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시대 국내 지식인 중에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한 사례가 많았다.
    이 가운데는 일제 뿐만 아니라
    공산당에 격렬히 저항한 이들도 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원심창>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원심창> 선생은
    1906년 12월 1일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였던 선생은
    평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3·1만세운동을 겪으며
    일제의 부당함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원심창> 선생은
    1920년 서울의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2학년 무렵 중퇴한 뒤
    1923년 일본 도쿄로 유학,
    니혼(日本)대학 사회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비 조달이 어려워 자퇴한 뒤
    독학을 통해
    일본의 사상가인 <오스기 사카에> 등의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다.

    이후 선생은
    재일한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흑우회>의 <박 열>과 만나게 된다.

    <원심창> 선생은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과
    <박 열>의 일왕폭살기도 사건을 통해
    [무정부주의자]로 변신한다.

    1924년 일본에 있던 유학생과 함께
    <흑우회>를 재건하고,
    1926년 <흑색운동사>를 설립,
    기관지 [흑우] 등을 간행했다.

    <흑색운동사>는
    <흑색전선연맹>으로 바꾸어
    일본의 <흑색청년연맹>과 함께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1927년에는 <흑색운동사>를 <흑풍회>로 개칭,
    1928년에는 <흑우연맹>으로 확대ㆍ개편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에 맞서
    항일투쟁과 반공투쟁을 펼친다.

    1930년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한
    [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보석 석방된 후
    1931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모임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1931년 10월부터
    서기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면서,
    <흑색공포단> 대원으로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계획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일제와 국민당 내 친일세력의 밀약을
    세상에 폭로해 일제의 공작을 수포로 만들었다.

    <원심창> 선생은
    일제와 공산당에 맞서 싸우면서,
    해방 후 출옥할 때까지
    12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항일반공투사로서 평생을 헌신했다.

    정부는 1977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