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황호택 수석논설위원이 쓴 '촛불시위 속의 내전(內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비가 간간이 내렸던 4일과 현충일인 6일 촛불시위 현장에 참여해 관찰을 했다. 인터넷 매체들은 촛불집회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지만 촛불에 파묻혀 쓰는 기사만으로는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진보를 표방하는 신문들은 쇠고기 촛불시위를 21년 전 전두환 독재정권 때 벌어진 6월 민주항쟁에 비유했다.
    4일은 평일인 데다 낮에 비가 와서 참석자는 2000명(경찰 추산) 정도였다. 우천(雨天)을 무릅쓰고 나온 열성파 ‘꾼’들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6일은 휴일인 데다 비가 오지 않아 양상이 확연히 달라졌다. 엄마 손을 잡고 나온 초등학생도 있었고 어린 딸을 무동 태운 아빠의 모습도 보였다. 중고교생들도 많았다. 촛불을 들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도 있었다.

    5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 7700여 개 위패를 설치했던 대한민국 특수임무동지회는 6일 위령제를 마치고 철수했다. 과잉 진압 시비에 시달리던 경찰은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 왕복 10차로를 완전히 촛불시위대에 내주었다. 고성능 스피커의 정치적인 구호만 없었더라면 가족 나들이를 나온 시민이 평화롭게 ‘차 없는 거리’를 즐기는 풍경이었다. 인터넷 매체는 참석자를 20만 명이라고 보도했으나 경찰은 5만6000명으로 집계했다.

    순수와 ‘꾼’이 뒤섞인 시위 현장

    6일 집회가 시민의 동조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시위였다면 4일 집회에서는 주도세력의 면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청 앞 ‘비상시국 농성장’ 텐트 안에는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와 한상열(통일연대 상임의장) 목사가 눈에 띄었다. 그들 외에도 평택미군기지 이전 저지나 효순 미선 양 추모 같은 친북반미집회에 단골로 나오는 얼굴들이 자리를 잡았다.

    청계광장에서 무대로 사용되는 트럭은 민주노총 소유였고, 시청 앞 서울광장 트럭에는 화물연대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노점상은 촛불을 2000원에 팔고 있었는데 시위현장에서는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필자에게도 촛불을 주었다. 주최 측은 참가자들에게 빵과 요구르트 생수를 제공했다.

    서울광장에는 철도노동조합 민주노총공공노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깃발이 나부꼈다. 전국공무원노조 서울지역본부는 서울시의 무능 공무원 퇴출제도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여 놓고 있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영어몰입교육과 자사고 확대 그리고 광우병 쇠고기를 비난하는 손가락 모양의 부채와 팸플릿을 돌렸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산하의 서총련 깃발이 펄럭였다.

    시위 현장의 무대 주변에는 KBS MBC YTN 중계차량이 몰려 있었다. 오마이뉴스 중계차와 진보신당 인터넷방송 칼라TV의 차량도 보였다. 주류(主流)신문의 취재차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자가 동아 조선 중앙 문화를 ‘미국으로 보내자’고 외치는 판에 현장에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의 ‘미디어 오늘’ 651호가 시위현장에서 무가지로 배포됐다. ‘촛불, 반(反)조중동 운동으로 번져’가 1면 톱기사 표제로 달려 있었다. 16면 거의 전부가 ‘아날로그 권력’ ‘올드 미디어’ 운운하며 세 신문을 공격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좌파매체의 주류신문 공격 기사를 읽다 보면 총성 없는 내전(內戰)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촛불시위가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미국의 양보를 받아내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위가 한 달째로 접어들어서도 끝이 보이지 않자 일각에서는 피로감이 나타나고 있다. 시위행렬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차량들은 짜증스럽게 경적을 울렸다. 광화문 일대의 식당들은 손님이 끊겨 3일 연휴 주말에 종업원을 휴가 보내고 문을 닫은 곳도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침묵하던 보수단체들까지 나설 예정이어서 이념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촛불시위 주최 측은 6월 10일에 열릴 ‘100만 촛불 대행진’ 홍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6·29 선언처럼 이명박 정권의 항복을 받아내자는 것일까.

    주류신문에 대한 공격 도 넘어

    필자는 21년 전 덕수궁 앞에서 6월 민주항쟁의 현장을 지켜봤다. 6월 10일 정오 인근 빌딩에서 넥타이를 맨 회사원들이 몰려나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함성을 질렀다. 거리를 지나는 차량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진보매체들이 촛불시위를 6월 민주항쟁에 비유하는 것은 ‘과장이 심한 작문(作文)’이다. 촛불시위에 나온 젊은이들은 그해 6월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대부분이다.

    무능하고 안이한 ‘강부자’ ‘고소영’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은 재·보궐선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촛불시위가 한 달을 넘겨 무기한 지속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시민이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