 통일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김구를 위주로 지원하자는 朱家驊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당 동시지원 원칙을 견지했다.

    朱家驊는 1943년 3월 5일 재차 장개석에게 비밀리에 한인 당파문제의
    처리 문제와 관련해 김구가 영도하는 한국독립당을 위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에 대해선 발전을 도와선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임정을 비롯해 중국 내 한인 사회에 존재한 주요 당파로는
    총 7개 정당(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광복진선, 극동의 3개 당)과
    4개 단체(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가 있었다.

    8월 3일 장개석은 상기 朱家驊의 의견에 따라 한국당파문제를 처리하는 기본 원칙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 각 당파들 간에 원래 통일을 강하게 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세한 세력을 선택해 그들을 지원해 독립운동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다.

    현재 보아하니 한국 각 당파들 중 한국독립당 조직이 비교적 온전하고, 역사도 깊다.
    금후 이 당을 중심으로 그 영도지위를 지원하는 게 좋겠다."


    장개석이 김구를 중심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데는 대략 두 가지 사정이 있었다.

    첫째,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래 중국은 만주지역의 안전을 위해
    한국독립운동을 지키고, 유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임정 내 한인들을 통일 및 단결을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런데 김구와 김원봉 양파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다
    경비지급이 싸움과 상처를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1943년 7월 28일 양당이 경비문제로 격렬하게 다투던 상황에서
    장개석이 직접 김구와 김원봉, 그리고 여타 임정간부 네 사람 등과 회견했다.

    이 회담을 전후해서 장개석의 기존 방침이 바뀌게 됐다.
    한인 당파들 간에 끊이지 않던 싸움이 장개석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국민장이 한 당만 원조하면 한인들 간의 분란이 더 심해질 거라는
    우려가 기우라는 생각 끝에 방침을 바꿔 더 이상 한인 각 당파들에게 단결을
    요구하지 않고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위주로 지원하기로 했다.

    그래서 독립운동의 정치문제에서 임정을 주요 지원 대상으로 중시하고
    그 내부 정쟁이 해소되도록 할 생각에서 기존에 정해놓은 다당 동시지원 원칙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둘째, 김원봉이 주요 리더인 조선민족혁명당이 중국 최고 당국자인 장개석에게
    혁명역량이 결여돼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점이다.

    조선의용대의 태반이 1940년부터 이듬 해 5월 하순까지 중공과 결탁해
    화북에서 적후공작을 전개한다는 명분으로 중공군에 투항한 것이다.

    이 시기 연안에서 중공의 지원을 받던 김무정, 최창익 등의
    한인들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1941년 10월 10일)해
    끊임없이 대표를 重慶에 보내와 반일민족전선을 결성하기를 호소했다.

    이 연합회는 1942년 8월 15일 이후
    조선독립동맹으로 개칭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선의용대원들 중 일부가 화북으로 건너 간 것은
    중공이 전개한 선전선동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 지도자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로서 국민당 반대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는 重慶에 체류한 동안은 공산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잠시 공산당의 외피를 벗어던졌지만 사실 내심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한 인물이었다.

    중국이 이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일본 측이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당국의 반감을 유발시키기 위해 김원봉 관련 정보를
    국민정부에게 제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상술한 장개석이 김구를 위주로 지원한다는 방침에 대해 일부 중간
    집행실무자들은 전적으로 한국독립당을 원조 대상으로 삼고 여타 당의 한인들에게는
    지원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 한국독립운동지원 정책을 집행하면서 한국독립당은 물론,
    그 외의 여타 당파들에 대해서도 원조를 했다.

    그래서 그들은 1945년 2월 소집된 중국내 한인들에 대한 원조 좌담회에서
    장개석의 지원방침을 재고해 임정과 한국독립당의 지위를 존중한다는
    전제 하에 한인 기타 당파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건의했다.



  •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Ⅲ. 중국국민당의 경비보조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중국의 한국독립운동 경비보조는 크게 4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정무비였다. 여기에는 임정 및 의정원의 경상비도 포함된다.
    둘째는 당비였다. 임정 내 각 당에 지급된 보조비도 포함돼 있었다.
    셋째는 군비였다. 이에는 주로 광복군의 무기 장비,
    급양비 그리고 병력징모, 선전 및 정치공작 훈련비 등도 들어 있었다.
    넷째는 한인 교민들의 생활비였다.

    이러한 경비에 대해 중국정부는 중국국민당이 결정한 지원방안에 의거해
    주요 지원 대상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했다.

    중국내 한인 단체들 간에 발생한 마찰의 이면에는 경비문제가 주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위 네 종류의 경비에 대해 종합적으로 서술해보자.

    중국국민정부가 매월 정무비 및 교민생활비를 지급한 것은 1941년 12월 26일부터였다.
    1942년도 임정 외무부보고에 의하면, 임정은 중국정부로부터 중국화폐 6만 원을 받았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임정은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한인 권속 120여 명의 생활비를 포함해 임정의 모든 경비를
    완전히 미국 등지의 한인교민들이 모금해서 보내준 매월 미화 3,000달러에 의지해왔다.

    그러나 미일 개전 후 미국교민들의 송금이 단절되자 김구는 하는 수 없이
    중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 해 12월 9일 그는 국민당 중앙조직부 부장 朱家驊에게 장개석이 매월 당정비,
    권속생계비 등으로 몇 만원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다.

    김구가 요청한 몇 만원에 대해 朱家驊는 자의적으로 지급금액을 6만 원으로 결정해
    이를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장개석은 12월 17일 朱家驊에게
    중앙조직부장의 특별지출비 명목으로 발급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 이전 1941년 9월 중순 김구는 朱家驊를 통해
    광복군의 인명 수가 증가했다는 명목으로 장개석에게 20만 원을 지원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런데 장개석은 10만 원만 허락했고,
    김구는 두 달 뒤 11월 중순에 약 10만 원을 수령했다.

    이때부터 김구가 중국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원조를 받은 시점까지는
    중국정부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군사위원회에 소속시킨 시점과 겹쳤으며,
    중국정부가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관한 방법을 정하지 못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사실로 보아 태평양전쟁 전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일정한 공식적 원칙 없이 이뤄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상기 1941년 12월 처음으로 6만 원을 지급한 이래 중국정부는
    관례적으로 매월 같은 금액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때 지급된 경비 6만 원은 1943년 5월에 이르러 20만 원으로 증가됐다.
    같은 해 5월 중․하순(11일~24일 사이), 장개석은 매월 14만 원을 더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지급액이 증가된 과정은 이러했다.
    1943년 5월 重慶의 물가는 중국정부가 최초로 지원금을 지급한
    1941년 12월을 기준으로 3.5배 이상이 올랐으며,
    특히 1943년 4월에서 5월 한 달 사이에만 약 1배(정확히는 0.8배)가 뛰었다.

    따라서 김구는 동년 4월 朱家驊에게 지원금을 올려 줄 것을
    재차 장개석에게 부탁해주길 요청했다.

    이 때 김구가 제출한 임정 운용에 필요한 경비 및 소속 한인 교민들의
    전체 생활비 예산은 다음과 같았다.

      1. 임정 직속 건물임대료 8,000원.

      2. 임정 정무비(업무추진비, 위생, 교육 및 임시비용 포함) : 5만 원

      3. 임정 재외 공작비(선전, 정보수집, 통신 포함) : 6만 원

      4. 임정 직원 생활비(총 102명 중 겸직자 42명에 대해선 지급하지 않고,
         나머지 60명은 기본 생활비 외에 한 사람당 250원을 지급함) : 1만5,000원.

      5. 각 단체 보조비

      6. 중경시 부근 전체 한인교포 380명의 생활비(1인당 250원) : 7만9,500원

         이상 총 法幣 24만4,500원.

    이 가운데 미국의 한인 교민들이 매월 보내주는
    미화 평균 2,000달러(法幣로 4만원 상당)와
    중국정부의 보조비 6만 원을 합친 10만 원을 충당해도 14만 원이 부족했다.

    장개석은 상기 안을 승인한 후 중앙당부 비서장과
    중앙조직부장에게 보내 6월부터 지급하도록 했다. 

    그런데 증가된 매월 14만 원의 금액이 바로 임정 내 좌우 양당 간의
    충돌을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됐다.

    이 문제에 관해선 다음 절에서 상세하게 논의하겠다.
    그런데 장개석의 ‘다당 동시 원조 원칙’에서 보면,
    조선민족혁명당의 보조비는 국민당 중앙당부가 직접 이 당에게 지급한 게 아니라
    김구의 손을 거쳐 지급된 것이었다.

    전시 물가가 쉼 없이 오름에 따라 중국정부의 보조비도 증가했다.
    기존 20만 원의 보조비는 1944년 2월 17일 이후부터 50만 원으로 증가했다.

    이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1941년 1월 10일 이전, 김구는 朱家驊, 吳鐵城 두 사람을 통해
    100만 원의 차관을 대여하라는 장개석의 특별 허락을 얻어
    이 돈을 같은 해 1월 말 2회로 나눠 수령했다.

    그러나 100만 원의 차입금으론 물가 폭등으로 인해 얼마간은 견딜 수 있지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에는 계속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침내 부득이 또 다시 중국 중앙당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는 대여 받은 100만 원과 향후 특별 승인으로 지급 받게 될 
    공사비용의 모든 원조를 차관으로 생각하고 “복국”을 이룬 후에 상환하는 조건으로
    재차 매월 100만 원씩을 대여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구의 이 요청에 대해 朱家驊는 2월 16일 장개석에게 보고하면서
    “매월 100만 원은 너무 큰 거금”이라 기존 매월 지급해 온 20만 원의 보조금을
    동년 1월부터 30만 원을 더 늘려 총 50만 원을 지급하는 게 적당할 것이라고 건의했다.

    장개석은 2월 16일 이 문제를 何應欽에게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何應欽이 이 방안에 동의하지 않아 집행이 미뤄지게 됐다.

    이 상황에서 朱家驊가 4월 18일 장개석에게 지원금 증액문제에 대해
    가능하면 신속히 허락해주기를 건의했다.

    이 해 8월 신임 중앙조직부 부장 陳立夫와 吳鐵城 비서장이 장개석에게
    9월부터 보조금을 매달 100만 원으로 늘려 지급해주기를 바란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1945년 1월 이후 이 보조금은 다시 300만 원으로 증가됐다.

    이외에 김구를 통해 임정이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의 기밀활동비, 특별보조비, 난민구제비 등의 명목으로 수령한 금액은
    일일이 다 산출해낼 수가 없다.

    이 가운데 기밀활동비는 1944년 8월 3일 陳果夫가 발의한 것인데,
    그 후 매월 20만 원을 보조 받았다.

    중국정부의 임정 보조비 중에는 임정에 소요된 비용 이외에도
    重慶시에 거류하는 한인 교민 남녀 총 400명의 1인당 한 달 생활비
    1,200원(1944년 2월 기준) 총 48만 원도 있었다.

    이 외에 군사비도 지원을 받았다.
    1938년에서 1941년 사이 조선의용대가 명의상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속해 있던 시절,
    이들의 의식주는 중국군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한국광복군도 중국군사위원회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1941년 11월부터 1945년 5월 광복군이 임정에 속하게 될 때까지
    중국군사위원회가 줄곧 양식, 군사장비 등 보급품을 제공했다.

    중국 국민정부가 처음 지원금을 지급했을 때
    그 명목은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 특별지출비였다.

    특별지출은 장개석의 <친필 지시>, 즉 <手諭>에 근거해 중앙은행이 지출한 대금이다.
    위에 제시한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41년 12월 정기 지급 개시 때부터
    항전 말기에 이르기까지 지원금의 증액은 물가 상승과 거의 일치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1943년 8월 이후부터는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김구 위주의 지원방안이 정해졌다.

    이론상으로는 이 방안에 맞춰 모든 조치가 조정돼야 했다.
    그러나 실무 집행 관련 부서는 이 방식을 취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군비 이외 모든 보조금이 김구의 손을 거쳐
    임정 내 각 단체 및 한인 교민들에게 분배됐다는 것은
    아마도 국민정부가 이른바 <일당 위주 지원> 정책을 시행했으며,
    바로 김구를 지지한 것임을 의미할 수 있다.

    보조비의 요청과 지급은 국민당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정해 놓고 지급한 게 아니라
    먼저 김구가 청구하면 국민정부가 임기응변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크게 보면, 임정내 당, 정 관련 모든 문제는
    김구가 대변해 朱家驊를 거쳐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임정 혹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안은 장개석이 대체로 두 가지 계통,
    즉 군사계통인 중국군사위원회와 정치계통인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의
    라인을 통해 명령을 내리거나 보고를 받았다.

    따라서 장개석과 이 두 계통의 책임자 혹은 그 이하의 중급 정도의 실무자 사이에
    한국독립운동 지원의 정책과 시행 면에서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면 항전 시기 중국정부가 한국독립운동 단체에 경제적으로 지원한 금액은 총 얼마나 될까? 태평양전쟁 이전과 이후의 군비 및 기타 구제비,
    그리고 김구의 특별기밀비, 기타 물질원조품과 차관에 관련된 자료도 불완전하지만,
    이를 정확한 금액으로 환산해낼 수도 없다.

    따라서 드러나지 않은 부분을 제외하고 비교적 근거가 완전한 것은
    매월 지급된 보조비를 들 수 있다.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지급된 보조금은 法幣로 총 3,232만 원이었다.
    이 금액은 같은 기간 국민정부의 재정지출 가운데 특별지출 총액 7,496만5,615원의 43%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만약 기타 김구를 지원한 특별기밀비까지를 더한다면
    아마도 최소한 100분의 50이상은 됐을 것이다.



    Ⅳ. 중국국민당의 경비지원과 임정의 내홍



    임정 내부 한인 당파분쟁은 멀리 임정수립 초기부터 줄곧 존재해왔던 것이다.
    주로 사상, 주의, 노선, 출신성분(출신지역 포함)이 다른데서 기인한 게 컸다.

    1943년 7월 임정 내 양당 간에 경비분배 문제 때문에 일어난 싸움은 끝내
    화해가 되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한국독립당 김구 주석 등을 위시한 각료들은 마침내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저간의 내막을 재구성해면 다음과 같았다.

    1943년 7월 14일, 조선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 두 사람이
    동시에 중국의 吳鐵城, 朱家驊, 何應欽에게 투서를 보냈다.

    한국독립당 김구 일파가 동년 6월부터 중국국민당 중앙당부가 증액해준 금액 중에
    자신의 당에 할당된 보조비 1만5,000원과 한인 생활보조비 7만9,000원을 지급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착복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사실상 김원봉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이러했다. 장개석이 1943년 5월 보조금을 매월 20만 원으로
    증액시킬 것을 승인하면서 이를 중앙당부 비서장과 중앙조직부장에게
    6월부터 지급하라고 지시를 내린 사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다.

    이 보조금에 대해 승인이 떨어진 시점은 6월 8일이었지만 업무가 바빴던 관계로,
    또 수속상의 문제로 인해 중앙당부에서 7월 중순에서야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사정을 몰랐던 김원봉 일파는 6월 18일 吳鐵城 비서장에게 전보로
    이 사안의 진상을 문의했다.

    그런데 吳鐵城 역시 6월 26일에 답신을 보내
    20만 원은 모두 김구가 조직부장 朱家驊에게서 받아 갔다고 설명했다.

    때 마침 朱家驊는 동남 각성으로 출장을 가고 重慶에 없던 부재상황이었다.
    그런데 김원봉은 朱家驊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그에게 확인을 했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바로 임정 국무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한국독립당의 원로인사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따라 임정 내 충돌은 전에 없던 험악한 수위로 높아졌다.
    출장에서 돌아와 이 사정을 알게 된 朱家驊가 성명을 발표해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 나서야 진상이 밝혀졌다.

    그런데 김원봉 일파는 김구가 조선혁명민족혁명당에서 7월 12일 발표한
    <정부공금 착복사건>성명을 철회하라고 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당에서 발표한 문제의 문건을 취소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구 일파는 9월 초 이 선언을 접하자 당파간의 협력의 문은 이미 닫혀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앞서 말한 대로 전체 각료의 총사직을 결행한 것이다.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선 몇 가지 각도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첫째, 당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정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었던 점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당내 노선문제로 두 파로 분열돼 있던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 계급투쟁을 강력하게 주장한 최창익파가 잇달아 중공지구로 도주해감에 따라
    날로 세력이 약화돼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다 김원봉은 중국국민당이 임정을 중심으로 지원하려고 하자
    임정을 견제해오던 기존 입장에서 벗어나 임정에 참여해 세력을 만회하려고 기도했다.

    그런데 임정에 참여한 뒤 김구파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 이 사안이 그들에게 김구파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둘째, 경비보조업무를 집행하는 기관이 집행 면에서 서로 행보가 일치하지 않았던 점이다.
    중국국민당의 重慶시대 초기에는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중국의 기관이
    여러 곳이 되는 현상이 생겨났다.

    그러한 기관으로는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 군사위원회 정치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 중앙조직부, 외교부, 軍統局 등이 있었는데,
    이 기관들이 제각기 적게 혹은 많게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업무에 관여했다.

    이처럼 다기한 기관들이 난립해 있는 이상 업무 집행상 서로 보조가 맞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이 사실을 일찍부터 알게 된 장개석이 “통일적 운용”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린 배경이었다. 특히 앞서 살펴본 대로 김원봉 일파에게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것도 바로 吳鐵城 비서장과 朱家驊 조직부장 간에 상황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제각기 집행하는 등의 불일치였다.

    셋째, <다당 동시지원 원칙>은 실행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도 중국국민당 중앙당부가 지급한 보조비를 받았다.

    이는 이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보조금이 모두 김구를 거쳐 지급된 점이다.

    당시 보조금이 김구를 거쳐 분배되는 이러한 지급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은 비한국독립당
    인사 이광제는 朱家驊에게 불평했다.

    그는 중국정부가 한 사람, 하나의 당을 지원해선 안 되고, 보조비금의 반은 임정에 지급하고,
    나머지 반은 한인 교민생활보조비로 지급해야지
    절대 김구 및 김원봉 등에게 지급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김원봉이 일으킨 김구 모함사건은 중국정부가 김구와 임정을 중심으로
    지원하는 원칙을 취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 듯하다.

    장개석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임정 내 양당의 내홍이라는 와중에 있게 됐다.
    7월 말, 장개석은 양당 영수들 및 기타 한인들과 회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그 영도적 지위를 인정하고 그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사건과 무관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 지난 13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8회 이승만포럼에 발표자로 참가한 서상문 강사.ⓒ정상윤




    맺음말



    중국이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虹口공원 의거가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중국 조야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비공개적으로 적극 경제지원을 개시했다.

    중국의 한국독립운동의 지원이 공개화 된 것은 항전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 방안이 다당 동시지원 정책에서
    김구와 임정을 위주로 지원하는 일당 중심 지원 정책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1943년 8월 초 장개석이 정한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집행에서는 중국이 여러 종류의 서로 다른 한국독립운동 지원 기관들이
    난립한 사실, 또한 중앙 집행기관 실무자들의 고의로 인해 대략 두 계통의 라인을 통해
    실행된 것은 기존에 존재해오던 한인 독립운동 진영 내의 마찰과 분열을 고조시킨 원인이 됐다.

    항전시기에 이르러 중국정부는 군비, 임정 및 각 단체의 보조비와 차관뿐만 아니라
    한인 교민들의 생활보조비, 각종 구제비, 구호물품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한 보조비만 계산해도 중국국민정부의 특별지출비의 반이 넘었다.
    중국 조야에서 공개, 비공개로 한인들에게 제공해준 경제지원을 전부 화폐로 환산하면
    약 15억 원이 될 것이라는 추산이 있다.

    그것을 금전으로 정확하게 산출하기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금액이 많고 적음을 떠나 중국정부가 끝까지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해준 행위 자체는
    높이 평가돼야 한다.

    중국정부가 그렇게 한 데는 약자를 도와주는 중국적 관념,
    그리고 현실정치의 필요성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중국이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준 각종 경비 지원금의
    분배가 한인들 간의 마찰과 다툼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기억돼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임정 내 사상, 노선, 출신성분, 출신지역 등의 상이로 존재해오던
    한인들 간의 내홍이 극단적으로 양 당이 갈라서게 된 사실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물론, 지원된 금전 자체는 내홍과 당파 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중국정부에서 지급된 각종 경비는 단지 상대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기회로 활용되면서
    불화에 불을 지핀 간접적인 도화선이었을 뿐이다.

    각 당파는 중국이 인도적인 동기와 함께 임정과 한인 독립단체,
    특히 한인무력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지급된 경비보조금을 주도적으로 얻기 위해 경쟁했으며,
    이러한 경쟁이 원래 존재했던 분열상황을 더욱 가중시켰던 것이다.

    특히 김원봉은 한국독립당과의 경쟁에서 중국국민당으로부터
    정치적 영수로 인정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김구 일파를 공격하고
    흠집을 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