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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설거지하는 74세의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지도부가 용감한 것은 청렴한 덕분이다. 지도자는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다.
趙甲濟
제4차 中東전쟁 때 이스라엘을 이끈 총리는 골다 메이어였다.
70代의 여성총리는 1898년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06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모리스 마이어선과 결혼, 1921년에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다. 잠시 키부츠 생활을 한 부부는 텔아비브로 옮겼다. 메이어는 시오니즘 조직에 가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48년 미국에 가서 모금 활동을 성공적으로 벌였다. 그는 그해 5월14일 이스라엘 독립선언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이스라엘 建國(건국)의 아버지인 밴구리온 총리는 골다 메이어를 노동부 장관에 이어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969년 에쉬콜 총리가 急死(급사)한 뒤 집권 노동당은 그를 총리로 선출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급습, 11명의 선수와 코치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메이어 총리는 군인과 정보기관원으로 암살단을 조직, 테러 관련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도록 했다. 이 암살작전은 20년간 계속되었다.
1973년 10월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침공할 것이란 사실을 불과 8시간 전에 알았다. 군부는 先制(선제)공격을 건의하였다. 미국은 선제공격을 하면 미국 여론의 악화로 원조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메이어 총리는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메이어 총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기습을 허용한 데 대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1974년에 사임하였다. 후임 총리는 라빈 전 참모총장이었다.
이탈리아의 인터뷰 전문 여기자인 올리아나 팔라치는 1972년 11월 골다 메이어 총리를 인터뷰하였다. 팔라치는 두 번 인터뷰하여야 했다. 첫 번째 인터뷰를 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 호텔에 투숙하였는데, 누군가가 녹음 테이프를 훔쳐갔던 것이다(팔라치는 리비아 정보기관 요원들을 범인으로 지목하였다). 메이어 총리는 이 소식을 듣자 인터뷰를 다시 하자고 연락을 취하였다.
일찍 남편과 이혼한 메이어 총리는 빌라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빌라 앞에 경호원이 서 있을 뿐이었다. 메이어 총리는 낮에 한 소녀를 불러 청소를 시킬 뿐 요리도 직접 하였다. 팔라치와의 인터뷰 전날 메이어 총리는 손님들을 초대하여 저녁을 대접하였다. 회식은 새벽 2시에 끝났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총리는 새벽 3시30분까지 설거지를 하였다. 3시간 남짓 잠을 잔 74세의 할머니 총리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집무를 시작하였다. 팔라치가 오전 10시에 메이어를 만나니 피로해 보였다고 한다. “인터뷰를 연기해도 좋습니다”라고 했지만 메이어는 “이렇게 멀리 오셨잖아요. 테이프를 도둑 맞고…”라고 오히려 위로했다.
팔라치 기자는 긴 인터뷰를 끝내고 헤어지기 직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메이어 여사님, 죽음을 어떻게 봅니까?
“저의 한 가지 걱정은 너무 오래 사는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죄도 아니고 자랑도 아닙니다. 계단을 뛰어서 오를 수 없다든지, 점프를 할 수 없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가 될 게 없어요. 문제는 정신력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죽은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듯이 너무 늦게 죽는 사람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 좋던 知性(지성)이 망가져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치욕입니다. 그런 치욕이 나에게 생기지 않기를 바라죠. 내 정신이 말똥말똥한 상태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한 가지 걱정은 너무 오래 사는 것입니다.”
골다 메이어 총리의 소박한 삶은 예외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과 軍人은 우리 기준으로는 거의가 가난뱅이이다. 돈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 이스라엘의 엄격한 法治가 公職者(공직자)의 청렴성을 강제한다. 라빈 총리는 駐美대사 시절 미국에 개설하였던 은행계좌를 귀국할 때 폐쇄하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사임하여야 했다. 이스라엘 지도부가 용감한 것은 청렴한 덕분이다. 지도자는 깨끗한 만큼만 용감해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