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남 가족사진 건네며 "가족 죽는줄 알라",이응로는 백건우-윤정희부부 납치 연루
  • 윤이상의 범죄, 이젠 속이지 말자

    -북한 탈출한 오길남 박사 가족의 송환운동에 붙여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필자는 어렸을 적 매해 하기휴가마다 가족들과 통영에서 보냈다. 그래서 통영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통영은 낭만의 고장이고, 많은 훌륭한 예술가를 배출했다. 유치환, 유치진, 박경리,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윤이상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윤이상이 통영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추앙받고 있다. 원래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Isang Yun Competition)’로 진행돼오다 이름이 바뀐 통영국제음악제(TIMF)는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돼 몇 년간 성황리에 진행돼 왔다.

  • ▲ 강규형 교수ⓒ
    ▲ 강규형 교수ⓒ

    윤이상의 작품은 대중과 유리된 현대음악으로서 매우 난해하다. 그의 오페라 심청은 초연 후 오랫동안 재공연이 안됐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현대음악 작곡가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윤이상기념관에 가면 그가 “애국자”였다고 써있으며,  통영국제음악제재단 홈페이지에는 “현대음악의 거장 작곡가 윤이상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취지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화합, 화해의 세계를 추구한 그의 음악세계는 현대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가?

    지금 통영에선 잔잔하지만 심상치 않은 파문이 일고 있다. 통영시 소재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도서관 1층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는 통영기독교연합회와 통영현대교회에 의해 주관됐다. 거기에 있는 흑백 가족사진 한 장이 파문을 일으켰다.

    바로 이 사진이다.

  • ▲ 윤이상이 북에서 받아 오길남씨에게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주었다는 문제의 사진.ⓒ
    ▲ 윤이상이 북에서 받아 오길남씨에게 다시 북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주었다는 문제의 사진.ⓒ

    이 사진은 1991년 작곡가 윤이상이 다시 월북하라고 회유하기 위해,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함께 건네준 가족사진이다.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의 증언을 통해 이 사진의 배경이 수용소 내부라는 것이 확인됐다.
    신숙자. 1942년 12월 10일 통영 서호동 출생. 통영초등학교 45회 졸업. 통영여중 9회 졸업.’ (사진 설명)
    “(오길남박사의 두 딸) 혜원·규원 자매와 아내 신숙자씨는 1987년 말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갇히는데 이때 혜원 11세, 규원 9세였다.” (소개 팸플릿)

    놀랍게도 윤이상 때문에 지옥과 같은 요덕수용소 생활을 하는 신숙자씨도 통영사람이었던 것이다.
    윤이상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북한관련 실정법을 위반했던 것이다. 죄에 비해 형량이 가혹했고, 수사과정도 강압적이었다. 어찌 보면 그도 거칠었던 시대에 화상(火傷)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숭고한 민족사랑"을 가진 위대한 "애국자"는 결코 아니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자기도취에 빠지기 쉽고,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도 있다.
    윤이상은 당시 북한체제에 대한 호감을 갖고 비밀리에 북한 측과 긴밀한 교류를 해왔다. 위법행위였지만 예술가의 낭만 탓에 당시로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 부부는 북한을 자주 오가며 김일성과 주체사상 찬양의 노골적 나팔수역할을 했다.

    김일성을 "우리 역사상 최대의 영도자인 주석님"이라고 쓴 편지는 압권이다.

    더구나 독일 유학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친 오길남씨를 교수를 시켜주겠다며 가족과 함께 입북(入北)하도록 권유한 것은 심각한 경우였다.

    독일에서 활약한 북한의 고정간첩인 김종한의 권유와 주선이 있었고, 독일에 있는 유명한 음악가인 윤이상으로부터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하며 당신의 해박한 지식을 북에 가서 활용해 주기 바란다’는 서신을 받고 오길남은 입북을 결심했다. 부인은 적극 반대했지만 그는 입북을 결행했다.

    그러나 오씨는 약속과 달리 북한에 가서 대남 공작원으로 이용됐고, 북한체제의 실상을 알고 나선 탈출했다. 윤이상은 오씨의 북한 복귀를 강요하며 안 돌아갈 경우 "은혜를 베풀어준 주석을 배반"했기에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 "가족은 죽는 줄 아시오"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다 한다.

    오박사는 탈북 후 5년 동안 독일에 거주하면서 북한의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이상을 만나 그의 가족을 송환시켜 줄 것을 수차에 걸쳐 간절히 요청했다. 그러나 윤씨와 부인 이수자는 신씨 모녀 사진과 음성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북한에서 가져와 오씨에게 두 차례 전하며 재입북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윤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당신은 미제 고용 간첩이다. 은혜를 베풀어 준 김일성 주석을 배반했으므로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둘 수밖에 없다.”

    그리고는 다시 입북해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오씨 가족은 현재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다 한다.

    사진전의 그 사진은 윤이상이 오박사를 협박하면서 건네 준 바로 그 사진이다.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다.

    이것이 작곡가 윤이상과 인간 윤이상을 분리 평가해야 하는 이유이며, 그가 절대로 애국자가 될 수 없는 근거이다.

    역시 동백림 사건 연루자였던 이응로 화백 부부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당대의 은막(銀幕) 스타 윤정희 부부는 묘하게도 1972년 뮌헨에서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초연(初演)을 보러 와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 주례는 고(故) 이응로였다.

    그런데 1977년 여름 백건우 부부는 유고슬라비아의 자그레브에서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 (나중에 유령인물로 밝혀진) 한 스위스 부호가 백씨의 스폰서가 되고 싶으니 만나자는 거짓말로 이들을 유인한 사람은 놀랍게도 이응로의 후처(後妻) 박인경이라 한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백·윤 부부는 미국 영사관에 몸을 의탁해 극적으로 생환했다. 백씨 부부가 북한에 납치돼 당했을 일들을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몇 년 전 유고 공산당 문서가 비밀해제되면서, 이 사건 당시 유고 주재 북한 대사가 북한이 치밀하게 계획한 소행임을 인정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것이다.
    또한 여러 정황을 보면 이 화백은 아닐지라도, 그의 처는 납치 기도에 직접적으로 연루됐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응로씨 부부는 사건 조사를 거부하고 잠적했으며, 결국 한국 국적을 버렸다.

    그런데 그녀(박인경)가 어느 순간부터 한국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김대중 정부 시절엔 청와대에도 초청되는 귀빈 대접을 받았다.

    백건우 부부는 이에 놀라 납치 미수사건의 조사를 정식으로 요청했으나, 국가정보원은 철저히 수사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 버렸다.

    당시 국정원장은 "내 임기가 끝나 제대로 수사를 못했다"라는 어이없는 변명만 남겼다.

    자국민의 납치사건도 제대로 수사 안하고, 이 사건에서 결백할 수 없는 사람을 오히려 귀빈 대접한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루빨리 재조사가 이뤄져야 하며, 누가 조사를 방해했는지, 그리고 진상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야 한다.

    어차피 공소(公訴) 시효는 지났다. 진실을 역사에 남기자는 것이다. '죄지은 사람'이 있다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한 한국사 교과서는 윤이상과 이응로 등이 연루된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평화 통일 운동을 하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등을 간첩으로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가공(可恐)할 왜곡이다. 마치 부정선거를 감추기 위해 동백림사건을 조작한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윤이상과 이응로는 북한관련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지, '평화 통일 운동'을 했기에 구속됐던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이후 윤이상의 행동은 도를 벗어난 김일성체제 찬양 활동이었다.

    다시 통영 얘기로 돌아가자면, 통영 현대교회 담임목사 방수열씨와 그의 부인 소신향씨가 이 전시회를 주관하고 있다. 신숙자 모녀 생사 확인요청 및 구출 탄원서 서명운동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이 도와야 할 일이다. (서명에 참여하고 싶은 분들은 soosin153@hanmail.net 로 연락)

    통영에서 이런 전시와 운동을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방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평범한 목회자로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집사람과 이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혜원·규원자매 구명운동’은 이지혜(29·국제변호사, 부산 예양교회)씨 같은 사람들도 주도하고 있다.

    윤이상의 명예가 훼손되면 통영의 관광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걱정한다는 분위기도 있다니 이 얼마나 저열한 생각인가.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를 훌륭한 작곡가로 칭송하는 것도 좋다.
    필자는 음악을 무척 사랑하는 애호가이다. 아까운 국고로 지은 윤이상 기념공원도 그대로 둬도 좋다.

    하지만 예술과 인간의 행적은 분리하자. 더 이상 진실을 부정하고 허위에 기대지 말자.
    윤이상의 반인륜적인 행위를 알고서도 역사를 왜곡하며 그를 애국적 위인 취급하는 것은 이제 끝내야한다.

    그래야만 통영의 명예도 살고 통영국제음악제도 산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대학원 교수)


    강규형 교수 칼럼에서 언급된  오길남 박사와 그 부인(신숙자), 그리고 두 딸(혜원 규원)에 관한 책이 나왔다.

    도서출판 세이지에서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을 출간했다.

    [책 소개]

    1993년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자유문학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오길남 박사의 논픽션을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한 책이다.
    이 책은 독일 등지에서 반한(反韓) 활동을 했으나 북한에 대해서는 결정적으로 오판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린 '한국판 실화 파우스트'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은 북한을 접근하는 데 있어 진실을 추구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매우 가치있는 사실적 정보를 충분히 제공해 준다.

    [저자 소개]

    저자 오길남은 1942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 1970년 독일 튀빙겐으로 유학하여 1985년에는 브레멘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시 재독 반한단체인 ‘민건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980년에 독일에 정치망명을 했고, 1985년 12월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뜻하지 않게 ‘한민전’의 대남흑색방송 요원으로 활동했다.
    1986년 11월 재독 유학생 둘을 더 포섭하여 입북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유럽으로 나오던 중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을 통해 탈출했다.
    그는 몇 년간 독일에서 가족의 석방을 위해 애쓰다가 실패, 서울로 돌아와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을 지냈다.
    남겨진 아내와 두 딸의 행적은 함경남도 요덕수용소에서 보았다는 목격자에 의해 확인된 바 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행방도 소식도 묘연하다.
    아내 신숙자는 오길남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혜원은 1976년, 규원은 1978년생이다.

    [출판사 서평]

    한국판실화(實話) 파우스트

    저자 오길남을 인터뷰했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지(紙)의 우베 슈미트 기자는 그의 독일어 실력을 격찬한 바 있다. 한데 이 책에 구사된 저자의 모국어, 곧 한국어 실력이야말로 일품(逸品)인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준 높은 문체와 묘사력, 서술력, 그리고 탄탄한 구성까지 이 책은 한 편의 잘된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반드시 소설과 같은 허구적 작품이었어야만 했다. 만일 그랬다면 한 지식인의 편력과 좌절, 환상과 환멸,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처절한 희구를 수준 높게 구현한 작품으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이 책이 실화이고 체험담이며, 지금도 끝나지 않은 현실이라는 데 우리의 고통이 있다.

    이 책은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자유문학사)라는 제목으로 1993년에 첫 출간된 바 있다. 일본에서도 출간되어 상당한 부수가 팔려나갔지만 한국에서는 판도 쇄도 거듭되지 못한 채 오래 전에 절판되었다. 한국에서 오길남 일가의 비극은 그다지 큰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길남 박사의 남은 가족들의 행적은 1991년경 함경남도 요덕군 15호 관리소 곧 요덕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서 보았다는 증언을 끝으로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에 요덕 혁명화구역에서 출소했다 탈북한 사람들은 이들을 목격한 바가 없었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건너편 완전통제구역, 석방되지 않는 종신(終身) 유형지로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모두 살아있으리라고 믿는다. 다시 책을 출간함으로써 이들의 이름을 크게 불러주고 싶다. 그리하여 제목도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으로 고쳐 지었다. 안네 프랑크가 유태인 학살의 서글픈 상징이 되었던 것처럼 혜원이, 규원이를 크게 부르면 부당하게 박해 당하는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들의 존재를 세상밖으로 안내하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또 한 가지 재출간의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제의 측면에 있다. 이 책은 포괄적으로 말하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지식인의 존재 일반에 관해서, 그리고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사의 일부가 되기 원했던 지식인들의 실존에 관해서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에는 1970년대, 80년대 유럽에서 조국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제각기의 방식으로 조국 사랑의 방법을 구했던, 진지하고 엄숙한 지식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저자 오길남 역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실존 위에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도사리고 있었던 어둠의 실체에 대해 몇몇 사람은 너무 아둔했다. ‘날것 그대로의 악(惡)’ 앞에서 그들의 지성은 무력증에 걸린 것처럼 무너져버린 것이다.

    월북한 오길남이 북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남쪽에서 넘어온 철학교수, 외교관, 유학생 부부 등 다양한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다시 건너올 수 없는 환멸의 다리를 건너버린 이들은 오길남 부인 신숙자 여사가 표현한 대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다른 사람의 눈까지 찌른 채”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책은 한국판 <<파우스트>>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이렇게 말해준다. “여보게. 분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헤맬 수밖에 없는 법이라네.” 정말로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겪어보아야만 분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인들의 오판과 편력으로 인해 값을 치르는 이들은 곧잘 타인들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왜 순진무구하고 결백한 사람들이 어리석은 지식인들의 지적 허영의 결과로 무시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개인의 일만이 아니다. 지금 북한의 처절한 상황이야말로 그 많은 지식인들의 오판과 망집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바야흐로 역사의 황혼이 붉어질 때 지혜의 부엉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면 다시 어리석은 일들은 반복되지 않을 것인가? 긍정적인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별을 지도삼아 길을 갈 수 있는 시대는 행복하다’고 하였는데, 적어도 오길남의 시대는 필시 별이 더 이상 길을 지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근대(近代)라고 부른다. 한 때 루카치 자신도 그러했듯 공산주의 사상을 지도 삼았던 많은 근대 지식인들이 잘못 온 길을 계속 이어가고 있을 때, 오길남 박사는 삶을 통해 입장을 수정했다. 분별에 이르기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렀으나 근대 지식인 오길남의 비극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기 직전 파우스트 박사에게 손을 내밀어 구한 자가 누구였던가! 파우스트의 결말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라고 말한다. 남편 오길남은 물론, 무고하게 삶을 강탈당할 뻔했던 유학생들, 그리고 숱한 지식인들의 어리석음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신숙자 여사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표한다. 그녀의 일갈을 다시 옮긴다.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 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 나가세요.”

    [본문 발췌]

    pp.166~168
    ‘— 누구나 서 있는 자리보다 더 높은 곳을 모색하고 지향하는 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우격다짐으로 데리고 온 과오에 대해, 어떤 백치도 어떤 눈먼 장님도 저지르지 않을 잘못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당신이 내 남편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들이 짐승처럼 박해 받을 망정, 파렴치하고 가증스럽고 저열한 범죄 공모자의 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청순한 사람들을 음모의 희생물로 만드는 역할을 맡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돼요.

    자주니 평화니 민족 대단결이니 그럴싸한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피와 살이 되어야 마땅한 값진 것들로 전쟁 준비를 하느라 탕진하여 이곳 주민들은 허기져 있고 모두들 지쳐있어요. 사회주의라는 것도 아무런 내용물 없는 빈 껍데기나 베 쪼가리처럼 바람에 찢겨 펄럭거리는 허깨비에 불과해요. 무상 교육 제도, 무상 의료 제도 나발을 요란하게 불어대지만 모두가 다 빈 깡통이에요. 의약품도 없는데 무슨 의료 제도예요, 당신, 인민들에게 나눠 줄 볼펜 하나 변변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어 있다고 선전해대지만 치사(致死) 노동에 시달리다가 정년퇴직 하면 한 달에 20원씩 받아요. 필터가 달린 담배 한 갑 값이죠. 이런 땅이 지구촌에서 몇이나 되겠어요.

    이렇게 살려면 차라리 애들과 함께 죽겠어요. 당신 하나만이라도 빠져 나갈 수 있다면 우리 몫을 살아 줘요. 나는 애들에게 아버지는 바보스러웠지만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말하겠어요. 혜원 아빠, 당신 떳떳한 인간으로 살다가 죽어야 해요. 올가미에 씌워서 이리저리 끌려 다녀서는 한이 없어요.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나가서 석 달 안에 우리를 이곳에서 빼내 주세요. 그렇게 안 될 때 우리는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도록 하세요.

    더럽게 살아가는 생명은 존귀하지 않아요. 제발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못난 사람처럼 눈물 흘리지 말아요. 나와 혜원이 규원이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마세요. 우리의 몸은 이곳에서 죽겠지만 마음은 살아서 당신의 심장 속에 있겠어요. 백 번 거짓말하다 보면 한 번은 속아 넘어 간다고 보는 대남 사업 방송 기구의 앵무새 방송원 노릇하려고 반평생을 밤잠 설쳐 가며 공부했어요? 아니잖아요. 청순한 젊은이들이 당신으로 인해 이곳으로 유인돼와 치욕스러운 방송원 노릇을 강요당한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예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마음이 편하지 않을 거예요. 그 범죄 공모에 절대로 가담해서는 안 돼요.

    도망치세요. 우리야 무슨 죄가 있어요. 그래도 죽인다면 죽으면 그만이죠. 하지만 우리를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우리를 죽인다면 자기들의 체제가 병약하다는 걸 알리는 거예요. 그러니 함부로 죽이지 못할 거예요. 준이 엄마(송두율의 처)도 민중이 엄마(김종한의 처)도 앙큼한 여자들이에요. 나도 앙큼해져야겠어요. 독기 찬 저주를 독일에서 사는 여자들에게 보내고 싶지만 억제하겠어요. 다시 한 번 부탁해요. 정의를 사랑하는 순결무구한 젊은이들이 대남 공작 기구의 제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추악한 삶은 존귀하지 않아요. 혜원 아빠, 이 말 명심하세요‥‥‥나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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