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진화포커스 제79호
    ‘선진국 필리핀’, 전설이 된 이유
    배 진 영   월간조선 기자(차장대우)
     

    ADB본부가 마닐라에 있는 이유

    친구 L이 오래간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고교 동창 K의 전화번호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K와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예전 재정경제부에 근무하다가 오래 전에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옮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K는 ADB에 있대.”
    “ADB?”
    “아시아개발은행. 아시아판 세계은행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게 어디 있는데?”
    “필리핀 마닐라.”
    “야, 걔는 왜 하필이면 그런 꼬진 데 가 있냐?”

    L에게는 ADB같은 국제기구가 필리핀 마닐라에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ADB는 1963년 아시아극동 경제위원회(ECAFE: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의 전신) 각료회의에서 논의되기 시작했고, 1965년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설립 협정이 조인됐다. ADB가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66년 12월. 당시 필리핀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그래서 ADB본부가 마닐라에 있게 된 것이다. ADB가 마닐라에 들어서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지만, L은 필리핀이 한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다는 게 실감이 가지 않는 눈치였다.

    1960년대 중반에 주(駐)필리핀 대사로 나간 어떤 분은 필리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필리핀은 한국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 중 하나고, 6·25때도 군대를 파병해 도와줬다. 앞으로도 우리 필리핀은 후견자라는 생각으로 한국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돕겠다.”

    5년 전 필리핀에 여행을 갔을 때에는 가이드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기도 했다.

    “1966년엔가 박정희 대통령이 식량증산을 위해 볍씨를 얻으러 필리핀을 방문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만 해도 필리핀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았어요. 박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을 만나려 했지만, 마르코스는 만나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필리핀 농림부 장관을 만나서 볍씨만 얻어가지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일행은 “아,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
    아마도 1966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월남전 참전 7개국 정상회담 때 박 대통령이 마르코스 대통령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던 사실과 필리핀에 있던 국제미작(米作)연구소가 통일벼 개발에 일조했던 사실 등이 묘하게 섞이면서 생긴 일종의 야담(野談) 아닌가 싶었다. 사실과 다르지만 이 이야기도 과거 한국과 필리핀의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다.

    한국과 필리핀의 역전

    이런 얘기도 있다. 1960년대 초, 국내 유력일간지에서 ‘특파원’을 내보냈다. 사주(社主)와 편집국 간부들까지 공항으로 나가 ‘국내 최초’로 외국에 나가는 그를 환송했다. 나중에 귀국한 그는 “높은 빌딩들이 들어서 있고, 거리는 깨끗한 부자나라” 기사를 썼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되려나’하는 선망(羨望)을 가득 담아서. 그가 말한 ‘부자나라’는 바로 필리핀이었다.

    하지만 한국과 필리핀의 경제력은 머지않아 역전되기 시작했다.
    세계은행(IBRD) 통계를 보면, 5·16이 일어나던 1961년 한국의 1인당 GDP는 92달러였다. 같은 해 필리핀의 1인당 GDP는 260달러였다. 하지만 1969년 한국의 1인당 GDP는 239달러를 기록, 237달러를 기록한 필리핀을 앞질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1979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747달러, 필리핀의 1인당 GDP는 587달러였다. 美CIA 자료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2만300달러, 필리핀은 1,900달러였다.

    이러한 역전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면서 피와 땀과 눈물을 바친 ‘위대한 세대’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라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면서 국민들의 노력을 하나로 모은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흔히 이런 소리를 한다.

    “그런 독재를 하면, 누군들 그런 업적을 이루지 못하겠나?”

    하지만 필리핀의 마르코스는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긴 21년 간, 말 그대로 독재를 하고서도 ‘아시아의 부국’ 소리를 듣던 필리핀을 후진국으로 전락시켰다.
    또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는 당시 세계경제의 흐름을 잘 탔을 뿐이고, 냉전 체제 아래서 미국의 원조와 시장개방의 덕을 보았을 뿐이다.”

    미국에 줄을 잘 선 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100년 전부터 미국 뒤에 줄을 섰던 필리핀은 왜 경제발전에 실패했을까?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시 한민족의 자질이 우수하기 때문에…”

    그럼 같은 한민족이 살고 있는 북한은 왜 저 모양 저 꼴인가?

    지도자가 나라의 운명을 가른다

    박정희 대통령을 위인으로 칭송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히딩크라는 명장(名將) 밑에서 월드컵 4강까지 진출했던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이 그 후에는 월드컵 16강 진출도 버거워하고 있다. 한때 1류로 꼽히던 신문사가 2세들이 CEO가 되면서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반면에 다 망해가던 회사가 오너가 바뀐 후에는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선 경우도 있다.

    금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제18대 대통령선거가 있다. 벌써부터 표(票)만을 노린 포퓰리즘, 아니 ‘표(票)퓰리즘’이 난무하고 있다. 거기에 솔깃해 ‘자격이 없는 자’들을 국회의원, 대통령으로 뽑았다가는 필리핀처럼 나라가 기울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남미나 최근 그리스 등의 사례에서 수없이 보아 왔다.

    ‘자격 없는 지도자’들은 ‘포퓰리즘’을 내세운 정치로 사회적 분열을 일으키거나 국가 자원을 낭비하도록 부추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그들을 찍어준 국민들 몫으로 남겨진다.

    누구를 국회의원, 대통령으로 뽑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그리고 나 자신과 자식들의 운명이 갈라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