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란트도 콜 수상도 "내생전에 통일 못 볼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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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週 전 브란트, "통일은 멀었다."
1년 전 콜 수상은 "통일은 판타지의 領域"이라고 비아냥.
趙甲濟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년 뒤 독일이 통일되기 직전 콜 서독 수상, 브란트 전 수상을 비롯한 많은 독일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生前엔 통일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통일이 언제 이뤄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질학자들에게 친숙한 시간 단위로 논의해야 한다는 농담도 등장하였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기 바쁜 정치인들일수록 역사적 변화를 感知하는 데 무딘 경우가 많다.
*1984년 브란트 전 수상은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아무 실효가 없으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1988년 기민당 출신의 스투트가르트 시장 만프레드 롬멜이 "독일통일은 완전히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해도 정치적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1988년 10월 콜 독일 수상은 모스크바를 방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났다. 그 후 한 기자가 언젠가는 고르바초프가 독일에 통일을 제의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콜은 비꼬는 투로 답하였다: "나는 (영국인 소설가) 웰즈처럼 미래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질문은 판타지의 領域에 속한다."
*동독을 탈출한 사람들이 유럽의 서독 대사관으로 들어가 농성중일 때인 1989년 여름 서독 지식인들은 '이젠 공식적으로 동서독 통일의 포기를 선언해야 될 때가 온 것이 아닌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주간지 '슈피겔'은 카버 스토리로 왜 정부가 西獨 대사관을 찾는 東獨 사람들을 받아주느냐고 따졌다.
*1989년 8월15일 서독의 콜 수상은 기자들에게 "나와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은 지금 유지하는 우호 정책을 계속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유럽방문을 앞둔 1989년 10월25일 낮 12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청와대에서 빌리 브란트 서독 前 수상을 접견, 환담했다. 브란트 前 수상은 時事저녈의 초청으로 방한한 터였다. 당시 東歐에선 폴란드와 헝가리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끝장내고 복수정당제와 자유 선거를 시험하고 있었고, 동독에서도 反共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바햐흐로 공산권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이었다. 1970년대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교류 시대를 열었던 브란트 전 수상은 “독일의 통일과 구라파의 통합이 매우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통합이 이뤄진 다음에야 기대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구라파 통합은 그 과정에서 어떤 차질이 있을지는 몰라도 역사적 추세는 분명합니다. 서구의 통합은 中歐를 흡수해서 확대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독일 통일의 여건도 유리하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은 꼭 한 나라(One State)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역사상 독일이 단일국가였던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국가연합(confederation)의 형태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럽의 통합은 과거 George Kennan이 半유럽국가(Half-European Countries)로 불렀던 미국과 소련으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경우에는 동독이 민주화가 되면, 비록 그것이 서독과 똑같은 정도의 것이 아니고 비슷한 것으로라도 변화된다면, 통일의 가능성은 보다 희망적이 될 것입니다”
브란트가 독일 통일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한 불과 2주일 뒤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그 1년 뒤 (브란트가 생각하였던 중간단계 없이 바로) 완전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역사는 한번 구르면 가속도가 붙게 된다. 유식자층일수록 南北통일을 비관적으로 보는데, "통일이 도둑처럼 올 것이다"는 李明博 대통령의 말이 적중할지 모른다.
서독의 지도층은 통일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통일 준비는 철저하게 하였다. 李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어떤 준비를 하는지 모르겠다. 복지포퓰리즘은 국가 財政을 거덜냄으로 통일준비를 방해한다. 한나라당과 정부는 지금 反통일 노선을 취하고 있는 게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