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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이승만이 조작"..北 "아니다, 우리가"

이승만-장개석 회담 정탐..국회 장악기도..국군 2개대대 월북시켜

김성욱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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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6-25 08:43 수정 2012-06-27 12:40

국회프락치사건- 北 97년 자인 “성시백의 공작”
 

박원순氏 등 “이승만 정권의 조작”주장

 김성욱 
  

 
소위 ‘통일혁명열사’ 성시백의 주요한 공작성과 중 한 가지는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1948년 5월10일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서 급진세력들이 남로당원들과 간첩의 사주를 받아 미군철수 등을 요구하며 국회를 장악하려 했던 일이었다.

검찰은 1949년 5월부터 6월까지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검거하여 그들을 남로당의 국회공작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구속기소했다. 이 사건은 15회의 공판 끝에 1950년 3월1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6.25남침으로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월북했다.

북한은 그간 국회프락치사건을 비롯한 남한 수사당국이 발표한 간첩사건들을 ‘고문조작사건’으로 일축해왔다.


이 같은 평가는 남한 운동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박원순 변호사는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으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 내의 반대세력인 한민당 세력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당했다”는 요지로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은 1997년 5월26일자 <로동신문>에서 “성시백이 1948년 가을부터 남조선 괴뢰 ‘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며 신문 한 면에 걸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요지는 이렇다.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국회부의장과 수 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외군철퇴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

국회프락치사건 등이 김일성의 첩자인 성시백에 의한 비밀공작이었다는 사실을 북한이 공식 시인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고문조작으로 비판받고 있는 여타 공안사건들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관련기사>

간첩 성시백, 국회프락치사건과 국군 2개대대 월북주도

6.25남침 직전에 많은 정보 보내...간첩 연루자 112명에 달해

1950년 6월 11일 발령됐던 군부대 비상경계령이 6·25 하루 전인 24일 0시 갑자기 해제됐다.
이에 따라 전 장병의 절반이 휴가와 외박을 갔고 육군본부 장교들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댄스파티를 즐겼다.
당시 38선 경비를 맡았던 경기경찰국은 인민군 사단들이 전선 인근인 경기 연천·전곡 등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수원·개성·양주에서 서장 회의를 열고 경계강화를 지시했던 때였다.
사정이 이런데도 우리는 왜 북한의 남침을 몰랐을까?

군번 1번인 이형근 육군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후 사정을 종합해보면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썼다.

그렇다면 적과 내통한 사람은 누구일까. 북한은 13년 전인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위 사진)에 그 미스터리를 풀 단초를 공개했다.

'민족의 령수(김일성)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란 제목의 한 지하공작원 이야기였다.

"그는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 조직선을 늘리고 적군 와해공작을 벌였다. 괴뢰 정부, 경찰, 정보, 남조선 미군부대와 장개석의 영사관까지 정보조직선을 그물처럼 펴놓았다."

북한이 밝힌 '그'는 성시백이다.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겉으로는 장개석 정부에서 일했지만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지하활동을 했다. 당시 그는 '정향백'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성시백은 중경 임시정부 요인들과 관계를 맺고 해방 후 김일성 직속으로 대남 사업에 파견됐다.

그는 남한에서 10여개 신문사를 경영하며 선전공작에 이용했다고 한다.
그는 1950년 5월 15일 붙잡혀 서울 함락 하루 전인 6월 27일 간첩죄로 처형됐다.

"성시백이 남한 전체를 쥐고 흔들었는데 박헌영패가 밀고했다. (사형당한) 그의 시체라도 평양 근처에 묻어주려 했는데…"라는 김일성의 말도 기사에 있다.

노동신문이 성시백의 공적으로 꼽은 것은 국회공작적군 와해공작, 정보공작이었다.

국회공작은 1949년 국회의원들이 미군 철수를 요구하다가 붙잡힌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는 운동권에서 이승만 정권의 고문·조작이라고 평가하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배후에서 포섭한 것은 바로 성시백이었던 것이다.

성은 남한의 정치·경제·군사 정보들을 모아 북으로 보냈다. 1949년 8월 이승만과 장개석 사이의 진해 비밀회담 내용도 들어있었다. 이는 장개석과 회담에서 통역을 맡았던 중국대사관의 김석민을 통해 빼낸 정보였다.

성은 미국대사관 직원이던 김우식을 통해 워싱턴 미 정부의 훈령과 기밀문서를 빼내 북에 보냈다.

오제도 검사는 성시백을 붙잡고 그의 집에서 찾아낸 비밀문서를 통해 국군 2사단 정보참모 김모 소령을 체포했다.
해군 진해통제부사령관도 그와 관련된 사실이 밝혀졌다. 1949년 춘천지역의 국군 2개대대가 월북한 사건도 그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성이 군부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에서 광복군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신문은 "성시백은 적들이 북침을 개시하면 우리 인민군대가 즉시 반격으로 남진(南進)의 길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여 적후방을 교란하기 위한 적구(적의 관할지역)공작에도 힘을 넣었다"고 기록했다.

북한은 그런 그에게 '공화국 영웅 1호' 칭호를 주고, 평양의 혁명열사릉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 <붉은 단풍잎>이란 7부작 영화도 만들었다. 성시백을 통해 6·25 때 미제의 침략을 분쇄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성시백 사건은 112명이나 연루자가 있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수사는 6·25 발발로 중도에 끝났고 연루자들도 대부분 재판을 받지 않은 채 탈옥, 월북해 구체적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

성시백의 가족은 월북했다. 막내아들 성자립은 2004년 북한에서 김일성대학 총장이 됐다.
이들의 일가가 2005년 8월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다.

6·25 전에 남한의 군사·정치 정보를 북에 보내고 6·25 직후 처형된 성시백.

하지만 성시백이 쳐놓은 '적구(敵區) 공작' 그물 속에 어떤 인물들이 포함되었고 국군 와해공작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광덕 예비역육군소장은 "성시백의 망령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조선일보 (2010.2.20)=뉴데일리 특약]

<관련기사>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의 말로(末路)

  김효선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사무총장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한지 사흘만인 6월 28일, 서울이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자 서울 거리는 인민군, 내무서원과 자위대원들, 그리고 남로당원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7월 4일, 서울시 인민위원회(현 서울시청건물) 2층에 마련된 노동당 중앙위원회 서울지도부 사무실에는 김응기·이주상·방학세·김창주·김춘삼 등이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을 집행하기 위한 실무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노동당 군사위원회의 결정이란 남한에 있는 요인들의 연행·체포 작전으로, 작전 명령은 일명 ‘모시기 공작’이며, 이 공작의 집행위원들은 김일성의 특별지시까지 받았던 것이다.
노동당 군사위원회가 ‘모시기 공작’을 결정하게 된 배경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미처 남쪽으로 피난하지 못한 주요 정치인·종교인·경제인·문화인·기술자·관리·군인들을 찾아내서 포섭하는 데 있다. 군사위원회는 포섭대상을 다섯 가지 기준으로 분류했다.
첫째 부류는 북한 정권의 수립에 참여한 남한의 정당과 단체로 1949년 6월 25일 남북한의 좌익 성향의 단체로 결성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조국전선)에 가담한 정당과 단체에 속했던 잔류 인사. 둘째 부류는 남한의 행정부와 국회, 정당, 사회단체에 잠복해서 활동하던 북한의 프락치와 이에 동조한 자. 셋째 부류는 1948년 4월 남북 정치협상에 참여한 정당·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 즉 김구의 남북연석회의 참가자 및 개인. 넷째 부류는 자수 또는 자발적으로 협력해 오는 자. 다섯째는 연행 또는 체포해야 할 인사들이었다.
방학세는 ‘모시기 공작’의 작전조직을 정보 수집·확인 그룹, 모시기 그룹, 연행·체포 그룹, 감찰 그룹, 심사 그룹, 보장 그룹 등으로 구성하자고 제안했고, 김춘삼은 대상들의 소재 확인이 가장 중요하다며 ‘남로당원과 성시백 조직선의 관계자’ 가운데서 반동적인 정당·단체, 관공서, 경찰 등에 들어가 공작했던 동무들의 협조를 얻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이 날 회의에서 ‘모시기 공작’을 위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 공작 그룹 지휘부는 정부국이 자리 잡고 있는 건물의 3층에 둔다
• 합동대 지휘부는 성남호텔(현 광교 부근)로 정한다.
• 당 조직에서 협조 인원을 보장받는 문제는 이주상이 책임지고, ‘모시기 공작’의 전반적   지휘는 방학세가 맡는다.
•작전순서는 사전에 정보를 수집·확인해 소재를 파악한 뒤, 정보를 종합·평가하고, 이에 따라 모시기, 연행, 자수 또는 체포 등을 대상에 따라 구체적으로 결정하며, 대상자들을 일단 성남호텔로 집결시켜 개별심사를 실시하고 나서 자기 집에 연금하든지, 아니면 정해진 장소에 따로 또는 단체로 연금하거나 구속·감금한다.[이태호 저 / 신경완 증언(전 북한조국통일 민주전선 부국장 정무원 부부장),「압록강변의 겨울」16p.]

이렇게 결의한 이들은 드디어 작전을 개시하였다. 7월 5일, 방학세가 머물던 종로에 있는 건물 2층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권태양, 안우생, 김용관, 임백, 김기환, 홍기무, 이찬영, 김약수, 공기찬, 김병환, 권태희, 박흥문, 조성국, 노일환, 황윤호, 이문원 등으로 노동당 중앙당 서울 지도부 이주상이 보낸 것이다. 이주상이 보낸 사람들은 한국독립당·민주독립당·민족자주연맹·국민당·한국민주당 등 우익 정당과 국회를 비롯한 통치기관에서 남로당 또는 북로당의 성시백 조직의 프락치로 공작했던 사람들로, 요인들에 대한 정보와 소재 등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 40여 명의 남자들은 자신이 속해있던 조직의 수뇌부나 친지 등 낯이 익은 인물 가운데 거처를 알고 있거나, 수소문해서 알 수 있거나 정부를 수집할 수 있는 대상자들의 간략한 인적 사항을 기록해 방학세에게 넘겨줬다. 명단을 넘겨받은 방학세는 극비리에 작전을 짜서 이튿날인 7월 6일, 30개 전문 공작조, 수백 명의 전문 정보요원과 협조자들, 그리고 각 내무서원 들에 의해 ‘모시기 공작’은 시작됐다.
김규식의 비서였던 권태양은 정보요원 2명과 함께 김규식을 비롯한 민족자주연맹계 인사들의 소재를, 안재홍과 관계가 깊은 권태희와 2명의 정보요원은 안재홍을 비롯한 국민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조소앙의 비서였던 김흥곤과 정보요원들은 조소앙과 사회당 및 한국독립당계 인사들의 소재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김옥주, 강욱중, 김병회, 황윤호, 최태규, 신성균, 배중혁, 이구수 등은 형무소에서 탈출해 집에 있다가 연락을 받고 자진 또는 권유에 따라 출두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요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에 협조했다. 이들은 참여파 잔류 인사들로, 이들 대부분은 서울이 점령되자 자진 또는 권유에 의해 자기 계통의 조직을 찾아나서 노동당 통일전선부와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에 등록한 자들이로 납북인사들과 함께 북으로 갔다.

북으로 간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약수 1964년 1월 10일 사망,
노일환 국회 반민족행위처벌특별조사위원회 특별검찰부 검찰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박윤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강욱중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김병회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1987년 10월 사망.
황윤호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최태규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신성균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1967년 5월 8일 사망.
배중혁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이구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권태양 김규식 비서, 좌우합작위원회 서무부장 역임
황윤호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이문원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복역

그러나 종북좌익세력들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 청산작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국회프락치사건을 터트려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을 간첩혐의로 체포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위축시키고, 경찰의 특위 산하 특경대 습격으로 반민특위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반민특위를 와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해괴한 것은 두산백과사전에는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투옥 중이던 관련 의원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출옥하여 사라졌다고 기술해 놓았다. 출옥하여 사라진 것과 월북 혹은 납북 ㅡ 이들의 행적으로 본다면 납북이라는 용어가 합당한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을 월북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다. ㅡ 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모르지 않을 자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거나 혹은 이미 사망한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내에서 발간되는 백과사전에는 출옥하여 사라졌다고 기술해 놓았다. 무엇인가 감추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면 소위 대한민국 최고의 백과사전에 거짓을 기술해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백과사전마저도 이렇듯 왜곡이 심한 터에 초·중고교와 대학의 역사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무튼 자진 합류자들인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과 납북인사들은 1951년 9월 10일, 평양 교외인 대동군 시족면 성문리와 철봉리로 이동했다. 납북된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를 비롯한 임정요인과 관련자들은 철봉리에 거처가 마련됐고,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과 전직 국회의원들은 성문리 저수지 아래에 있는 마을과 철봉리, 장수원 등으로 분산하여 거처가 정해졌다.
이렇게 납북인사들은 여러 부락에 흩어져 기거했고,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은 대개 이렇게 흩어져 있는 납북인사들의 집집마다 한 사람씩 끼어 있었다. 북한 정보국 요원들은 수시로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같이 기거하고 있는 납북인사들의 동태를 물었다. 이에 대해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남로당 비밀당원으로서 국회에서 큰 활동을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기 때문에 북에 오면 큰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라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남북인사들의 동태를 밀고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고 하니 그들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었던 모양이다.[동 저서 116-117p.]
그러나 지금도 종북좌익세력들은 국회프락치사건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이승만의 음모라고 선동하며, 건국대통령과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며 폄훼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 왜곡된 역사교육을 받은 이 땅의 청소년들은 왜곡된 사실을 오히려 진실로 알고 있다. 심지어는 일부 몰지각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들마저도 종북좌익세력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건국세력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진정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투쟁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맞는가?
당신들은 선열(先烈)들이 무엇 때문에 꽃다운 청춘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했는지 아는가? 당신들의 오만이 진정한 독립투쟁가들의 후손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으며, 자주독립국 건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명예를 더럽히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종북좌익세력들과 부화뇌동하는 경거망동을 삼가며,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더 이상 더럽히지 말기를 바란다.
지금 당신들이 누리는 자유는 누구에 의해 주어졌는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바탕 위에,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영도(領導) 아래 소련의 팽창 야욕을 분쇄한 반탁·반공운동과 한국민족 역사상 최초의 5·10 총선거 과정에서 2,089명의 꽃다운 청년들이 목숨 바쳐 피 흘린 제단 위에 건국된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경거망동을 삼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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