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明 속 衆生 됨이여 

     경찰 엘리트 고위층이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어미가 우울증으로 어린 자녀 둘을 목 졸라 살해했다. 이 밖에도 요즘 근친살해 사건들이 꽤 일어나고 있다. 가족사회학 쪽에서는 이것을 현실의 갈등과 스트레스 구조로 돌려서 연구한다. 충분히 경청할 만한 분석이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부 영성론(靈性論)적 관점들이 말하는 업(業, karma)이라는 개념이다. 그런 각도에서 바라보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을 살해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좀 더 근본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이건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꼭 맞는 생각이라 자임하지 않는다.

      그 방면의 여러 책들에 의하면 우리는 수 많은 전생(前生)들에서 만든 자신의 업(業)에 따라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이승에 태어난다. 태어나는 환경은, 좋고 나쁜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과의 또 다른 관계의 틀-주로 가족과 친지들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그 따윗 게 어딨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냥 하나의 이야기 거리로 들으면 된다. 이건 특정 종교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여러 종교적 비(非)종교적 관점들이 공통되게 가지고 있는 스토리다.

      사람의 일생은 이 은원(恩怨) 관계 특히 가해자(加害者)-피해자(被害者) 관계를 어떻게 슬기롭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빚을 갚을 수도 있고 더 질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의 등급을 조금 더 높일 수도 고 오히려 더 낮출 수도 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결국 “가해(加害) 했다가는 그게 부메랑 되어 너 자신의 빚만 잔뜩 더 늘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혹시 아니었을지?

      결론은 “모르겠다”다. 그러나 ‘가해(加害)=부메랑’이라고 생각하면 멀고 먼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이 의외로 대단히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적’ 설명으로 다가온다. “가해했다가는 남 아닌 네 손해”라는 말처럼 실리타산적인 말이 어디 있겠는가?

      친족을 살해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자기변명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경위 여하간에 그들은 업(業) 관리엔 실패한 셈이다.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을 하나라도 더 줄여도 시원찮을 마당에 그것을 또 늘렸으니-. 실리를 지독하게 따지는 게 인간이라지만, 이런 경우 인간은 이득이 뭔지 손해가 뭔지를 냉철하고 영리하게 계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실리를 제대로 따질 줄 안다면 함부로 욱하고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손해 갈 짓을 왜 하나? 이게 절제(節制)와 수양(修養)일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러나 이치는 뻔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필자 역시 이승에서 영혼의 등급을 단 1 밀리라도 올렸는지 지극히 회의적이다. 

     아, 못 말릴 무명(無明) 속 중생(衆生) 됨이여!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