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성구> 선생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선천면사무소 방화를 주도해
    징역 10년 형을 받았고,
    <병인 의용대> 소속으로
    중국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2차례 투척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감옥에 갇혀있다 순국했다.

    <이성구> 선생은
    1896년
    평북 선천군 수청면 고동읍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이수봉>, <이동농>, <김동농>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일제를 향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선천면사무소 공격을 주도해
    보안법 위반 및 방화소요죄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일제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1923년 5월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석방된 <이성구> 선생은
    바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3년 9월
    상하이 <독립신문>에 입사한 선생은
    2년 동안 식자공
    (활자를 원고대로 배열하는 직업)으로 근무하다
    [의열투쟁]에 참가하기로 결심,
    1926년 1월 <병인 의용대>에 참여했다.

    1926년 <병인 의용대>는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을 향해
    3번의 폭탄공격을 실시했다.

    <이성구> 선생은
    <강창제>, <김창근> 등 대원과 함께
    시한 폭탄을 영사관으로 투척,
    창고를 파괴하고,
    일본 경찰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선생은
    1929년 1월 <한국노병회> 특별회원으로 가입해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30년 6월
    상하이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뒤
    기관지인 <상해한문> 기자로 활동했다.

    1932년 10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순국하자
    애도의 글을 실어 배포했고,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뒤에는
    상하이의 친일단체인
    <한인 친우회> 위원장
    <유인발>을 저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33년 10월 12일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1934년 3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