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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 만들어 지휘자까지 치과의사 양영태(梁榮太) 원장. 1944년생이니 올해 나이 예순 다섯. 환갑을 훌쩍 넘겼지만 그에게선 에너지가 흘러 넘친다. 쇳소리가 약간 섞인 목소리에는 힘이 있고 손바닥은 야구선수의 손처럼 단단하다. 몸은 군살 없이 날렵하다. 어디에도 나이든 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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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영태씨 ⓒ 뉴데일리
지난 4월 6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에 있는 치과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며칠 전 약속을 잡을 때 그는 “월요일 오후 7시에는 중요한 약속이 잡혀있기 때문에 오후 5시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아무리 높은 사람이 밥 먹자고 해도 월요일 저녁은 노 생큐”란다. 7시가 다가오자 그의 얼굴은 소풍을 앞둔 소년처럼 해맑은 설렘이 번져갔다.
그를 기쁘게 하는 건 여의도 한국노총 강당에서 열리는 서울글로리아합창단 주례모임. 양영태 원장은 1995년 서울글로리아합창단을 만들어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합창단 단장 겸 지휘자로 위촉되었다.
기자가 양영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계기는 인터넷상에서 그가 ‘우파 칼럼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파 칼럼니스트’로 유명한 그가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안 건 나중이었다. 치과의사가? 하고 관심을 기울이자 예상치 못한 그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드러났다. 서울글로리아합창단 지휘자, 국민행동본부 부본부장, 자유언론인협회장, 인터넷타임스 대표발행인…. 치과의사 신분으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해내고 있는 인물 양영태.
양영태 원장이 지난 3월 17일에 쓴 칼럼 ‘중도 웰빙족 정치꾼들에게! - 아스팔트 우파는 애국적 호헌 안보세력이다’는 인터넷은 물론 오프라인, 정치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칼럼의 일부를 다시 보자.
‘…헌법의 가치와 국가안보에 대한 명백한 국가관을 가슴에 안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 대한 확신 그리고 법치에 대한 드높은 신념 체계 속에서 자기를 희생했던 ‘행동하는 우파’를 향해서 수구니, 극우니 하며 폄훼하는 일부 말깨나 하는 집권여당 소속 정치꾼 인사들은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모르는 ‘어정쩡 세력’ 또는 ‘회색분자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온정보수니, 온화한 보수니 하는 말 같지 않은 조어(造語)들은 모두 사사로운 정치적 특정목적을 달성키 위해 사이비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사행성 포퓰리즘적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지난 10년에 걸친 친북좌파정권의 종식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마냥 사과가 ‘떨어질 때’가 되어 자연히 종식된 것으로 착각하는 자칭 중도주의자들은 진정한 보수의 의미를 아직도 모르는 허깨비 보수들이다.…’
만만치 않은 내공(內功)과 필력(筆力)이다. 그가 인터넷상에 칼럼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04년쯤부터. 노무현 정권의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그는 수백 편의 칼럼을 썼다. 직업 칼럼니스트도 하기 힘든 일이다. 병원이 환자를 받기 시작하는 시각은 오전 9시. 그는 매일 8시에 출근해 병원문을 열 때까지 글을 쓰거나 신문을 본다. 일주일에 보통 3~4건을 올린다. 그가 생각하는 ‘가장 반향이 컸던 칼럼’이 궁금했다.
“정연주, 자네가 형이라고 불렀던 양영태다…당당히 공개토론에 나와 진위를 가려보세”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정연주, 자네가 형이라고 불렀던 양영태다’(2008년 1월 4일자)라고 했다. 2008년 1월이면 KBS 사장 정연주가 진퇴 문제로 정부와 불협화음을 보이고 있을 때문이다.
그는 서울대 치대 출신이다. 치대 학생 시절 그는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 기자를 3년간 했다. 그때 정연주가 대학신문사에 후배기자로 들어왔다.
“대학신문사에서 연주는 내 조수였다. ‘형’하며 나를 많이 따랐다. 내가 무척 아꼈다. 밥도 많이 사주고. 사회에 나와서도 가깝게 지냈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이후 미국 갔다 와서 한겨레신문에 다닐 때도 만났다. 정연주가 KBS사장이 되었을 때도 축하난을 보냈다. 전화를 여러 번 했는데 연결이 안 되다가 힘들게 한 번 통화했다. ‘인사를 앞두고 있으니 끝나고 형님께 전화 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곤 전화가 없었다. 그 뒤에 KBS일요스페셜에서 ‘좌파 vs 우파’를 만드는데 우파 입장을 말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병원 진료를 안 하고 토요일 하루를 완전히 촬영에 협조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았다. 비공식적으로 확인해 보니 정연주가 내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들었다.”
이 일로 양 원장은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는 KBS프로그램을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은 KBS 사장 정연주가 2008년 1월 1일에 행한 발언 때문이었다. “공공 가치의 수호를 위해 KBS의 정치적인 독립성을 확실히 뿌리내리고 재원을 공영화해야 한다. 올해 KBS는 방송 지표를 ‘하나되는 대한민국 함께하는 KBS’로 정했으며 경영 목표는 ‘공공 가치의 중심 KBS’이다.”
양 원장은 칼럼에서 “자네가 말한 내용이 언론에 나오자마자 나는 또 다시 잊어버렸던 자네에 대한 분노가 다시 깨어나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이 공개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지난 5년 동안 자네가 대한민국의 헌법이념을 초토화시켰던 KBS 악성프로그램들을 낱낱이 분석하고 정리하여 자네가 대한민국에 행한 죄악상을 밝힐 날이 곧 올 걸세! 자네는 다른 나라로 도망가지 말고 당당히 나와 공개 토론에 나서서 자네가 행했던 반헌법적, 반국가적 행위에 대해 집중토론을 벌이고 그 진위(眞僞)를 가려보세!”
이 칼럼에 대한 반향은 컸다. “굉장했죠, 좌파의 행동대장을 그래 놨으니까”라며 그는 웃었다. 보수 논객으로서 그에겐 성역(聖域)이 없다. 2004년에는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꼼꼼하게 분석해 ‘민주노동당의 반헌법적 강령 그대로 둘 것인가’(한국논단)를 발표했다. 민주노동당 강령의 친북적 조항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이다. 그는 보수우파의 가치와 기준에 벗어나면 누구도 비판의 도마에 올린다.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의원,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이 갈등을 빚을 때 쓴 ‘박근혜, 차라리 갈라서라’도 파문이 컸다. 박근혜 지지자들로부터 욕도 무지하게 먹었다. 박근혜 의원과의 특수한 관계를 고려하면 그의 비판 칼럼은 의미가 달라진다.
박근혜 치료가 인연돼 언론특보로 활동…5공 때 전국구 제의 받았지만 “난 정치 안 맞아”
박근혜 의원과의 특수관계? 그는 1984년 1월 대령으로 예편했다. 군의관 시절인 1974년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박근혜·박근령·박지만)의 치과주치의로 임명되었다. 치과주치의로서 대통령 가족과 사적 공간에서 만나는 경험! 박 대통령 가족 치과주치의는 1979년 10·26사건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그는 전두환 대통령 치과주치의를 1984년 1월까지 했다. 대통령과 대통령 가족을 치과주치의로 만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그것도 권위주의 시대에.
“큰 영애(박근혜)는 영부인 역할을 할 때부터 치과 치료를 했다. 사랑니도 내가 뽑았다. 주치의는 로열티(충성심)를 갖고 있어야 한다. 뽑을 치아라도 어떻게 해서든 살려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지냈다. 방법은 공부밖에 없었다. 정말 맹렬하게 공부해야만 했다. 이때가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한 시기였다. 두려움과 영광과 보람이 교차한 순간들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치료를 받을 때면 꼭 잠을 잤다. 대부분은 긴장해서 잠을 잘 수가 없는데, 정말 대범했다. 대통령과 대통령 가족들은 치료 후 내가 ‘이거 이거 하십시오’ 하면 정말 철저하게 수칙을 지켰다.”
박근혜 의원과의 인연은 이후도 계속된다. 박 의원이 2001년 한나라당을 탈당,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을 때 양 원장은 언론특보를 지내기도 했다. 양 원장은 오랜 인연이 있는 박근혜 의원을 비판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이 곤경에 처했을 때 꼭 그렇게 때려야 하나? 야당 스탠스와 비슷하다고 봤다. 용산참사 때도 그렇고. 특히 김정일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보수의 입장에서 그렇게 가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떤 연유로든 한번 권력 가까이에 가면 정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커리어가 좋은’ 사람이다. “서른일곱 살 때 전국구 의원을 할 용의가 있느냐는 제의를 받았지만 정치가 안 맞는 것 같아 거절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얼마 뒤에는 환경청 차장(1급) 자리를 맡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는 “주저하다가 사양했다”고 말한다. 그 이후에도 정치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
김현희 치료 날은 경호원이 병원 에워싸…웃는 얼굴이었지만 강인함과 절도 느껴져
노태우 정권 말기, 권력 측은 그에게 특별 관리를 받는 인물의 치아를 관리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인물이 병원에 올 때면 경호원 수명이 병원을 에워쌌다. 1987년 12월 KAL기 폭파 사건의 범인 김현희였다. 그는 “김현희는 아침 일찍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오곤 했다”면서 “김현희가 오면 오전 11시까지는 다른 환자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7년 12월 김현희가 수갑을 찬 채 압송된 후 4년여가 지났을 무렵이다. 북한 공작원의 태가 많이 남아 있을 때다. 그 시절 김현희의 얼굴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안기부에 의해 특별관리를 받던 김현희가 치과 치료를 받으러 몇 년간 여의도에 정기적으로 나타났다! 대통령과 그 가족의 치과주치의를 맡은 그였지만 김현희와의 만남에 더 호기심이 발동했다.
첫 느낌은 어땠나.
“피부는 백옥처럼 희었다. 건강미가 확 느껴졌다. 하지만 억센 평안도 사투리가 고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처녀가 KAL기를 폭파하다니, 공산주의 이념이 참 무섭다는 전율을 느꼈다.”
김현희와 대화를 나눴나.
“그렇다. 진료가 끝나면 경호원 동석하에 20~30분간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기념 사진도 찍었다.”
김현희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무엇인가. “어느 정도 친해졌을 때 내가 웃으며 농담으로 물었다. ‘김현희씨, 맨몸으로 남자 몇 명 정도 해치울 수 있어요?’ 그러자 김현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두 사람까지는 문제 없어요’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움찔했다.”
김현희를 정기적으로 수년간 만나면서 느낀 총평은 어떤 건가. “강인함과 절도였다. 생긋생긋 웃고 농담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것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경호원들이 ‘다리가 돌처럼 단단하다’고 했지만 내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옷을 입은 상태에서도 단단한 느낌이 전해졌다. 체력·정신력·교육면에서 김현희는 뛰어났다.”
의학·신문학·지휘 전공, 석사 학위만 3개 아침운동 40년 …“음악할 때 가장 행복해”
병원 응접실에는 다방면의 사회활동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많다. 임명장, 기념패, 위촉장, 사진 편액, 합창단공연 포스터 등이 어림잡아 100개는 훨씬 넘는다. 양 원장은 석사 학위만 3개다. 의학, 언론, 음악 등 전공도 다양하다. 장교 시절인 1970년대 초 서울대 신문대학원에서 공부해 신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찌감치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떴다. 이후 미디어와 관련된 대한치과의사협회 공보이사, 세계치과의사총연맹 대변인 등을 맡았고 민영주간지 치과타임스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그는 “치과타임스를 발행하면서 이제까지 10억원은 까먹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1984년 치과 개업 이후에는 중앙대 예술대학원에서 음악과 지휘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 한국지휘자아카데미도 수료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하기 힘든 것을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뤄낸 것이다. 요즘 많이 나오는 학문의 융합과 통섭이다.
그는 혹시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이 아닐까. 중고교 시절 성가대 합창단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는데…. 고교 시절 교사가 ‘서울대 음대를 가면 수석으로 합격할 수 있다’며 음대 진학을 권했지만 그는 음악을 직업으로 택하지 않았다.
치과의사라는 생업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에게 제일 궁금한 게 있었다. 이 다재다능한 인물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사는 재미를 느낄까.
“음악이 제일 재미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합창단 모임에 가려고 한다. 쓰러지지 않는 한 거기 가면, 일단 그 공간에 들어가면 광기가 발동한다. 혼을 빼앗긴다. 음악 세계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직업 음악가의 길을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음악을 업(業)으로 했으면 이렇지 않을 것이다. 직업이 되면 열락의 세계에 빠지지 못한다. 순수한 음악을 지향하는 아마추어들만이 열락에 빠질 수 있다.”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배우는 점은 어떤 건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의사를 하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 음악은 순결하고 정결하다. 부족하고 다른 소리를 하모니로 만들어가는 게 합창 지휘다. 화음을 만들면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맛본다.”
그 정력과 열정이 부러웠다. 한편은 건강이 걱정되기도 했다. 저렇게 무리하다가…. 그는 “40년 이상 아침마다 헬스크럽에서 운동을 해왔다”면서 “벗어보면 몸이 단단하다”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가슴팍을 두드려 보였다.
부인 김희숙씨와의 사이에 1녀1남을 두었다. 딸은 미국에서 타일디자이너로 일한다. 아들은 미국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코넬대 로스쿨을 거쳐 현재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국책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남편의 팔방미인적 인생에 비하면 김희숙씨는 소리내지 않는 스타일. ‘대한민국에서 조용한 사람 3% 안에 든다’는 게 남편의 평가다.
양영태.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 3%에 들 것이다. 든든한 생업이 있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줄 아는 능력이 있고 또 음악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이쯤 되면 어떤 권력인들 부러울까. 그가 만일 회화나 조각에도 소질이 있었다면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휴대폰 컬러링을 여러 번 들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언제들어도 기분 좋은 노래. 동구 공산권을 무너뜨린 88서울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였다. [주간조선 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