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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너무나 안일한
요즘 어쩐 일인지 ‘중도실용’이라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게 당연하고 보편화되고 상식화 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정치구호로서 한 물 가서 그런 것인가? 아마도 처음부터 잘못 사용한 것이라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본래 중도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닌데, 마치 ‘중도=사사건건 중간’인양 돼버러서 그런 것이란 느낌이 든다.
안보는 김대중 노무현과 달리 신(新)정통주의로 나가겠다, 경제는 성장 중심으로 하되 복지수요에도 인색하지 않겠다, 치안은 엄격한 법치 적용으로 나가겠고, 교육은 또,,,,하는 식으로 나갔어야 한다. 이걸 무턱대고 중도로 묶어버린 것 같은 인상을 주었으니, 그게 그렇게 통용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중도란 매사 획일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새 처방이 아마 ‘공정사회’인 모양인데, 인사(人事)만 허심탄회하게 해도 공정을 따로 또 강조할 이유는 없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의 시대정신 개념화는 어설프고 안일하다. 한반도처럼 문제의 소재(所在)가 분명한 곳이 세계 또 어디 있는가? 한반도의 문제는 중도실용이나 공정으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민족의 생사의 문제다.
핵으로 무장한 마피아 집단이 북한을 황폐화 시키고 남한을 무력으로 도발하는 곳, 이게 한반도다.
왜 비장한 표정으로 “국민 여러분, 우리는 화약고에 불을 당기려는 행위를 더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시대의 소방관이 되겠습니다. 나를 믿고 밀어주십시오” 하지 않았는가? 그래야 통합적인 시대정신이 되는 것을....
“나는 여의도 정치는 하지 않겠다”가 결국은 “나는 일체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겠다“가 돼버렸다.
정치 리더십 없는 경제 리더십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주제(主題) 없는 ‘공백’에 처해 있다. 화두(話頭)가 없는 것이다. 개헌? 그게 어떻게 지금 이곳의 절박성을 담아낼 수 있는가? 예컨대, 칠흑 같은 밤에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의 절박성을 단 만분의 일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가?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