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대세계의 일상성 ⓒ 뉴데일리
    ▲ 현대세계의 일상성 ⓒ 뉴데일리

    앙리 르페브르는 일상성 속의 광고, 소비, 자동차, 여성 등의 문제를 언어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현대성을 예리하게 비판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다. 1990년에 번역 출간된 그의 역저 『현대세계의 일상성』은 현대성에 관심을 가진 한국의 많은 광고 전문가와 지망생들에게 반성적 성찰을 제공했고, 또 한편으로는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었던 젊은이들에게, 계급투쟁 이론만으로 현대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했던 박정자씨는 더욱 상세한 용어 설명과 풍부한 이미지 자료를 삽입한 개정판을 출간하여, 일상성에 대한 결코 쉽지 않은 철학적 성찰을 한층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 책이 처음 프랑스에서 나왔던 해인 1967년으로부터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저자가 언급한 현대성과 일상성에 대한 지적은 과거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 시점, 그 어느 나라보다도 정보화가 빠르게 진척된 한국사회에서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고 생각할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개정판 출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성은 우선 보잘 것 없다. 지루한 임무, 모욕적인 인간관계, 언제나 반복되는 사물들 혹은 상품들과의 관계, 늘상 해결되지 않는 돈이나 욕구와의 관계 등등. 요컨대 궁핍의 존속이고, 부족함의 연장이며, 박탈, 억압, 채워지지 않는 욕망, 비천한 인생의 반복이다. 이것이 일상성의 비참함이다. 그러나 일상성에는 비참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온갖 창의성과 기쁨, 쾌락도 들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것도 지루한 어느 일상적 하루 중에서였고, 위대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것도 어느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일상성의 가장 위대한 측면은 그 완강한 지속성이다. 영원히 지속되는 인간의 삶처럼 일상성은 땅에 뿌리박고 영원히 지속된다. 일상에서 탈출하여 여행을 다녀와도,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축제를 벌여도, 그것들이 끝나면 다시 일상성은 집요하게 계속된다.

    한 가지, 르페브르가 주목한 것은 오늘날 옛날의 귀족계급과 그대로 일치하고 또 귀족의 잔재를 물려받기도 한 상층 부르주아지에게는 일상생활이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고정된 주거지도 없다. 그들은 돈의 힘으로 호사스럽게 자유로운 유랑생활과 유목생활을 즐긴다. 요트에서 살기도 하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성(城)에서 저 성으로 옮겨 살기도 한다. 그들은 주민의 개념 위에 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 주거의 개념이 없다. 하지만 보통의 주민들은 일상에 포위당하고 일상 속에 잠겨 흐느적거린다. 그러면서 별다른 의식도 없이 게으른 포만감 속에 편안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뭔지 막연하게 도둑맞은 느낌이다. 그들이 가진 영향력이라고는 그림자처럼 실체 없이 희미한 것이고, 갖고 있는 부(富)라고는 부스러기 같은 미미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손톱만큼의 권력이나 위엄도 없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층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는 중간계급의 구성원들은 소비사회에서 소비자 역시 소비되는 현상을 재촉할 뿐이다. 소비 문제를 통한 계층 분석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바라보는 르페브르의 비판의식을 읽을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는 가상현실 이론으로 영화 「매트릭스」에 이념을 제공하는 등 현대 문화 이론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로 떠오른 장 보드리야르의 스승이다. 보드리야르는 1966년에 『사물의 체계』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지도교수가 앙리 르페브르였다.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현대세계의 일상성』과 겹친다. 한편 Oulipo(잠재문학 공동 작업실)의 일원으로 실험적인 소설을 많이 쓴 조르주 페렉도 르페브르를 사사하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명품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광을 꼼꼼하게 묘사한 소설 『사물들』은 르페브르의 일상성 이론을 그대로 소설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서 앙리 르페브르는 광고가 사람들의 욕구에 정보를 제공해주는 소박한 중개자가 아니라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문학, 수사학, 미술 등 예전의 예술을 대체하고 있다는 것을 씁쓸하게 확인해 주고 있다. 과연 오늘날의 광고는 단순히 소비자에게 상품을 알리는 매개 수단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감상하는 문화적 소비재가 되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비디오 광고에서 영화적인 줄거리를 즐기고, 신문이나 잡지의 평면 광고를 회화적으로 감상하며, 편지 체의 기업 이미지 광고 혹은 보험회사 광고 카피에서 문학적 감동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적 감흥을 주는 문화적 1차 소비재가 되었다 해도 감동적인 문안 밑에는 기업의 이름이 나오고, 회화 작품 같은 이미지 밑에는 조그맣게 기업의 로고가 박혀 있게 마련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에게 상품을 강제하는 교묘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까 정교한 광고문안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상품의 구매를 강요하는 구체적인 부추김일 뿐이다.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러이러한 상표를 선택하라, 이 기구(가전제품)는 여성을 해방시킨다. 이 에센스는 좀더 당신 곁에 가까이 있다, 등등. TV의 드라마와 뉴스 중간에 끼어드는 명령들은 이 부추김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신은 편안하게 당신 집에 있는데 그 집에는 작은 화면(화면에 의해 전달되는 메시지보다는 화면이 중요하다고 맥루한은 주장한 바 있다)이 있고 누군가가 당신을 사로잡고 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슨 옷을 입고 무슨 가구를 들여놓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준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프로그래밍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기 까지 우리는 수백 건의 광고에 알게 모르게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광고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재화(財貨)는 광고적 후광이 있을 때만 진정한 재화가 된다. 이때 광고란 그것이 문안이건, 이미지건 간에 기호학적 의미에서의 기호이다. 따라서 재화는 기호의 모습을 띠었을 때만 재화가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대부분의 소비는 재화 없이 단지 재화의 기호만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명품을 사는 사람은 단순히 면이나 실크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구체적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이 주는 사회적 위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재화의 기호만을 소비하는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인물도 광고적 후광이 있을 때만 유명한 인물이 된다. 연예인의 팬이나 정치적 유권자들은 인물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그 인물을 장식하는 기호만을 소비한다.
    광고는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끊임없이 우리의 실천에 간섭하고 욕망의 한 가운데에 끼어들며 우리 사회의 언어와 문학과 사회적 상상에 침투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광고의 방법을 모방하는 프로파간다가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근엄한 학문의 전당이었던 대학들도 광고 전선에 뛰어든 지 오래 되었고,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에서 조차 광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광고는 상품의 이데올로기이면서 동시에 철학, 도덕, 종교, 미학이 예전에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빼앗았다.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결국 그 자체가 이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광고전문가는 현대사회의 조물주이고, 의기양양하게 욕망의 전략을 짜는 전능의 마술사가 아닌가?’라고 르페브르는 묻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수많은 물건들이 실제와 상상을 가르는 문턱을 넘고 꿈과 정서를 떠맡는다. 그것들은 비록 구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소비되더라도 실은 상상적인 혹은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중의 어떤 것들은 우리를 높은 신분에 올라가게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이데올로기적 무게를 갖는다. 예컨대 별장은 부동산 소유의 기회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꿈과 이데올로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의상(유행하는 스타일, 값싼 기성복과 고급 기성복)과 요리(보통 요리, 고급 요리, 축제나 잔치의 요리)도 각기 그 나름대로 각 수준의 이미지와 언어적 주석과 함께 꿈과 이데올로기의 대상이다. 글자 그대로 상상은 일상의 한 부분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같이 상상을 소비하고 있다. 구체적 사물을 소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다.
    사회적 상상의 가장 극명한 예시를 우리는 어떤 영화나 공상과학 소설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잡지에서 발견한다. 여성지 속에는 상상과 실재가 중복되어 들어 있다. 독자들은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똑같은 책 속에 사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는가 하면, 이 사물들을 꾸미는 멋진 수사(修辭)는 그것들을 상상의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여성잡지 속에는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모든 옷들이 있고, 가장 간단한 것에서부터 전문적 기술을 요하는 것까지 모든 요리와 상차림이 있으며, 하찮은 기능을 수행하는 가구에서부터 궁전이나 성을 장식하는 가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가구들, 모든 집들, 그리고 모든 아파트들이 있다.
    아름다움, 여성성, 유행 등을 떠맡은 여성은 일상성 속에서 주체인 동시에 희생자이며, 구매자이고 소비자이며, 상품인 동시에 상품의 상징(광고에서의 심한 노출과 미소)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일상성과 현대성의 가장 전형적인 요소이다.

    르페브르가 현대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동차를 꼽은 것은 매우 흥미롭다. 교통의 기구이고 운행의 도구인 자동차는 그 실용성을 떠나 사회적 존재가 되었다. 정말로 특별한 이 물체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이중성을 가진 강력한 이중 존재이다. 기능적으로 분석하자면 회전과 운행, 방향과 속도의 전환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고, 구조적으로 분석하자면 모터, 차체, 장비 등으로 파악되는 그저 단순한 기계인 자동차는 그러나 단순히 기술적인 물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수단이고 환경이며, 요구와 강제가 되었다. 즉 그것은 감각의 대상인 동시에 상징이고, 실용적인 물건이면서 동시에 상상의 물건이 되었다.
    우선 자동차는 등급을 야기한다. 자동차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고 위엄의 상징이다. 자동차에서는 모든 것이 안락과 힘과 위엄과 속도의 상징이며 꿈이다. 실제 사용에 기호들의 소비가 중첩된다. 그것은 꿈 속으로 들어간다. 소비의 기호들과 기호들의 소비, 행복의 기호들과 기호들에 의한 행복이 서로 한데 얽히고 서로 강화되고 상호 중화된다. 자동차는 역할들을 누적한다. 그것은 일상성의 강제들을 요약한다. 자동차는 중개물 또는 수단에 부여된 사회적 특권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동시에 자동차는 일상에 게임과 모험과 의미를 덧붙여 줌으로써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압축해 보여준다.
    부상자와 사망자 그리고 유혈이 낭자한 도로와 함께 자동차는 일상에 남겨진 모험의 한 잔재이고 감각적인 쾌감이며 일종의 놀이이다. 에로티즘과 모험을 위한 알리바이이며, 주거와 도회적 사교성을 위한 알리바이이다. 자동차는 사람들의 경제적, 심리적, 사회학적 행동을 결정하고, 스스로 총체적 물체가 되기를 원한다. 자동차는 하나의 의미를 지닌다. 자동차는 일상에 자신의 법을 부과하면서 일상을 공고히 만든다. 오늘날 일상성은 크게 보아서 모터의 소음이고 모터의 합리적 사용이며 자동차의 생산 및 분배의 요구라고 르페브르는 잘라 말한다.
    기파랑 펴냄, 368쪽,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