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별의 기술 ⓒ 뉴데일리
    ▲ 이별의 기술 ⓒ 뉴데일리

    한국은 아시아에서 이혼율 1위의 국가가 되었고, 10년 전에 비해서 무려 두 배 반이 넘는 사람들이 부부관계를 종식하고 있다.
    헤어지는 것은 비단 부부만이 아니다. 만남이 잦은 오늘날의 연인들은 그만큼 더 쉽게 헤어지고, 사랑의 종말이 주변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 속으로 들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 그 누구와도 영속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설령, 의도적으로 헤어지지 않는다 해도, 전학을 가거나, 이사를 가거나, 군대를 가거나,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아예 세상을 떠나기도 하여, 우리는 언제나 이별의 그늘에서 살아간다.
    왜 모두 헤어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 소중했던 모든 사람들은 왜 예외 없이 우리 곁을 떠나야 하는 것일까? 비록 이별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조건이라고 하더라도, 가까웠던 사람들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그 엄청난 사건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분명 ‘이별의 시대’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처럼 이별은 흔하고 익숙한 것이지만, 언제나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운 것이어서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면 누구나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사랑에 버림받은 연인들은 친구들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고, 전화통을 붙잡고 밤을 새우고, 심지어는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별의 고통이 정말 견디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별한 사람들이 느끼는 그 근거 없는 죄의식과 패배감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것도 서러운데, 이별한 사람들을 향해 사회가 던지는 시선을 결코 곱지만은 않다. 뭔가 잘못을 했으니, 남자가 떠났겠지. 무슨 사고를 쳤으니 여자가 떠난 게 분명해. 아무튼 뭔가가 있어… 이런 사회적 편견의 희생물이 되다 보면, 이별은 마치 더러운 속옷이나 찌그러진 냄비처럼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기를 쓰고 감추거나 위장해야 할 약점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고통의 근원에는 반드시 과오가 있고, 무언가에 실패했기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는, 비논리적인 사회적 미신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별한 사람들은 고통보다도 더 큰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어느새 죄 많은 패배자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자 프랑코 라 세클라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 겪게 되는 이별의 쓰라린 고통에 주목하고, 요즘 세태에 어울리는 방식, 다시 말해서 덜 고통스럽고 덜 과격하게 헤어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저자 자신도 아픈 이별을 경험했고, 그것이 집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종말을 한탄하는 최루성 수필집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여러 가지 이별의 형태와 개인적인 증언들을 담은 사례집도 아니고, 이별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실용서도 아니며, 이별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한 인문서도 아니다.
    이것은 다른 책들과는 뭔가가 조금 다른, 성격을 분명히 정의할 수 없는 묘한 책이다. 저자 자신도 말하고 있듯이 ‘성격이 애매한 미완성의 책’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이별이란 주제 자체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가 ‘이별을 이야기하다보면 화자話者 자신이 공중 분해되어버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을 때의 그 당혹감을, 저자도 느꼈는지 모른다.
    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굳힌 저자는 우선 거리로 나가 행인, 상인, 대학교수, 택시기사 등, 직업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그들로부터 수많은 이별의 이야기들을 채록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그들의 진술에 어떤 ‘변칙적變則的인 규칙들’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사랑과 이별에 관련된 몇 가지 신화적 주제들이 그 규칙들을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거기서 우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트리스탄과 이졸데, 음유시인들과 라일라와 마즈눈을 만나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 발레리의『수첩』,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그레이엄 그린의 『사랑의 종말』,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등을 통해서 사랑과 이별이 시대의 주도적 이념에 따라서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를 확연하게 파악하게 된다.
    중세문학에 등장한 '운명적 사랑'의 주제는 인간의 통제를 뛰어 넘는 치명적인 열정으로 서구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낭만주의 시대까지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발산하지만, 산업사회가 도래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근간을 이루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대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반면에 ‘영원한 사랑-열정’과 ‘영원한 가정-결혼’의 조작적 신화를 창조해 낸 미국 청교도 이념은 중산층의 수많은 이혼 사례에 직면하자, ‘영원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열정과 가정’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내어, 60년대에는 이혼했던 부부가 재결합하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가 성행하기도 한다.
    이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이념에 지배를 받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프리카의 부족인 투아렉은 이별의 순간이 찾아오면 전통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떠나고 새로운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도 여성에게 있으며, 아울러 이별은 숨기고 가려야 할 개인사가 아니라, 부족 전체의 운명이 관련된 집단적 문제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생산력 중심의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에게 이별은 고통의 근원도 죄의식의 대상도 아니다.
    그처럼 저자는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면서 풍속과 규범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추적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랑과 이별의 신화들을 분석한다. 그는 분석의 대상으로 고전과 현대작품은 물론, 영화와 노래, 신화와 풍습을 언급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저자의 인류학적 배경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책은 모두 아홉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열 번째 장이 있기는 하지만, 이 마지막 장에서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써넣을 수 있도록 백지로 남겨둔, 독특한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각 장은 우화처럼 엉뚱하고 상징적인 일화로 시작되는데, 그 일화의 심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주제에 대한 해석이 뒤를 잇는다.
    책에 포함된 각각의 일화는 이별을 소재한 하나의 완성된 꽁트를 연상시킨다. 함축적 의미가 포함된 그 이야기들을 통해서 독자는 자신이 경험한, 혹은 주위에서 들었던 이별을 떠올리게 된다.
    리타 미츠고가 노래했듯이, ‘사랑 이야기는 대체로 나쁘게’ 끝나고, 버림받은 사람들은 앙심과 원한을 끌어안은 채, 복수의 칼을 갈거나 변절한 연인을 향해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다. 배반이 잉태한 분노는 가장 소심한 사람도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만들고, 더할 나위 없이 큰 사랑을 나누었던 연인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치졸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이별의 희생자가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사회가 그들을 편견의 음지 속에 유폐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을 축복하고 화환을 바치던 사람들이, 이별과 이혼에는 등을 돌리고, 차별의 낙인을 찍는다. 우리는 모든 입문식은 있어도 출문식(出門式)은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이별은 사랑의 반대어가 아니라고. 사랑의 종말이 이별이 아니라, 이별은 사랑의 한 부분이라고. 이별을 사랑으로부터 갈라놓은 것은 타락한 이념이 생산한 사회적 담론의 결과이며, 이별의 담론은 푸코가 말했던 성적 담론만큼이나 통제와 억압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별이 많은 시대에, 사회가 이별을 사랑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이별의 고통으로 영락零落한 사람들을 사회의 이념적 오지에 유배시켜 버렸음을, 저자는 단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만남과 헤어짐을 생각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하고, 이별을 그 사랑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며, 이별의 죄의식에서 해방된 세상을 제안한다. 이별한 사람들에게 편견과 죄의식과 수치심의 희생자가 되기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이별도 사랑의 한 부분인 세상에서 새롭게 사랑하고 헤어지는 새로운 이별의 기술을, 그는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기쁨과 고통을, 풍요와 가난을, 희망과 좌절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서로를 아끼고 어루만지고 서로에게 온정과 배려와 쾌락을 베풀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함께 살면서 같은 침대에서 자고,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아기를 낳고 미래의 계획을 세우고 힘든 고비를 함께 넘기며 서로를 위로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심지어 하룻밤 인연을 맺었다고 해도 그들은 분명 사랑했던 사람들이건만, 결혼과 사랑과 친밀함이 종식될 때면 그들은 전례 없는 잔인함과 냉혹함으로 마치 그때까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사그리 쓸어버리겠다는 듯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칠고 과격한 종말을 맞이한다. 함께 했던 삶을 마감하기 위해서라면 그토록 무자비하게 돌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본문 28쪽
    사회는 이별의 순간을 억압하는 경향이 있다. 이별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별은 탄생이나 성인식이나 결혼이나 죽음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에 단절을 기록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일반적으로 그런 순간들은 기념식이나 시험.행사.축제.장례 등의 의식처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규칙과 관습에 따라 그 범주가 결정된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이별을 위한 어떤 제식이나 절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이 사라졌을 때 그것은 메울 수 없는 공백으로 남을 뿐,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사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 본문 113쪽

    이별할 때, 우리가 장례를 치르는 대상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상실이 해결하지 못한 상태로 남겨 놓은 것들이다. 사랑에 대한 이상적인 생각, 대상이 없어도 사랑이 존속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히 기다려야 할 대상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우리는 장사지내야 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사랑에 실패해도 이내 다시 일어나서 또 다른 사랑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없이 반문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한 줌의 의심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본문 173쪽

    기파랑 펴냄, 224쪽,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