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좌파여! 왜 지금 ‘호국’을 위해 궐기하지 않는가
     
    <한국선진화포럼 /선진화 포커스 43호>
        박효종 (한국선진화포럼 편집위원, 서울대 윤리교육과)    
     
       참담하다. 너무나 참담하다. 어쩌다 우리 땅이 이처럼 폐허가 되었는가. 나쁜 이웃을 둔 죄로 우리는 계속해서 맞고 살았다. 그렇게 맞고 살다보니 참는 법과 인내심만 키운 것 같다. 아니, 맞고 살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참고 사는 ‘매 맞는 아내’처럼 되었다. 이런 상황이 참담한 것은 개인이라면 모를까, 우리 모두 피와 땀, 혼을 불사르며 일구어온 ‘자유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1·21 청와대 습격 사태, 아웅산 테러, 민항기 폭파 등이 그랬고, 이 정부 들어와서도 금강산 관광객 사살, 천안함 폭침이 그랬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번도 응분의 대가를 안겨주지 못하고 말로만 응징을 다짐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맞는 것이 습관이 되어 맞아도 참고, 죽어도 참았으며, 아예 굴욕을 받아도 참는 것을 도리로 생각했다. 바로 그 결과가 연평도의 초토화로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평화로운 섬이 폐허의 섬으로 변하고 평화롭게 삶을 꾸리던 사람들이 난데없이 피난민이 되어버린 이 부조리한 상황 앞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태풍이 온 것도 아닌데, 생업을 잃고 집을 떠나 찜질방을 떠돌아야 하는 상황이 올 줄 꿈엔들 예상했으랴. 6·25가 지난지도 60년인데 웬 난데없이 피난민이 발생한 것인가.


    지금이 대화와 평화를 외칠 때인가


       일부 좌파 사람들은 말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평화로웠다고…. 이처럼 사실과 맞지 않은 궤변이 어디에 있고,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말이 어디 있는가. 김대중 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화해 정책을 추진하던 1999년 6월 제 1 연평해전이 있었고, 또 2002년 6월 제 2 연평 해전이 있지 않았던가. 이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 작은 전쟁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서해 5도를 공동어로구역으로 추진하며 이 지역 전력을 약화시켰고 결국 이런 참변을 불러 온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김정일 정권의 사악한 심연을 똑똑히 보았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 야만성과 폭정은 같은 민족으로서의 수치다. 이번에는 그것도 모자라 3대 세습을 한다며 젊은이를 후계자로 세운 것의 정당성을 보여 주기 위해 도발을 일으킨 게 아닌가. 제 정신이 아닌 김정일 정권을 두고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미친개에겐 몽둥이 뿐”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이명박 정부가 단호한 결의를 보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북한이 미친개처럼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속성일는지 모른다. 주민들을 총칼로 겁주며 조그마한 반대자라도 찾아내어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는 것은 그들의 야만적 통치방식이라고 치자. 또 이런 사악한 북한체제를 뒤엎지 못하는 것은 북한주민들의 무능함과 무력함의 소치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자유의 나라를 세우고 가꾸었으며 번영된 삶을 살아왔다. 이 자유와 번영된 삶이 왜 야만적인 그들로부터 위협을 받아야 하나. 그럼에도 이 상황에서 평화를 외치고 대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비굴한 평화론자들이야 말로 한국의 좌파다. 그런데 한국의 좌파가 평화를 외칠수록 1938년 뮌헨 협정이 떠오른다. 독일의 히틀러와 영국의 챔벌린 등이 체결한 이 협정은 독일이 체코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주데텐을 합병하도록 규정했다. 이 협정이야말로 비굴한 평화의 협정으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히틀러는 뮌헨협정 체결 과정에서 더는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체코 전체 합병에서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영국의 챔벌린도 주데텐 독일인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명분으로 물러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독일은 이듬해 체코 전체를 보호령으로 병합했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으로 이어져 제 2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평화를 외치는 좌파들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영국의 굴절된 평화론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한국 좌파의 위선은 그간의 행적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해바라기처럼 북한만 바라보며 북한의 눈치만 살피고 산다. 북한이 핵을 갖지 않았을 때는 “반전·반핵”이라고 호기롭게 외치다가,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슬그머니 ‘반핵’은 빠지고 ‘반전’만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위선의 극치가 아닌가. 그들이 제대로 된 대한민국의 좌파라면 당연히 “반전·반핵”을 외쳐야 했고 반핵의 원칙에 맞지 않는 북한의 호전성을 겨냥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어려운 데서도 대한민국을 건국하며 자유를 지켜낸 보수와 사사건건 각을 세우며 자신들이 어떤 불이익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만 불평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불평을 공론의 장에 제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자신들을 두 번에 걸쳐 집권 세력으로 만들어준 대한민국 체제의 장점을 소리 높여 외친 적이 없다. 항상 대한민국은 이래서 나쁘고 저래서 나빠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고 불평만 했다. 그리고는 북한의 만행만 나오면 “같은 민족”이니 “대화”니 “평화”니 하며, 감싸 안았을 뿐이다.

    왜 한국사회는 ‘호국좌파’가 없나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지금처럼 북한의 무력도발이 일어나 국가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이를 규탄하는 것은 보수의 몫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라를 지키고 자유를 위해 궐기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나서야 하는 일인데, 그것이 왜 우파만의 몫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좌파는 어디 있는가. 그토록 인권을 외치고 평화를 외치던 좌파는 어디 있는가. 평화의 땅이 폐허가 된 이 마당에도 광화문에서 평화와 대화만 외치며 평화를 위한다고 촛불만 들고 있으면 평화가 오는 것인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좌파는 오렌지 좌파고 호국과 애국의 무임 승차자란 말인가. 그들이 그토록 평화를 외치며 북한에 대해 무기를 들기를 거부한다면, 하다못해 전쟁터의 위생병 역할이라도 자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친북좌파’만 득세할 뿐, ‘호국좌파’는 없는 것이 한국 좌파의 비극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촛불 집회”다, “시위”다 하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북한의 호전성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보통 때는 유창하게 말을 잘 하다가 북한의 야만성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 때문에 한국 좌파는 ‘친북’과 ‘종북’이라는 낙인이 찍힐 뿐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한다고 하나, 말뿐이다. 천안함 때도 그랬다. 그 때 좌파가 북한의 만행에 대하여 호국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났으면 북한의 김정일도 크게 위축이 되었을 텐데, 천안함 피격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며 미국의 어느 한 한인과학자의 어이없는 주장을 구세주처럼 믿고 따랐다. 그런데 지금 북한의 연평도 포탄에서 매직으로 쓴 번호가 선명한데, 왜 말이 없는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국 좌파의 친북성향과 호국정신 부재야말로 한국좌파의 비극을 넘어 한국전체의 비극이다. 북한이 아무리 만행을 저질러도 북한에 대한 짝사랑을 거두지 못하니, 김정일의 호전성과 기를 살리는 것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 땅을 초토화시키고도 태연히 음악회를 즐기는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보라. 구토증이 나지 않는가. 그것은 과거 독일 나치가 유태인을 가스실에 넣어 죽이고도 베토벤이나 바그너, 브람스의 음악을 들으며 즐기곤 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북한이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북한을 절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는 한국의 좌파여! 북한에 대한 짝사랑에도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을 한국의 어엿한 좌파로 키워준 것은 북한의 전제정권이 아니라 자유의 대한민국이다. 지금 그 대한민국의 일부가 초토화되었다면, 당연히 분노해야 하지 않지 않겠는가. ‘호국좌파’로서 분노하고 싶지 않다면, ‘진보’라는 말, ‘좌파’라는 말도 쓰지 말고 ‘좌익’임을 자임하라. 모름지기 ‘북한의 좌파’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좌파’로 살려면, 이 국가적 재난 앞에 호국의 결단을 보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