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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거한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 DJ)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물 정치인이었다.
전남 하의도서 출생…5.16으로 3일만에 의원직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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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대 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1925년 목포 앞바다 신안군(출생 당시 무안군)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를 졸업하고 해방 직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에는 이 회사를 인수해 경영자로 변신했고 이어 목포일보를 인수해 언론인 경력도 쌓았다.
1954년 제 3대 민의원 선거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낙선했고 56년에는 장면이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해 본격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59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4.19 이듬해인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 사흘만에 5.16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는 바람에 의원선서도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는 이러는 사이 59년 첫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했다. 그는 62년 YWCA 총무였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했다. 김 전 대통령은 63년 6대 총선 때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두번째로 당선됐다.
그는 71년 첫 대권 도전에 나서 실패한 뒤 36년만인 97년 '대권 도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올랐다. 70년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의 막판 지원으로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됐지만 본선에서 박정희에게 95만표차로 졌다. 그는 대권 도전으로 야당 대표적 정치인으로 도약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정적으로 확실히 부각되면서 이후 납치 망명 투옥 연급 등의 정치적 고초를 겪었다.
박 정권때 피랍…신군부엔 사형선고, 미국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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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일본에 피랍됐다 살아난 직후의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 중이던 72년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정부 활동을 펼쳤다.
73년 미국에서 반정부 인사들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만들었고 일본에서도 조총련 인사들과 연계해 한민통 결성을 추진했다. 이런 움직임은 박정희 정권을 자극해 일본 도쿄에서 납치돼 수장당할 뻔 했지만 살아나 서울로 귀환했다. 이 사건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벌인 일로 알려져 있다.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 징역을 살고 나와 가택연금을 당했다.
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국제사회의 압력과 전두환 정권의 양해로 무기 징역, 20년형으로 차차 감형된 뒤 82년말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 체류 중이던 84년 국내에 있던 김영삼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해 공동의장이 됐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는 전격 귀국을 감행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또다시 가택연금당했다. 하지만 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활약하며 2.12 총선에서 신민당이 제 1야당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YS와 단일화 실패로 '야권분열 장본인' 비난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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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2년 6월26일 백범 김구 추모제에 참가한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당시 대통령 후보들 ⓒ 연합뉴스
그는 87년 6.29 선언 이후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과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신민당을 깨고 나가 평민당을 창당, 대선에 두번째로 출마했지만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3위에 그쳤다.
당시 양김이 김영삼으로 단일화됐다면 정권교체가 기정사실화되는 상황이었지만 둘은 끝내 합치지 못했다. 그는 이 때문에 야권 분열의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여 3야'로 분열된 상태에서 나선 88년 총선에서는 호남지역을 싹쓸이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했지만 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다시 좁아졌다. 91년 9월에는 이기택의 민주당과 야권통합을 성사시키며 재기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97석을 얻어 대권에 세번째 도전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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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 3당 시정의 3김, 왼쪽부터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씨 ⓒ연합뉴스
92년 필생의 라이벌 김영삼을 상대로 세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패퇴하자 이번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93년 7월 귀국해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치전면에 또 나서 97년 대선에 대비했다.
그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 최대 실세였던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손잡는 'DJP 공조'를 이뤄낸 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대권 4수 끝에 마침내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대북 송금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 흠집…서거 직전엔 'MB정부 독재' 주장
1998년부터 집권한 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고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 갈등과 측근 비리 사건이 줄줄이 터져나오면서 전임자 감영삼처럼 조기 레임덕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김 전 대통령 아들들과 '2인자' 권노갑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옷로비' 이후 불거진 각종 비리의혹 사건은 김대중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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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6월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집권 기간내내 특정지역 인사편중 시비가 끊이질 않았고, 북한군의 서해 도발 등으로 '대북 퍼주기' 논란에 휘발렸고 서해에서 장병들이 전사한 상황에서도 일본으로 월드컵 관람을 하러가는 바람에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퇴임 후에는 노무현 정부가 벌인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가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2005년에는 불법 도감청 사건 수사로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그래도 그는 잦은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영향력을 즐겼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돼 진전을 하지 못했다"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주장하면서 민주개혁세력 연대를 주문하는 등 현실 정치에도 깊이 개입했다.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한 이후에는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기까지 하는 등 마치 대정부 투쟁 선봉에 선 듯한 모습까지 연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