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에 矜持를 가질 이유
한국 현대사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에 기초한 건국, 소련-중공-김일성에 의해 자행된 6.25 남침 격퇴, 산업화(5.16 이후), 민주화(4.19 이후)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일차적인 대단원을 이룩한 것이 1987년의 민주화 조치였다. 그 이후는 1960~1987년의 산업화-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업그레이드 하려는 진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추출(抽出)해 낼 수 있는 것-그것은 한국 현대사를 ‘성공사례’라 부를 만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첫째는, 충분한 여건이 없는데도 어떻게 당시 건국 리더들이 순수 자유민주주의 유형(類型)의 국가체제를 만들기로 했었느냐는 놀라움이다.
둘째는, 소련-중공이 밀어준 국제적 남침도발에 세계 최강국 미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행운과 외교력이다. 셋째는, 세계 최빈국 한국을 세계 12위 경제로 끌어 올린 선택과 의지와 베팅(betting)의 적중(的中)이다. 넷째는 민주화에 이른 무혈(無血) ‘명예혁명’의 성숙성이다.해방공간의 열악한 환경에서 우익 리더들은 우익독재로 좌익독재에 맞서야 한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다. 우익은 당시 절대적인 열세(劣勢)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주도한 우익 진영은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고 순수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정체(政體)를 선택했다. 현실정치는 물론 헌법조문과는 괴리(乖離)를 드러냈다. 이 괴리가 프랑스의 경우는 19세기말, 20세기초까지 100년 넘게 갔다. 한국의 경우는 불과 30년이었다.
6.25 남침 때의 미국의 개입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 등, 미국 자체의 선택이었던 측면이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내키지 않음을 완강하게 뚫고서 한-미 방위조약을 쟁취해 냈다. 한-미 동맹은 그 이후의 성공적인 산업화, 민주화의 튼튼한 방파제가 되었다. 행운 플러스 ‘이승만 리더십’의 고심참담한 작품이었다.
제3세계를 통틀어 군사 쿠데타와 권위주의를 한 나라는 부지기수다. 그러나 1970년대 현재에는 거의 다 산업화를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못한 나라가 수두룩하다. 1970년대로서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거의 유일하게 산업화 진입을 성사시켰다. 여건이 좋았기 때문에? 그래서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던 일? 그러나 여건이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설령 좋은 여건이 있었더라도 그 기회를 기회로서 알아보고 잽싸게 나꿔채는 것은 리더의 통찰력과 결단과 베팅과 추진력이 하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정주영 회장이 그 리더십 역할을 했다.
한국의 민주화 패턴 역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멋있었다. 권위주의 정권들의 고도성장으로 중산층이 커지고, 그 인프라에 기초해 민주화 욕구가 임계점(臨界点)에 이르자 권위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평형(平衡)을 이루었다. 이 시점에서 권위주의 세력은 그 힘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승복했고, 민주화 세력도 ‘투쟁의 관성(慣性)’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가투(街鬪) 혁명’으로 치닫지 않았다. 중동 재스민 혁명의 유혈적인 과정과는 사뭇 다른, 유관(有關) 당사자들의 상호 절제(節制의 패턴이었다.
지금은 산업화-민주화 이후 시대다. 이 시대를 우리가 제대로 잘 요리하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사는 긍지를 가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빛에 대칭되는 그림자도 물론 없을 리 없지만, 인간이 만드는 역사에 완벽을 주문할 수는 없다. 시작할 때의 선택이 잘된 것이면서 전체적으로, 결과적으로 잘됐으면 잘된 것이다. 이걸 교과서에 대한민국 긍지사관(矜持史觀)으로 담아내야 한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