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이후 최대규모 非합법 사회주의 前衛(전위)조직 '사노맹' 출신
  • 4.11 총선에서 민통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殷秀美(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非(비)합법 사회주의 前衛(전위)조직이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의 핵심인물로 검거됐던 인물이다. 은 씨는 서울대 사회학과 2학년이던 1983년 시위를 벌이다 제적된 후 구로공단에서 미싱사 보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노맹에서는 정책실장 겸 중앙위원으로 ‘조 실장’(假名 조명혜)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1992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강릉교도소에서 6년간 복역했다. 당시 독방에서 4년6개월을 지냈으며, 이때 걸린 결핵 때문에 장까지 균이 퍼져 장을 50cm 가량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1997년 출소 후 서울대로 돌아가 1998년 학부를 졸업, 1999년 석사, 2001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2005년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유형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지도교수: 송호근)을 발표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문제의 논문은 노동 계급이 ‘민노당’을 통해 국회에 진출할 수 있었던 배경을 다룬 논문이다. 은 씨는 박사학위 취득 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운동론’ 등을 강의하며 주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뤄왔다.  

    사노맹은 武裝蜂起(무장봉기)로 대한민국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밝혔고, 나아가 조직원들에게 군사훈련까지 시켰었다. 조직원 자격기준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궁극적 목표로 하여 武裝蜂起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있는가” 등을 제시했다.

    사노맹은 또 자금마련을 위한 보급투쟁을 했는데, 이를 위해 조직원간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 확보, 친지 가운데 반동적 가정의 재산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착취한 돈이므로 특공대를 투입해 强-竊盜(강-절도)할 것, 동창·친지·운동권 전력자들을 대상으로 한 후원회를 구성할 것 등을 지시했다.

  • 사노맹은 1988년 12월~90년 8월간 1억1천8백4십만 원을 확보했고, 이 자금은 인쇄소 시설비, 유인물 제작비, 활동비, 아지트 운영비 등으로 사용했다. 사노맹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노맹은 무장봉기로써 대한민국 체제를 타도한 후 노동자 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소위 민족민주혁명을 이루어 민중공화국을 수립한 뒤, 제2단계로 반동관료, 독점재벌 등을 숙청하고 토지 기타 생산수단을 몰수, 국유화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어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 계급의 전위정당임…(하략)” (대법원 92도256. 1994.4.24)
     
    4.11 총선에서 민통당은 은 씨를 이른바 ‘비정규직 문제 전문가’로 영입했다. 2012년 3월22일자 <조선닷컴> 보도에 따르면 민통당 비례공심위 관계자는 “공심위 회의에서 노동문제 중 특별히 비정규직 문제를 다룰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은 후보의 이름이 나오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이어 “안병욱 위원장이 개별적인 루트로 인터뷰를 거쳤다”면서 “은 후보가 관련 정책 입안 능력도 탁월하다는 판단이었고 삼고초려 끝에 모셨다”고 했다.

    또 다른 민통당 관계자는 “사노맹 출신이긴 하지만 이미 사노맹은 그 주동 세력이 종말을 고하지 않았느냐”면서 “은 후보는 비정규직 분야 전문가로 민주당 주최 토론회에도 참석했었고, 黨 노동정책을 입안할 때도 참여해 인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김필재(金泌材)/트위터: https://twitter.com/#!/Iron_Alchemist3

    [주] 90년대 중반 안기부는 국내 左翼(좌익)세력을 총 4만2천명으로 파악했다. 구체적으로 대학 등 학원가에 1만8천명, 노동계 1만 명, 재야·종교단체 5천5백 명, 교육·문화·언론계에 8천5백 명이었다. 이들 중 핵심세력은 1만2천명∼1만5천명, 적극 동조세력은 3만 명. 이념성향별로는 주사파 등 NL계는 2만7천명, 사노맹등 PD계는 1만5천명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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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원만 3천5백 명에 달하는 '사회주의 전위조직'


    정리/金泌材

    ▲사노맹, 勞使현장에서 ‘공장의 혁명 요새화’ 주도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은 조직원이 3천5백 명에 달하는 남로당 이후 최대 규모의 非(비)합법 사회주의 전위조직이다. 1989년 11월 결성된 사노맹은 발족 직후부터 유인물을 배포한 것이 단서가 되어 3년 동안 대대적인 수사발표만 2차례나 이뤄졌다.

    이 사건은 1989년 11월 서울시경이 성균관대의 서울민주주의학생총연맹(서민학련)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사노맹 출범선언문을 배포하려던 학생을 적발한데서 단서가 잡혔다.

    경찰은 서민학련이 사노맹에 깊이 관련됐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 노동문학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고 관련자들을 속속 체포했다. 안기부는 1990년 10월 1차 수사중간발표를 통해 사노맹 핵심조직원 40명을 구속하고 총책 白泰雄(백태웅, 서울대 법대 4년 제적)과 사노맹 중앙위원이자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본명 박기평)등을 수배했다.

    안기부에 의하면 백태웅과 박노해는 1989년 2월 무장봉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지도할 노동자당을 결성키로 하고 민족민주혁명론(NDR)을 추종자들을 모은 뒤, 같은 해 11월 서울대에서 열린 전노협 주최 건국노동자대회에서 사노맹 결성을 공개 선언했다고 밝혔다.

    백태웅의 假名(가명) 이정로는 “이것이 정통정치노선이다”의 준말이고, 박기평의 假名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 해방’의 준말이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기반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훈련된 조직원을 각 사업장에 침투시켜 공장소조를 만들고, 세포분열식으로 조직을 확대하는 이른바 ‘공장의 혁명 요새화’를 꾀했다.

    ▲사노맹, 사회주의 혁명 달성 목표 삼아

    사노맹은 노사분규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배후에서 선동해 임금투쟁을 정치혁명투쟁으로 격화시켜 총파업으로 유도한 뒤, 결정적 시기에 봉기해 사회주의혁명 달성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한 1990년도 중점수행과제로 ‘사회주의혁명 선전 선동의 대중적 확산’, ‘노동자계급 주도 합법 민중정당 결성’, ‘전국 주요공장에 혁명적 사회주의자 공장소조 창출’, ‘학생운동의 노동자계급 동맹세력화’, ‘독점재벌 재산몰수 국유화’, ‘물가관리민중위언회 설치’, ‘농축산물 수입개방저지’ 등을 투쟁 슬로건으로 삼았다.

    사노맹은 또 레닌의 ‘黨(당)조직 건설원칙’을 모방해 중앙위원회를 최고지도부로 하고 그 밑에 조직위 ,편집위 각 市都(시도) 지방위를 두었다. 부설조직으로는 남한사회주의과학원, 노동해방연구소, 사회주의학생운동연구소, 민주주의학생연맹을 두었다, 조직원 파견그룹으로는 민중당, 전노협, 노동해방문학사 등을 두고 단위조직을 철저히 비밀 운영했다.

    실천지도부인 조직위는 조직관리와 재정을 전담하는 사무국과 조직수호, 면학, 유인물, 배포 등을 전담하는 연락국으로 구성되어있다. 연락국은 무장봉기를 위한 폭발물 개발, 무기탈취계획, 독극물 개발 등의 특수 임무를 맡았다. 지방조직으로는 서울을 비롯, 전국 9개 시도에 지방위원회를 두고 그 산하에 기획선전 담당부서 공장사업부 정파사업 담당부서를 설치해 정치-노동-종교계에 조직원 扶植(부식)을 꾀했다. 사노맹은 각 분야 ‘혁명인자’를 물색해 자기소개서를 제출하게 한 뒤, 사상성 비밀활동 능력 등 50여 가지 기능에 따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 조직원으로 포섭했다. 이들은 1개월 내지 1년의 사상교육 체력훈련 등과 함께 ‘일상용어 음어화’, ‘철저한 안전관리’, ‘조직기밀유지’ 등 10대 조직보위수칙을 교육받았다.

    이들은 또 서울시내 오피스텔과 상가 등에 10여개의 安家(안가)를 확보해 놓고 수사기관의 수색에 대비해 가스총, 도검류, 쇠파이프, 염산 등을 비치해 두었으며, 검거 때 문서와 메모지를 즉시 소각 또는 삼키도록 하고 기밀유지를 위해 자살용 독극물 캡슐까지 개발했다.

    사노맹 조직원들은 조직자금 마련을 위해 1인당 3백만 원 내지 1천만 원씩 책임제로 모금하고, 친지 집을 상대로 强竊盜(강절도)를 하거나 위장결혼식으로 축의금을 받아 속셈학원, 비디오테이프 가게 등을 운영했다.

    사노맹은 혁명이념의 대중적 확산을 위해 합법적인 월간지 《노동해방문학》과 출판사 노동문학사를 설립, 1989년 4월~12월까지 15만여 부의 선전 책자를 발간했다. 백태웅은 이정로라는 가명으로 《노동해방문학》에 <식민지 반자본주의론에 대한 파산선고>, <사회주의 위기의 근원, 고르바쵸프 개혁노선의 우편향 비판> 등 논문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이 월간지에 <파업에 나선 노동형제들에게>, <김우중 회장의 자본철학에 대한 전면비판> 등 시와 평론을 기고했다. 박노해는 1989년 4월 《박노해 시인의 긴급 호소》라는 유인물에 “현실적 통일방안을 가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내용의 <존경하는 김주석>이라는 詩를 게재해 국보법 위반 혐의로 수배됐다. 박노해의 부인인 金眞珠(김진주)는 한승호라는 假名으로 《노동해방문학》에 “노선 없는 실무가가 주도하는 노동조합운동의 경향성을 비판하다”등의 글을 기고했다. 사노맹은 非합법 지하기관지 《한걸음 더》, 《새벽바람》과 유인물 《긴급전술 결의》등 40여종 20만부 가량을 제작, 전국 대학과 노동현장에 뿌렸다.

    사노맹은 각 운동단체를 VDR(민족혁명) 노선으로 통일하기 위해 민중당, 인민노련, 전노협, 가톨릭대학생연합회 등에 조직원을 침투시켜 ‘정파투쟁’을 전개하고 《노동자신문》,《말》지 대학신문 등의 기고문을 통해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이념 전파 및 타 정파와의 사상투쟁을 벌여왔다. 또한 ‘공장의 혁명 요새화’ 원칙에 따라 무장봉기 때 방위사업체인 창원공단 내 (주)통일과 한국중공업을 무기탈취 대상으로 선정했다. 인천지방위원회에서는 사제폭탄 제조법, 총기제작법, 무기탈취방법 등을 연구하며 무장봉기 계획을 세웠다.

    ▲총책 백태웅, 중앙위원 박노해 검거로 와해

    사노맹 중앙위원 박노해는 1991년 3월, 중앙위원장인 백태웅은 1992년 4월에 다른 조직원 30여명과 함께 각각 검거됐다. 백태웅의 경우 검거되기 5일전인 24일, 박노해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박노해는 1991년 9월 1심 선거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2월 2심 선거공판에서도 역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백태웅의 검거로 사노맹은 조직이 사실상 와해되고 사건수사도 일단락됐다. 안기부는 백태웅을 검찰에 송치한 1992년 5월 사노맹이 전국의 공장과 대학에 훈련된 조직원들을 침투시켜 결정적 시기에 정부를 폭력으로 뒤엎고,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하려 한 지하혁명 조직으로 드러났다고 추가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안기부 발표에 따르면 사노맹은 고교생들까지 포섭,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등 남로당 이후 최대 조직으로 파악됐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또 사노맹이 1994년까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을 결성한다는 중간목표 아래 공장을 ‘혁명요새화’ 할 목적으로 서울, 부산, 광주 등 전국 16개 지역의 69개 공장에 조직원 3백여 명을 침투시켜 공장소조라는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어 폭력 파업투쟁과 정치투쟁을 유도했다고 발표했다.

    사노맹은 조직의 안전을 위해 조직의 이름을 일반 회사식 이름으로 불렀다. 예컨대 사노맹 중앙위원회는 대우자동차, 수도권위원회는 제일물산, 영남위원회는 삼테크, 호남위원회는 한양교통 등으로 부르고, 조직원의 직책도 실장, 부장, 과장 등으로 불러 외부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

    사노맹 사건 관련자들 중 玄廷德(현정덕, 사노맹 연락책)은 징역 8년을, 박노해의 부인인 김진주는 징역 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유죄판결을 박은 사노맹 관련자들은 김대중 정권이 출범시기인 1998년 8.15 특사 때 백태웅, 박노해, 남진현이 석방되어 전원이 자유의 몸이 됐다. 백태웅과 박노해는 2008년 12월22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