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모 있는 바보들‘ 보아하니  

     80년대 이래 이념과 이념이 맞붙는 가열한 현장에서 항상 웃겼던 것은 ‘얼치기’ 들의 존재였다. 여기서 이념대결이란 ‘친(親)김정일’과 ‘반(反)김정일’의 대결을 말한다. ‘얼치기’란 김정일을 광의(廣義)의 ‘진보’의 하나쯤으로 보아 주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이념 문제에 대해 공부가 부족해서, 권위주의 정권을 증오하는 나머지 그 반발로, 민족주의와 반미(反美) 감정에서, 보수 권력블록(bloc)에 대한 혐오감에서, 그리고 운동 일선에 뛰어들지 못 한 데 대한 부채의식에서, 그리고 항상 대세(大勢)에 적당히 편승해서 그 눈치를 보고 그 미움을 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상업주의적, 보신(保身)주의적 동기에서 이른바 ‘심파(sympathizer, 동조자)’ 분위기를 만든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들은 김정일에 대한 비판을 진보 일반에 대한 적대(敵對), 반(反)민족, 반(反)통일, 수구냉전(守舊冷戰)이라고 몰아치는 친(親)김정일 계열에 엄청난 힘을 보태주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극좌는 아닌 것으로 자리매김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까지 저러는구나” 하는 것으로 ‘반(反)김정일’을 고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천안함과 연평도 이후 그들의 논조가 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전부 아닌 일부라도 말이다. 어뢰와 대포로 무식이 깨져서 그런 것인지, 권위주의 정권이 신사정권으로 보일 정도의 김정일의 말도 못할 폭정(爆政)이 이제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는 것인지, 민족주의만으로는 21세기를 살기 힘들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것인지, 운동권에 대한 부채를 다 갚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자신들도 별수 없이 보수 인생으로 포시럽게 돼서 그런 것인지, 그리고 대세가 ‘민족 민주’ 운운에서 천안함 연평도 규탄으로 바뀌었다고 보아서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유와 경위가 무엇이건 ‘심파’ 지대가 일부라도 북극-남극의 빙하 덩이가 떨어져 녹아내리듯 한다는 건 나쁠 건 없다. 김정일의 어뢰알과 대포알이 큰 공(功)을 세웠다고나 할까? 이 추세를 낙관할 순 없다. 기회주의는 이슈가 바뀔 때마다 항상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크게 걱정할 것도 없다. ‘김정일=악당’임은 갈수록 반(反)김정일 쪽의 주장 이전에 김정일 스스로 드러내고 있기에.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