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포커스로 보내 온 러시아 망명 탈북자의 편지

    "내 조국은 대한민국입니다."
    서영석 기자 /뉴포커스

    러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평양 토박이 이성호(가명)씨. 이성호씨처럼 왜 수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 정착에 실패하고 제3국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을까.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뉴포커스>는 이메일로 이성호씨와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남한을 떠난 사연에 대해 그동안 할 말이 많았는지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본지는 이성호씨의 동의를 얻어 그의 편지(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일부 북한식 표현들을 수정)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희망찬 망명생활을 꿈꿨지만...'

    저는 평양 태생인데 러시아에서 일하다가 1997년 한국으로 들어온 북한 사람입니다. 2년 동안을 러시아에서 숨어 살면서 어렵게 한국으로 망명했죠. 북한에서는 알아주는 군사정보대학도 나왔고 불어와 영어, 러시아어 이렇게 세 개의 언어도 구사할 줄 아는, 남한 식대로 표현한다면 북한 엘리트였습니다. 
      
    저에게 러시아인 처가 있습니다. 제가 러시아에서 숨어 살며 고생할 때 제 살점처럼 도와준 러시아 여성이었습니다. 저는 그녀를 기어이 한국으로 불렀고,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정식 결혼이라기 보다 구청에 결혼 신고 정도만 하고 같이 살았습니다. 아무튼 그녀가 내 곁에 있어줘서 감사했습니다. 
      
    제가 처음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작한 일은 북한 음식점 자영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돈 벌이는 고사하고 몇 천만원 되는 신용보증기금의 지원금까지 까먹고 실패하고 말았죠. 그 이후 삼성동의 벤처회사에 들어가 러시아팀 팀장을 하면서 2년 정도는 정말 열심히 벌었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도 2년을 못 가서 문닫고 말더군요. 결국 다음에 들어간 회사는 일산에 있는 무역회사였는데, 삼성동 벤처회사에 있을 때 중국팀 팀장이었던 회사동기생의 형님이 운영하는 회사였습니다.

    그곳에서도 러시아 무역으로 실적도 내면서 괜찮았는데 그때 딸이 태어났고, 아기가 생기니까 어려움들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러시아 출신이라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내의 고생이 너무 커 결국 그 잘나가던 무역회사를 스스로 퇴직하고 6개월 동안 아내와 애를 돌보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살게 된 것이죠. 그래도 틈틈히 막노동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북한 사람이라 마음껏 밖에서 벌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때는 서울에 친인척 하나 없는 우리가족이 얼마나 슬퍼 보이고 외로워 보이던지...

    애가 좀 크자, 구직해야겠다고 알아보던 중 강남구에 있는 한 엔터테이먼트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들어간 것이 아니고 꼬드김에 넘어간 셈이었지요. 당시 회사에서는 자금을 대고 회사직원들의 집을 다 안산으로 옮긴다고 하더군요. 그때 제 아내는 뭔가 석연치 않다고 가지 말자고 했지만, 저는 사장이 꽤 끔찍이 저를 생각해주는 것 같아 너무 고마웠고, 일단 회사에 들어간 만큼 회사에서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정부에서 준 방화동의 임대아파트를 빼고 안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사장이 제 노임을 높게 책정해주면서 대신 제가 가지고 있는 신용카드를 회사 명의로 이용하자고 했습니다. 뭐 별로 의심 없이 4개의 카드를 넘겨주었고 사고는 거기서 터졌습니다. 회사에서 자금을 대고 구매한다고 한 빌라도 결국 제 명의로 7,000만원 대출로 구매했고, 회사에서 쓴다고 하던 제 카드로 두 달 동안에 약 4,000만 원 정도 쓰고 대금을 지불하지도 않은 채 사장이 부동산관련 사기를 쳤습니다. 결국 사장은 4억원을 횡령한 죄로 감옥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었고, '내가 찾아온 남한이 이런 사회였나' 하고 갈팡질팡을 많이 했습니다. 내가 탈북한 이유에 대해서도 갈등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어쨌든 그 카드대금 막아보겠노라 다시 카드대금 지급 대출을 받고 여러 가지로 애쓰다가 결국 빌라 구매 대금연체까지 더해져 더는 한국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일부러 저지른 일이 아니라 사기라고 경찰에도 찾아가고 카드사에도 가서 설명했지만, '카드를 빌려준 것이 죄'라고만 하더군요. 그 후, 매일 카드사에서 전화 오고 집 압류한다는 압력에 많이 시달렸습니다. 그때 마침 러시아에서 장모님도 와있었는데 차압이 들어오면 정말 망신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게 생각되던지...

    조금 있으니 가차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 '실용불량자'라는 딱지가 붙더군요. "에라 모르겠다. 옛날에는 카드란 말 조차도 모르고 살았는데..." 그렇게 다시 체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더 견디지 못하고 빌라는 새 가구 가전제품 그대로 다 합쳐서 700만 원에 넘기고 보따리를 싸고 말았습니다. 그게 2003년 겨울이었고, 딸 놈이 겨우 한 살 반 되던 해였습니다. 아내가 한국 실정도 잘 모르고 말도 몰라서 다행이지 한국 여성이었다면 과연 저와 함께 계속 살았을지 생각만 해도 그 광경이 뻔하게 떠오릅니다.
     
    '좌절을 딛고 일어선 새로운 시작'
     
    아무도 없는 한국에 왔다가 아무도 모르게 그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신용불량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결국 1억이 넘는 빚을 떠안고 무작정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장모님네 댁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새벽에 보따리 몇 꾸러미를 잔뜩 지고 딸은 아직 어려서 어미 잔등에 업혀 자고 있는데 열차에서 내렸더니 웬 눈보라가 그리 사납게도 몰아치는지.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이 얼마나 슬프던지.
     
    저는 장모님댁 시골에서 두 달을 백수로 허송세월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건 아니다는 생각으로 가지고 온 700만 원 중 장모님께 200만 원을 드리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주 소재지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단 월세 20만 원짜리 단칸 방 얻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였는데 화장실과 부엌은 공동이고, 각 방은 세 가족이 따로 사는 정말 불편한 생활공간이었지만 제 신세에 별 재간 없이 그런대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목재사업을 시작했고, 한국에서 주문을 받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 안정되자 한국산 중고차 장사도 하고, 열심히 일했더니 결국 6개월 만에 2층까지 건설된 새 아파트 청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서 한화로 약 2,300만 원을 내고 38평짜리 새 아파트를 장만하게 되었지요. 정말 그 기간 저는 열심히 일하고 고민하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나를 남편으로 그리고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아내와 딸을 위해서라면 그까짓 거 고생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더군요.

    집을 장만하고 나서 한창 안정된 생활 속에서 중고 자동차 장사를 죽어라고 했더니 두 달 후에 집에 멋진 한국산 자가용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중고 자동차 장사를 하면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 육로로 2,0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직접 17시간씩 운전해서 몇 십 번을 왔다갔다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생한대로 대가도 좋고 벌이도 참 좋았죠. 그렇게 러시아에서 6년을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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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족의 뿌리는 어디에...?'

    나에게 대한민국은 무엇이냐구요? 그래도 조국이지요. 조국이어서 제 딸 이름도 한국 식으로 지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지금 7살 되는 큰 딸은 제가 한국에서 이설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李)는 전주 이씨 성이고, 눈이라는 뜻의 설(雪)은 러시아를 의미하고, 아름다울 미(美)자는 한국을 의미하는, 결국 '북한-러시아-한국' 세 개의 나라를 의미하고 연결하는 나름대로의 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나 지금 8달 밖에 되지 못한 작은 딸은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또 현재 상태로는 러시아 공민권을 가지는 것이 유리할 것 같아 러시아식으로 이름을 짓게 됐습니다. '리 소피아 연일예브나'라는 특이한 이름이죠. 리는 제 성이고 소피아는 이름이고 연일예브나라는 것은 부칭인것이죠.

    제 아내 이름은 도브골 엘레나 이와노브나, 제 이름은 이성호(가명) ,제 장모님 이름은 장 지나이다 이와노브나. 우리 집안의 이름은 세 가지 성, 즉 '중국-한국-러시아' 세 개의 나라가 섞인 성이고, 이름 역시 세 개 나라가 섞인 이름이 되고 말았네요. 피도 세 개 나라가 섞인 피가 되었고요. 제 부모님들은 북한 태생이고, 아내 아버지는 러시아, 어머니는 중국인 그래서 제 딸들은 세 개 나라의 피가 섞인 혼혈 2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라고 해야 장모님까지 기껏 5명인데도 공민권은 서로 다 다릅니다.

    저는 대한민국 공민(본적은 북한 평양).
    아내는 러시아 공민.
    장모님은 중국 공민.
    큰딸은 대한민국 공민.
    막내딸은 러시아공민.

    참 세상을 돌고 돌아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딸이 제게 물어보더군요.
    "아빠 나는 러시아 사람이야 아니면 한국사람이야?"
    "그건 왜 물어?"
    "유치원에서 애들이 자꾸 물어봐"
    «너는 당연히 한국사람이지» 무심결에 이렇게 대답했는데,

    딸이 또 물어 보더군요.
    «내가 한국사람이라면서 왜 나는 한국말을 몰라?»
    갑자기 뭐라 답변할 수 없는 순간이 지나자 대뜸 코등이 시큰해졌습니다. 딸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 살 반에 러시아로 들어와 결국 한국말을 배우지 못한 것이죠. 이제는 '딸도 다 컸구나' 하는 생각과 그 이후로부터 '우리 가족은 과연 뿌리가 어디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겁도 나고요. 저는 인생 절반을 살아온 사람이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자식들이 점점 커가면서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을 물어올까 하는 것 때문에...

    짧게 설명 할 수 없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중간에 있는 러시아 등, 정치와 사회와 인간들과 뒤섞여버린 인생의 역사를 어떻게 한마디로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마디로 설명은 되지 않겠지만요. 그래서 요새 가끔 생각하는 것이 '우리 가족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어떤 결론을 지을 수 있을까요? 지금도 아무도 없지만, 앞으로도 아무도 없을 그런 존재가 우리가족의 뿌리가 되는 걸까요?

    [국내최초 탈북자신문 <뉴포커스> www.newfocus.co.kr = 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