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모사이드 ⓒ 뉴데일리
    ▲ 데모사이드 ⓒ 뉴데일리

    20세기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의 희생자는 4000만 명에 달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무려 4배가 넘는 1억 7000만의 사람들이 총알이 오고 가는 전투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살해당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 스탈린의 대규모 숙청,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기도 전에, 불과 10년 전 르완다에서는 인종과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단 100일 만에 100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다.
    열강에 의해 강요당한 좌우익의 이념 갈등 속에서 6.25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을 겪었던 우리 민족에게도 대량학살의 현실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과 대량학살의 위협은 상존하고, 세계 곳곳의 분쟁에서 수많은 군인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그 무분별한 살인행위를 막을 수 있을까?
    대량학살로부터 인류를 지켜내려는 학문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석학인 이 책의 저자 R. J. 러멜은 그 해답을 단 두 마디 '민주적 자유(democratic freedom)'로 요약한다. 자유의 확산과 전체주의 정권의 민주화만이 전쟁과 시민학살을 예방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숙한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은 불과 몇 시간의 비행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의 참상을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나 한낱 기사거리로 여기기 일쑤다. 바로 그 불감증과 무관심이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24편의 놀라운 연구서를 저술한 대학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됐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전문 연구서를 통해 대량학살의 현실을 알리기보다는, 한번 읽기 시작하면 그 재미와 감동으로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사이언스 팩션(Science Faction)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이 러멜의 연구 성과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독자들은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증언과 역사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간 주인공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투쟁을 통해, 평생 잊지 못할 가상의 역사체험을 하게 되는 셈이다.
    러멜은 2004년부터 네버 어게인Never Again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이 <데모사이드(War & Democide, Never Again)>다. 2004년 같은 시리즈의 소설 과 을 잇따라 출간했고, 2005년 4월 네 번째 소설을 출간할 예정이며 현재 다섯 번째의 작품을 집필 중에 있다. 네버 어게인 시리즈는 6편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그의 소설이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러멜 자신이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군 공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시절, 포화 속에서 거리를 헤매던 고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는 평생을 전쟁의 참화에서 인간을 구하는 연구에 종사하기로 결심했고, 지금도 그때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서재에 불타는 서울 거리에서 한 소녀가 어린 동생을 업고 울고 있는 그림을 걸어 놓았다.

    소설은 인디애나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 존 뱅크스가 9.11 참사를 겪으면서 시작된다. 비극의 현장에서 사촌을 잃고 강의실로 돌아온 존은 신비로운 동양계 미인인 제자 조이의 손에 이끌려 ‘생존자 자선회’라는 비밀결사 모임에 참석한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중국의 홍위병, 르완다의 후투족 게릴라, 우크라이나를 기아의 지옥으로 만들었던 소련의 스탈린, 홀로코스트의 현장이었던 독일 제3제국의 히틀러…. ‘생존자 자선회’는 이처럼 끔찍한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20여 명이 세계적 기업의 총수, 다국적 IT기업의 CEO, 은행가, 과학자 등으로 거듭난 후 조직한 비밀결사다. 존과 조이는 ‘생존자 자선회’가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엄청난 자금과 기술을 이용하여 발명한 타임머신을 타고 모종의 임무를 띠고 과거세계로 향한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 과거 전쟁과 대량학살의 원흉들을 차례로 제거해 20세기 인류가 겪었던 참극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다.
    조이와 함께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 존은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생존자 자선회’가 보내준 엄청난 재물과 증시의 흐름을 미리 알 수 있는 과거의 주가시세표를 가진 두 사람은 우선 기업을 설립해 자금과 명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무기를 확보하는 등 본격적인 임무에 착수할 준비가 되자, 첫 번째 작전 수행지 멕시코로 향한다. 그들은 마데로를 지원해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고, 판쵸비야와 사바타를 암살함으로써 멕시코 전역을 휩쓸었던 혁명과 내란의 요인을 제거한다.
    다음 단계로 한국강점을 꿈꾸는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만주의 독립군을 지원하여 일본의 대륙침략 기도를 무산시킨다. 이어 중국으로 건너가, 위안스카이를 암살하고 쑨원을 대통령 자리에 오르도록 해 중국 민주화의 길을 열어 놓는다. 또한 그들은 유럽의 호전적 강경파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내 전쟁의 위협을 막고,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사라예보 방문을 교묘히 방해하는 방법으로 아피스의 암살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어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직접적 원인을 원천봉쇄한다. 마지막으로 히틀러, 스탈린 등 악명 높은 독재자들을 암살해 이 지구상에서 전쟁과 대량학살의 모든 원인들을 제거한다.
    소설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존이 ‘생존자 자선회’ 회원들로부터 그들이 직접 체험한 대량학살의 끔찍한 참혹상을 듣고 난 뒤 타입캡슐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2부에서는 두 주인공이 전 세계를 누비며 독재자와 살인마들을 처단하는 통쾌한 활약상이 펼쳐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기술로 인해, 마치 20세기 국제정치와 시민학살에 대한 살아있는 강의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에도 생생한 감동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제상황을 방불케 하는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증언과 두 주인공의 목숨을 건 투쟁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울러, 두 젊은이 사이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운명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선사한다.
    이 책의 제목 <데모사이드>는 저자인 러멜 교수가 만들어낸 신조어. 데모사이드 Democide는 Demo-cracy(민주주의)나 Demo-graphy(인구학) 등의 접두어 Demo(인민, 민중)와 Patri-cide(부친살해), Sui-cide(자살) 등의 접미어 Cide(살해, 살인)를 합성한 것으로 시민학살, 또는 민주주의 죽이기를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데모사이드(Democide)란 정부 등 공권력이 살의(殺意)로 시민을 살해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자식을 영양실조나 위험에 노출시켜 죽게 만드는 것도 살인이라고 부를 수 있듯이, 정부가 강제노동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거나 기아상태를 야기하여 아사(餓死)를 유발하는 것도 데모사이드다. 그리고 전시(戰時)에 무차별 폭탄세례를 퍼부어 비무장 민간인을 죽이는 것도 데모사이드로 부를 수 있다.
    러멜은 데모사이드를 ‘정부가 종교, 인종, 언어, 출신종족, 계급, 정치, 반정부행동 등의 이유로 시민을 죽이거나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폴란드 법학자인 렘킨(Raphael Lemkin)교수가 나치독일이 자행했던 유대인 학살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제노사이드(Genocide)는 꼭 정부에 의한 행위가 아니더라도 ‘인종과 민족, 종교적인 이유로 집단학살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다소 모호한 개념인 데 비해, 데모사이드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죽이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보다 명쾌한 개념이다.
    데모사이드는 21세기에도 전체주의 정치체제를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다. 러멜 교수가 자유주의 평화이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 국가는 대량학살을 저지르지 않고, 교조적 전체주의 국가들만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이 인류의 안위에 필수적이라 믿는 것이다.
    데모사이드라는 용어와 러멜의 자유주의 평화 이론은 일제의 난징 대학살을 추적하다 결국 자살로 내몰린 아이리스 창Iris Chang의 저서 <난징대학살 The Rape of Nankin> 등 여러 주요 저서에 인용될 정도로 국제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개념이다. 국내에선 샤란스키의 <민주주의론>만이 많이 인용됐으나 러멜의 민주평화이론은 부시 대통령의 2기 취임사와 라이스 국무장관의 연설에 반영될 만큼 현재의 복잡한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한 주요한 이론이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선 그의 저서나 논문 등이 많이 번역돼 있지 않아 그의 이론의 실체를 가늠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데모사이드>는 소설적 재미만이 아니라 이런 국제정세를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까지 선사하는 보기 드문 팩션(Faction)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기파랑 펴냄, 512쪽, 9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