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특별시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전쟁기념관 정면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호국추모실이 나온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바쳐 용전분투하신 선열 중에서 뽑은 을지 문덕장군, 이순신장군, 강감찬장군,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20여명의 생전 모습을 담은 상반신 동상이 양쪽으로 나란히 진열되어있다.

  • ▲ 이대용 장군 ⓒ 뉴데일리
    ▲ 이대용 장군 ⓒ 뉴데일리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연개소문 장군, 김유신 장군, 계백 장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들, 윤봉길 의사, 6·25때의 전투영웅들, 기타 여러 명의 순국선열들이 호국인물로 추가 선정되어 그 수가 약 3배로 늘어났다. 그러자 장소가 협소해서 하는 수 없이 호국 인물실을 두 개로 증설하여 한 곳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을 거처 일본식민시대까지의 호국인물들을 진열하고, 다른 곳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와 6·25 한국전쟁시의 호국인물들을 진열해놓았다. 그 호국인물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새겨진 분이 있다.
     
    김용배(金龍培)준장(1921.4.17-1951.7.2) 경북문경출생, 육사 제5기로임관. 1950년 6월 제6사단 제7연대 대대장으로서 춘천전투 및 음성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여 지연(遲延) 작전을 성공시켰으며, 1951년 제7사단 연대장으로서 군량리(軍糧里) 전투시 전사,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됨.

    나는 위의 글이 그분을 알리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분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날,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서 대대를 이끌고 북한 공산군을 맞아 싸움을 시작하여 1951년 1월 6일까지 계속 제1대대장으로서 하루도 최전방 대대장자리를 뜨는 일이 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적탄에 부상을 입은적이 있지만, 후방병원으로 후송되는 것을 거부하고 붕대를 친친 감은채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그분이 혁혁한 교훈을 세운 전투는 수도 없이 많다. 그중 아주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것은 춘천전투, 음성전투뿐이 아니었다. 이에 못지않게, 아니 이 전투들보다 더 격렬했던 낙동강전투, 신령화산전투, 지촌리전투 등이 있었다. 또복계전투, 양덕전투, 순천전투, 구장-희천전투, 초산전투, 그리고 중공군과의 풍장전투, 가창전투, 동두천전투 등도 결코 만만치 않은 전투들이었다. 이외의 소규모전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분은 소양강에서 낙동강까지, 그리고 이어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그리고 다시 압록강에서 남한강까지, 그후는 남한강에서 소양강 북쪽 양구까지를 질주하면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바로 그 분의 직속부하로서 제7연대 제1대대 제1중대장이었으며, 계급은 육군 중위였다.

    당시 제7연대는 춘천 북방에 있는 38선 넓은 정면에 2개 대대를 배치하고, 나머지 1개대대는 예비대로서 춘천 시내에 있는 연대본부 영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평시에는 장교들과 상사급 하사관들은 모두 춘천시내에 방이나 집을 얻어 영외거주를 하고 있었으며, 연대장만 병영내 외딴 곳에 있는 군관사에서 거주했다. 그때 춘천시는 인구가 6만여명이며, 전원생활의 미취(美趣)를 갖춘 아름다운 작은 도시였다. 그런 아름다운 풍치와는 반대로 시내 민간 유선통신망은 미개척의 황무지였다. 전화 통신망으로는 경찰의 독자적단선(單線) 경비전화가 각 경찰지서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는 별도 계통인 또다른 공공통신망으로는 시청, 법원 등의 관공서에 우체국 교환원이 수동으로 연결해주는 전화가 몇 대씩 있었고, 시내 각급 학교 역시 우체국전화가 한대씩 가설되어 있는 상태였다.

    군 유선통신망도 열악해서 연대본부에서 가설하는 군용EE8 유선전화기가 영외에서 거주하는 각 대대장 집과 연대참모 집에 한 대씩 설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영외 거주 중대장이나 그 이하급 장교와 하사관에 대한 비상소집과 급한 연락은 모두 연대본부나 대대본부에서 내보내는 연락병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같은 통신방법은 고대사회나 봉건사회 때의 파발꾼 연락망과 똑같은 구식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래서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의 비상소집 명령이 나에게 전달된 것은 6월 25일 오전 8시 30분경이었다.

     

  • ▲ 2006년 5월, 육군사관학교가 제정한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수상
    ▲ 2006년 5월, 육군사관학교가 제정한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수상

    그날은 일요일이라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 느긋한 마음으로 춘천시 죽림동 하숙집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멀리서 포성이 쿠쿠쿵 울렸다. 나는 국군 제16포병대대가 휴일을 반납하고 저렇게 열심히 사격훈련을 하고 있구나하고 대견히 여기면서 무심히 흘려버리고, 방안에서 아침 보건체조를 했다. 그리고 집 안뜰에 나가서 세숫대야에 부엌 아주머니가 부어주는 따뜻한 물로 세수를 했다. 좀 있다가 아침식사를 한후, 봉의산에 있는 옛 일본신사를 헐고 그 자리에 새로지은 춘천도서관으로 가서 좋은 책을 읽기로 했다. 나는 누구와 만날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춘천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리고 때때로 봉의산이나 소양강변을 산책했다.

    프랑스 문필가 앙드레 모로아는 영국의 정치가이며 문필가인 윈스턴 처칠 경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약 1년전에 만났다. 그때 처칠은 모로아에게 “모로아군,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실기(實記)를 쓰게. 좋은 실기는 나라의 멸망위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교훈을 국민들에게 감명 깊게 전해줄 수 있는 위대한 기록물이 될 수 있는 것일세. 한번 써보게.”하는 조언을해 주었다. 모로아는이 조언을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길게 도취된 채 독일 히틀러의 위협을 경시하고, 그에대한 대처를 소홀이 하는 프랑스 정치인들의 이전 투구 분열상을 실기를 써서 경고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실기를 쓰지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가운데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5월 17일 독일군은 마지노선을 돌파하여 6월 14일에는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는졸지에 패망했다. 모로아는 전쟁이 일어남과 동시에 현역으로 소집되어 육군대위 신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프랑스가 패망하는 비극의 역사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산증인이 됐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됐지만, 모로아는 프랑스 패망의 사연을 담은 실기인 <프랑스전선>, 그리고 자매판으로 <프랑스는 패했다>는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 저서들에 따르면 제1차세계대전때는 프랑스에 명(名) 수상과 국방상이 있었다. 또 2명의 특출한 군 명장(名將)들이 총사령관과 군사령관에 발탁 기용되어 일사분란하게 화합 단결했다. 그들이 조국 프랑스를 위해 사심을 버리고 최선을 다했기에 독일군 진격의 예봉을 꺾고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정권욕에 사로잡힌 정치가들이 반목을 거듭하며 극한투쟁을 일삼아 국론이 여러개로 분열되었다. 히틀러가 통치하는 독일의 군비확장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한눈을 팔며 안보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당파싸움과 개인싸움으로 낮과 밤을 지새우다가 독일군의 기습총공세에 눈사태현상을 일으키며 와르르 무너져 드디어 패망의 비운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앙드레 모로아는 영국에 머물다가 프랑스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있는 캐나다를 향해 망명길에 올랐다. 프랑스 망명객들을 가득 실은 여객선이 대서양을 항해하다가 석양을 바라볼 무렵, 모로아는 <프랑스는 패했다>의 원고를 탈고했다. 바로 이때 여객선 갑판 위에는 여러명의 프랑스 망명 유치원생들이 뛰놀고 있었다.

    저 어린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자유조국 프랑스는 이미 없어졌고, 방랑길에 오른 슬픈 처지에 놓인 가여운 아이들이었다. 그들 앞에는 낯선 이국(異國)땅에서의 고난의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을 저주받은 운명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누구 탓인가? 그것은 바로 프랑스의 기성세대, 특히 국가이익을 멀리하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이전투구의 추태를 벌인 정치지도자들 탓인 것이다. 그리고 또 나라를 지키지 못한 군인들의 책임도 면할길이 없다.

    티 없이 맑고 귀여운 얼굴로 웃어대면서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놀고있는 그 어린애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로아는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탈고한 원고지를 다시 꺼내서 눈물을 닦으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추가로 적어넣었다.

    “너(汝)여, 조국에 충성하라.”

    나는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구한말 우리 부조(父祖)들이 사리사욕에 사분오열되어 서로 남의 발목을 잡느라 선진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 바람에 나라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눈물겨운 36년 세월을 보냈다. 그 후 연합국의 승리로 해방을 맞긴 했으나 강토는 분단되었다. 더구나 세계 최빈국으로서 처참하게 보릿고개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제정신 차리지 못한채 극한 투쟁만 일삼던 우리 현대사를, 프랑스의 모로아가 대신 기록해주는 것 같아서 느끼는 바가 컸다.

    그 좋은책을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진 나는 6월 25일 아침식사를 끝내자 도서관으로 가기위해 천천히 집을 나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포성과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으나, 제16 포병대대장 김성소령은 소문난 훈련광인데다가 일련의 연속성을 위해서 저렇게 열정적으로 사격 훈련을 하는구나 하고, 또 한번 무심히 흘려버리면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 2006년 5월, 육군사관학교가 제정한 '자랑스러운 육사인상'을 수상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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