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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하면 全面戰'이란 군부의 誤判이 프랑스를 亡國의 길로 유도했다!
역사는 두 번 절호의 찬스를 놓친 프랑스를 버렸다. 두 번 찬스를 놓친 李明博 정부는 어떻게 되나?
趙甲濟
1936년 3월 대대규모의 독일군이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라인강 주변의 독일영토)로 진주,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였을 때 히틀러가 독일군에 내린 명령은 '프랑스군이 반격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프랑스軍과 정면승부를 하기엔 아직 力부족이라고 판단하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였더라도 독일군은 물러났을 것이고 독일 군부가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를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랑스가 패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프랑스군은 安保의 생명선인 라인란트 완충지대가 독일군 주둔지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
프랑스 군부가 아주 패배주의적인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므랑 원수는 불법진주한 독일군에 반격하면 全面戰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므로 총동원령을 내린 뒤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방부도 이 판단에 동조하였다. 그런데 총동원령을 내리면 하루 3000만 프랑의 경비가 들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外債가 많아 국가不渡 직전으로 몰려 있었고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프랑스 집권세력은 총동원령을 결단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일군에 대항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찾아나섰다. 외무장관을 영국으로 보내 "영국이 합세하면 독일군을 치겠다"고 압박한다. 영국이 냉담하게 나올 것임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프랑스는, 국민들에게 영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꺼리를 만들었다.
연평도에 대한 북괴군의 포격이 있은 직후 한국군의 지휘부서와 대통령이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도 '우리가 전투기로 敵의 해안포대를 폭격하면 전투가 확대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연평도 상공에 대기중이던 한국 공군 최신예 편대가 우수한 무기로 敵을 강타하는 것이 再도발을 방지하는 길인데도 프랑스 군대처럼 守勢的 자세를 취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가 영국을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한국도 미국의 도움을 청하였다. 영국과 달리 미국은 신속하게 航母戰團을 전개하였다.
프랑스 군부가 독일군을 치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각에 보고한 것은 전쟁을 기피하기 위한 고의적 과대평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간인들에게 그렇게 겁을 주어야 전쟁을 말리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39년 9월 프랑스 군부는 똑 같은 실수를 한다.
이때 독일군의 主力은 폴란드 침공에 투입되어 서부戰線에선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군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때 프랑스가 先制공격을 하였더라면 독일군은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게 戰史學者들의 거의 일치된 평가이다.
이때도 프랑스군은 가므랑 원수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開戰을 결심하지 못하여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집중시킨 뒤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가 있었으면 독일군의 기습은 성립할 수 없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르덴느 돌파전이 성공, 프랑스는 6週만에 손을 들었다.
역사는 두 번 기회를 놓친 프랑스를 버린 것이다.
李明博 정부와 한국군 지휘부는 천안함 爆沈에 대한 응징을 포기하는 첫번째 실수에 이어 연평도 도발에 대한 응징도 포기하곤 '추가 도발에 대하여서만 응징한다'고 물러났다. 두 번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명박 정부에 역사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 끝이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