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시론 '문패도 번지수도 실종된 정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토록 힘 못쓰고 허우적허우적하는 한나라당 앞으로 ‘금치산(禁治産) 선고장’ 한 통이라도 떼어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 건국 60년 사상 최고의 무기력·무정치력·무소신의 집권당’이라는 내용으로. 왜 172석의 공룡 집권당이 국회 원구성조차 2개월이나 못하고 있는가? 등원 선언한 자유선진당 18석과 무소속까지 합치면 의석 3분의 2가 우파. 이것 양보하면 저것 내놓아 발목잡는 민주당과 끝까지 협상해서 원구성한다? 국민이 태산같은 덩치를 만들어 주었는데도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한나라당을 쳐다보며 이해찬 유시민이 지금 빙그레 웃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어처구니없어 할 것이다. 민주당이 들어갈 것 같은가? 정국을 이대로 끌고 가면 이명박 정권을 주저앉힐 수 있다는 확신이 서 있는데도?

    한나라당은 대통령 이명박의 실용주의를 그저 누르면 누르는 대로 쑥쑥 들어가는 물러터진 찰흙 고무덩어리 정도로 인식하기 때문에 돌파 정치를 못하는 것이다. 왜 우익 정파들을 모조리 규합해 벌떼처럼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한나라당은 당대표 박희태부터 말단 당원에 이르기까지 이해찬 유시민을 모셔다 놓고 ‘정권유지론’에 관해 특강이라도 들어야 한다. 의회민주주의의 본령이 다수결 원칙 아닌가? 박희태는 감동의 정치를 공약하더니 감동은커녕 ‘노인대학장’처럼 흐물흐물 덕담만하고 있다. 왜 대통령과 청와대가 사사건건 집권당을 간섭하느냐고 따져묻다가 안 통하면 계급장 떼고 담판해야 할 것 아닌가? 더 이상 무슨 욕심이 있다고. 이명박이 가만 있어도 권한을 줄 거라고 믿는가?

    그나마 원내대표 홍준표는 좌충우돌하긴 하지만 이 정권 안에서 ‘악역’을 해온 유일한 인물이다. 이렇게 악역이 없는 정권도 처음이다. 박지원을 모르는가? 집권당 원내대표가 청와대 정무수석한테 일일이 결재받고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가? 쇠고기 파동 내내 불법 시위대를 향해서는 한마디 못하던 친이명박계가 기다렸다는 듯이 ‘홍준표 이지메’에 앞장서고 있다. 친이계부터 악역 하겠다고 줄줄이 나서야 할 것 아닌가? 비겁하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대통령, 청와대, 한나라당, 내각 가릴 것 없이 권위도, 권력도, 정치력도 모두 상실하고 있다. 권력의 핵심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있고, 정국과 국가적 어젠다를 끌고갈 일관된 청사진도 없이 이리뛰고 저리뛰는 오합지졸이 돼버렸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대통령 이명박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실용주의라는 주술 때문이다. 총으로 민간인을 사살해놓고서도 생떼를 쓰는 북한을 당·정·청 모두 뻔히 쳐다만 보고 있다. 김대중으로부터 “이명박 대통령이 금강산 사건과 남북교류를 분리 대응한 건 잘한 일”이라는 극찬을 듣고 있다.

    김대중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모시고 있다. 국정원장, 외교통상부장관, 통일부장관, 국방부장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외교·안보라인이 예외없이 노무현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인물들.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칠 엄두라도 낼 것 같은가? 노무현이 이 정권의 ‘상왕’이다. 오히려 민주당 대표 정세균이 “적반하장이다. 잘못된 태도다”라며 김정일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 들고 있다. 한나라당은 꿀먹은 벙어리! 기가 막히다. 국무총리는 김대중 정권 때 외교통상부장관. 대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공권력 수장들도 노무현이 임명한 인물들. 이들의 집에 가보면 노무현한테 임명장 받는 기념 사진이 거실에 걸려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전투경찰들이 대한민국 심장인 수도에서 발가벗겨진 채 두들겨맞을 수밖에.

    결국 이명박의 지지도 급전직하는 태상왕 김대중, 상왕 노무현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이 없는 실용주의의 처참한 패배다. 좌파 포퓰리즘을 흉내낸 우파 포퓰리즘의 몰락이다. 실용주의 앞에 ‘법과 원칙이 살아 숨쉬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문패를 다시 달고 번지수를 다시 찾아 새출발해야 하며, 그것이 대통령 이명박의 8·15 경축사를 지탱하는 뼈대가 되어야 한다. 또 말만 번지르르한 실용에 그친다면 국민은 이명박 정권을 중환자실에 보낼 시점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