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감식’ 주도 이정빈 교수,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혼자 한 것으로 실토
  • ▲ 4월 1일 조선일보 보도. '장준하 유골 정밀감식'을 맡았던 이정빈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화면캡쳐]
    ▲ 4월 1일 조선일보 보도. '장준하 유골 정밀감식'을 맡았던 이정빈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화면캡쳐]

    4월 1일 <조선일보>에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67)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이 교수는 2012년 8월 故장준하 선생(이하 장준하)의 유골을 이장하면서 시작된
    ‘유골 정밀감식’의 책임자였다.

    이정빈 교수는 대한법의학회 회장, 대검찰청 과학수사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1년 여대생 박상은 피살 사건, 1987년 연세대 이한열 사망 사건, 1995년 인기 그룹 듀스 멤버 김성재 사망 사건, 2011년 만삭 의사 부인 사망 사건 등에서 부검을 맡았다.

    반공주의자이자 김 구의 비서였던 故장준하는 징용으로 일제군에 끌려갔다 탈출, 광복군으로 활동했었다.
    이후 ‘사상계’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박정희 정권에 맞서 [반독재 운동]을 펼쳤다.
    그는 박정희를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었다.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측근들과 함께 경기 포천군 약사봉(489m)으로 등산을 갔다
    하산 도중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은 그의 제자인 K씨(교사로 퇴직)였다.

    이후 좌익들은 박정희 정권이 장준하를 절벽 아래로 밀어뜨려 암살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주장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하다 2012년 8월 폭우로 훼손된 묘를 이장하던 중,
    장준하의 두개골이 함몰된 모습을 보고 [정밀감식]을 시작한 것이다.

  • ▲ 2012년 8월 폭우로 훼손된 묘지를 이장하다 드러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연합뉴스]
    ▲ 2012년 8월 폭우로 훼손된 묘지를 이장하다 드러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 연합뉴스]

    이정빈 교수가 지난 3월 26일 “머리를 맞아 즉사한 뒤 추락했다”는 결론을 담은,
    <장준하 유골 정밀감식 보고서>를 발표하자 좌파 언론들은 일제히 이를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장준하를 추모하는 온갖 집회를 서울시내 등지에서 벌였다.

    그런데 이정빈 교수가 몇 달 동안 했다는 [정밀감식]이 혼자서 했던 감식인데다, 미리 결론을 내린 채 진행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4월 1일 이정빈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밀감식]이 실은 [본인 혼자 주도한 감식]이었으며, 이미 결론을 내린 채 벌인 작업이었다는 점을 밝혔다.

    다음은 이정빈 교수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밀 감식팀]에 대해 밝힌 내용이다.

    Q. 감식팀은 어떻게 구성됐나?

    팀이라 할 것도 없다. 사실 혼자서 했다.
    작년 여름 유골을 이장할 때 처음 감식한 이윤성 서울대 교수와 둘이 하려고 했다.
    그는 처음엔 할 듯 하다가 자신은 빠지겠다고 했다.
    대한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도 함께 하자는 공문을 보냈지만 거절당했다.


    Q. 어쨌든 38년이나 된 유골만 있으니 부검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밀 감식]이라면 컴퓨터 단층촬영과 3D 동영상 등을 활용한 것을 말하나?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X레이로 전체 유골 사진을 찍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감식에는 별다른 공정이 없다.
    1975년 사망 당시의 검안 사진들과 내 눈으로 유골을 보면서 정리가 됐다.


    그랬다.
    이정빈 교수는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라는 단체와 유족의 요청을 받고,
    혼자서 유골을 눈으로 살핀 뒤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정빈 교수의 [정밀감식]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도 있다.

    당초 함께 [정밀감식]을 하려던 이윤성 서울대 교수의 말이다.

    “그분은 유골을 보기도 전에 언론에 [타살 가능성]을 말했다.
    이는 학자적 태도가 아니었다.
    후배 법의학자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나는 직접 그분에게 재차 확인했다.
    그 분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선입견을 갖고 감식을 한다면, 결과는 뻔 하지 않은가.
    내가 들어가 본들 과학적 논의가 안 될 것으로 봤다.”


    이정빈 교수는 이윤성 교수가 내놓은 의견에 대해서도 미덥지 못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 인터뷰 중 일부다.

    Q. 이장 과정에서 유골을 검안한 이윤성 서울대 교수는 “이는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혀 생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과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는 게 법의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임상 의사라면 그럴지 몰라도, 법의학자는 당시 상황이 어떠했는지 재구성을 해야 한다.
    그냥 [칼로 찔렀다]는 사실에 그치는 게 아니고, 어떤 칼로 어떻게 찔렀는지를 그려내야 한다.


    이정빈 교수는 “장준하는 추락했다”는 심지어 사고 당시 목격자의 말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정빈 교수는 K씨가 1993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사고 장소는 계곡물이 흐르는 곳 옆에 고운 모래로 덮여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추락한 뒤 잠시 숨이 붙어 있었다”고 증언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그런 사람 말을 믿지 않는다”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정빈 교수가 이처럼 ‘이미 결론을 내린 뒤 감식을 실시’했음에도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확인도 않고 발표했다. 물론 언론을 불러 기자회견도 가졌다.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지난 3월 26일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교수에게 [정밀감식] 결과를 발표하게 했다.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 중 일부다.

    “장 선생의 두개골 함몰은 추락에 의한 골절이 아닌 외부 가격에 의한 손상이다.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한 뒤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경향신문>은 이때 이 교수를 [국내 최고의 법의학 전문가]라며 그의 [개인적 추정]을
    “결론이 나왔다”며 기정사실인양 보도했다.

    이런 보도를 접한 대한법의학회는 결국 언론들을 향해 공식성명까지 발표했다.

    다음은 대한법의학회의 성명서 전문이다.


    [성명] 故 장준하 선생 사망원인 관련 언론 보도에 대한 입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연구소는 어떠한 조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최근 보도된 고 장준하 선생 사망원인 관련 언론 보도 중 ‘정밀감식에 앞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대한법의학회>에 참여를 요청했지만 참여가 어렵다는 회신을 받아 이 교수에게 의뢰한 것’이라는 보도에 대해 <대한법의학회>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에서 유골에 대한 검사의 요청 당시 <대한법의학회>는 공정하면서 객관적인 과학적인 검사를 위해
     
    1) 자유로우면서 실제 검사에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검사 진행 체계가 구성되어야 하고

    2) 검사를 특정 시간에 맞추는 것은 곤란하며, 다양한 검사를 할 수 있도록 시간에 제약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위원회 측이 이를 보장하지 않아 참여 자체가 특정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참가하지 않았다.
     
    또한 언론에서 <서울대 의대 연구팀> 또는 <서울대 법의학연구소>가 참여했다고 일부 언론에서 보도를 하였으나, 학회에서 확인한 결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연구소>는 어떠한 조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한편 <대한법의학회>는 2013년 8월23일부터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 관련 [감정위원회]를 구성하여 본 사건에 대한 법의학적 측면에서의 사회적 역할을 하고자 하였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역시 <대한법의학회>의 일원으로 이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언론의 오보에 <대한법의학회>는 강력히 시정을 요구한다.


    <경향신문>은 그나마 낫다.

    이 교수의 감식결과에 한 술 더 뜬 매체도 있다.

    <오마이뉴스>는 아예 장준하가 [암살] 당한 것으로 규정, “장준하 암살규명, 박근혜 대통령이 나설 차례”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오마이뉴스>는 이 교수가 혼자 감식한 사실은 확인하지 않은 채 “유해감식은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의 주도로 국내외 법의학자, 범죄학자 등이 참여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음모론]도 튀어 나왔다.
    기자회견 당시 안경호 국민대책위 조사관은 이런 요지의 말을 했다고 <오마이뉴스>가 전했다.

    “…국민대책위의 안경호 조사관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유신 정권 하에서 일어난 사건들, 즉 김대중 납치살해기도사건(1973), 최종길 교수 살해사건(1973), 인혁당 사법살인(1975) 등을 열거하며 장준하 선생 역시 당시 박정희 권력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밖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시절의 의문사 사건들이 많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 교수의 발표 하나로 1970년대 초반을 [암살의 시대]라고 규정하며 그 [배후]에는 [유신 독재자 박정희가 있었다]고 결론을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장준하 특별법]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게 [대통합]이고 [대탕평]이라고 주장했다.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서는 특별법이 만들어져야 하고,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협조가 필요하다.
    이 일을 할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가오는 4월과 5월 제주와 광주에 찾아가 역사와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이것이야말로 대통합의 길이다.…”


    3월 29일 <미디어오늘>은 [장준하 타살]을 기정사실로 규정한 [추모제] 기사를 냈다.
    제목도 [38년 만에 타살 입증 장준하 선생 추모문화제 열려]라고 달았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추모제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원웅 前의원,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모두 이 교수의 [정밀감식 결과]를 신뢰하며
    “박정희 대통령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믿고 있었다.

    <미디어오늘>이 전한 백기완 씨의 추모사다.

    “사실이 밝혀지면 사실을 왜곡시켜 왔던 거짓말, 위선, 독재, 억압 그 못된 反민주적인 문명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장준하 선생을 참혹하게 학살한 자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증거가 드러났으니 이제 국가 권력을 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 참혹한 살인 행위를 낱낱이 밝힐 의무가 있다.”


    김원웅 前의원은 “박정희는 듣는가. 우리는 당신이 숨어서 한 짓을 밝혀냈다. 이제 당신의 딸이 당신을 구원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 외치기도 했다.

    참고로 김원웅 前의원은 공화당 공채 7기로 정치에 입문한 뒤,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종신총통제를 연구하겠다”며 대만으로 유학간 바 있다.
    80년대에는 전두환 정권의 민주정의당에서 활약했다.

    민주통합당의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규명회>에서 활동 중인 유기홍 의원은 이런 주장을 했다.

    “뒷머리 가격에 의한 타살임이 명백해졌다.
    이를 계기로 여야가 함께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3월 29일 <민중의 소리>는 이부영 前의원의 추도사를 전재했다.
    한때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이부영 前의원은,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자 당을 옮긴 뒤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현재 민통당 소속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조사 공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 前의원의 추도사 내용 중 일부다.

    “…선생님 스스로 드러내신 진실이 정밀감식 결과로 분명해졌지만 선생님을 보내드리는 것이 송구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선생님을 국립 현충원으로 모시는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고맙게도 파주 시장께서 선생님을 위한 추모공원을 조성하겠다는 후의(厚意)를 전해와 새로 유택을 마련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2012년 이장하는 과정에, 일제 식민지 통치 기간 보다 더 긴 실로 37년 만에 역사적 진실을 스스로 드러내셨습니다.
    스스로 드러내신 역사적 진실은 올해 38년 만에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과학적 규명을 거쳐 암살자들과 그 방조자들을 가려내는 과제만을 남겨놓게 되었습니다.…” 


    [사회주의 기독교]에 관심이 많던 한완상 前적십자사 총재도,
    3월 31일 <프레시안>에 기고를 했다.

    한완상 前총재는 YS시절인 1993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 상지대 총장,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장,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한성대 총장, 노무현 후보 사회담당 고문 등을 지냈다.
    盧정권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됐다.

    한완상 前총재는 <프레시안>에 보낸 기고문에서 아예 [돌망치]를 [흉기]로 지목했다.
    그의 기고문 중 일부다.

    “…그런데 이승만 문민 독재가 박정희 군사 독재로 바뀌면서, 참으로 얄궂게도 광복군 장준하 선생은 일본 장교 박정희 소장과 정면충돌하게 됩니다.…
    …선생은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획책할 때, 그리고 유신 체제 출범을 계기로 총통제 같은 영구 집권을 구체화해 나갈 때 광복군의 그 불타는 애국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더욱 용기 있게 맞서 싸웠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한 前총재는 김원웅 前의원에 대해서는 뭐라고 질타한 적이 없다.
    한 前총재의 기고문을 계속 보자.

    …유신 체제는 서둘러 추락사로 단정했지요.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터져 나왔다.…
    …묘소 이장을 위해 가족들이 묘를 열어보았다.
    그곳에 선생의 두개골이 입을 열어 타살된 흔적을 마치 모두 와서 꼼꼼히 살펴보라는 듯 저희들에게 속삭였다.
    아니, 37년간 은폐되었던 진실이 마침내 청천벽력처럼 소리치며 저희들에게 다가오셨다. 권위 있는 법의학자의 감식 결과 선생의 죽음의 진실이 마침내 밝혀지게 되었다.…


    …도대체 누구의 돌망치가 선생의 두개골을 그토록 선명하게, 동그랗게 함몰시켰을까? 한국광복군을 토벌하는 일에 광분했던 일본제국 군대 같은 폭력 세력이 떠오른다.
    바로 그들이 그 돌망치가 아니겠습니까.
    민족 분단을 고착·강화시키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했던 반민족적 세력이 바로 그 돌망치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자유권적 기본권과 생존권적 기본권을 존중해주면, 부패한 권력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반민주 세력이 그 돌망치가 아니겠습니까.

    <사상계> 같은 민주·민족·민중의 등불 역할을 했던 겨레의 월간지를 증오하고 두려워한
    반지성적·반민중적 세력이 바로 그 돌망치가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벌거벗은 권력으로 진실을 얼마든지 쉽게 훼손할 수 있고,
    그 진실을 감쪽같이 영원히 숨길 수 있다고 자신했기에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신나했던
    정치 테러리스트들이 바로 그 돌망치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울분]을 토하던 한완상은 뜬금없이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키며 “진상조사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종북좌익 성향의 정치인들이야 평생 이런 주장으로 [밥벌이]를 해 왔으니 [일정 부분]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세력]이 만든 문화 콘텐츠는 이미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게 <장준하 추모제>에서도 드러났다.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 응한 40대 주부와 초등학생 자녀의 말이다.

  • ▲ 지난해 대선 기간 동안 '독립영화'로 인정받아 정부지원 영화관에서도 개봉했던 '유신의 추억'. 역사자문을 한홍구, 서중석, 안병욱 교수 등이 맡았다고 한다.
    ▲ 지난해 대선 기간 동안 '독립영화'로 인정받아 정부지원 영화관에서도 개봉했던 '유신의 추억'. 역사자문을 한홍구, 서중석, 안병욱 교수 등이 맡았다고 한다.



    “지난해 독립영화로 <유신의 추억>을 아이와 함께 보게 돼서
    그 때 장준하 선생을 더 잘 알게 됐다.
    학교에서는 고대사 위주로 역사를 가르치는데 근현대사에서
    장준하 선생 등을 아이들이 기억한다면 역사 교육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근현대사의 일부분을 차지했던 분을 알 수 있어서 좋다.
    여기 나와 보니 사실감을 더 느낄 수 있어서 나중에 역사과목을 접할 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시민들]은 스스로 [사실]을 깨달았다고 믿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이 주부가 봤다는 영화 <유신의 추억>은 <다카키 마사오의 추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MB의 추억>에 이어 상영된 영화다.

    우파 진영에서는 이 영화가 유튜브에 게재됐던 동영상 <백년전쟁>처럼 [사실왜곡]을 교묘하게 숨기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주장영화]가 된 데는 이유가 있어 보였다.
    1987년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는 이정황 감독은 운동권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문과 고증은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께서 해준 덕분에 믿고 할 수 있었다.”


    이정황 감독이 이런 [역사자문]을 받아서인지 <유신의 추억> 상영 이후 관객들과 SNS를 나누며 “오카모토 미노루가 박정희 맞다”는 잘못된 [사실]을 알려주기도 했다.
    (오카모토 미노루는 박정희가 아니라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이라는 게 확인된 사실이다.)

  • ▲ 1975년 별세한 故장준하 선생.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 1975년 별세한 故장준하 선생.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지난해 대선 전부터 급격히 번지기 시작한 [박정희 깎아내리기]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영화 등 [문화콘텐츠]를 넘어 38년 전에 숨진 장준하의 유골까지 이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반공주의자]였던 사람을.

    말 없는 고인을 이용해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좌파와 부화뇌동하는 [깡통진보]들이 꼭 읽어봐야 할 자료를 첨부한다.

    다음은 <대한법의학회>가 2013년 1호 학회지에 낸 <[장준하 사건] 대한법의학회 감정보고서>다.


  • ▲ 1975년 별세한 故장준하 선생.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