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문(陰門)이 찢겨진 여인의 시체

    성종 19년(1488년) 5월, 음문(陰門)이 깊게 갈라져 그 상흔이 대장과 항문에 이를 정도로 하체가 처참하게 찢겨진 채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여인의 시신이 물에 떠내려 왔다. 그 형체가 너무나 참혹해 이를 보고 받은 성종이 의금부와 형조, 한성부에 걸쳐 모든 백성들이 자신의 지엄한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일일이 어명을 내릴 정도의 사건이었다.

    “이번에 떠내려 온 여인의 시체를 검시한 보고서를 살펴보니 그 잔인함과 참혹함이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도다. 이는 미천한 일반 백성들이 감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필시 사대부가의 표독스런 아낙이 첩을 죽도록 질투해 그 못된 마음을 해결하고자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무릇 사대부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니, 이런 행동은 내가 나라를 다스려가는 것에 결코 이로움이 없을 것이며 나의 뜻을 역으로 삼는 행동일 뿐인 일이다. 지금의 세상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곧바로 아뢰지 않고 거짓을 은폐하려다가 처의 일에 연좌되어 끝내 이 세상을 하직한 이맹균의 전철을 되밟지 말지어다. 즉시 사실을 직고하면 그 죄를 용서해 줄 것이지만,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속인 그 죄를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이 말들을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잘 알 수 있도록 널리 전하도록 하라.”

    사건을 보고 받은 성종이 즉시로 그 범행의 형세에 대해 예단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비첩에 대한 정처의 잔혹한 학대가 드물지 않았던 시대였다. 또 비첩이라 해야 여 노비 스스로 자신의 의지 하에 첩의 상태에 놓였던 것이 아니라, 신분과 권세를 앞세운 위력에 눌려 어쩌지 못하는 날들을 반복하고 있었던 터가 많았으니, 그들의 말 못하던 한들은 지금에까지 사라지지 않고 메아리치고만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이 외부에 알려졌을 때, 당시 조정에서 이를 문제 삼았던 근본적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억울하게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거나,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잔혹한 학대를 받은 여 노비의 처지를 살피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질투함으로 인해 그런 참혹한 행위를 일삼은 정실의 행동은 곧 가부장제 하에서의 가장의 권위를 침탈하는 것이었고, 유교 문화 하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만 했던 그들의 위치를 박탈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그로써 당시 사회의 법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근절해야만 했던 행동들이었다. 또한 처의 극악한 행실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방조하였거나 혹은 그 사실을 몰랐던 경우에서도, 문제의 당사자인 사족 남성들을 가볍게나마 그 죄에 연좌시켜 처벌했던 것은 다름 아닌 관리부실에 따른 책임을 물은 것일 뿐이었다.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해 처로 하여금 질투하는 마음을 인내하지 못하도록 했으니,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신분에 따른 불평등과 그로 인해 생겨났던 불합리한 모순들이 단지 우리나라만이 가지는 독특한 역사적 현상은 아닐 시대였으니, 그렇다 해서 지금의 우리가 위축되기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조선조라해서 지배계급의 위치에 있던 사족 남성들만이 활개를 치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본능에 있어서는 시대의 상황이 아무리 그러했든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라도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가장 근원적 잘못은 언제나 인간 본능의 잘못된 표출일 뿐이었다. 또 이 시대를 돌아보며 반드시 오늘에 반추해볼 것은, 누구에게나 예외일 수 없는 공평 타당한 법과 제도의 성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리라는 생각을 빠트릴 수 없다.

    사건을 담당한 책임 관리들이 성종에게 아뢰었다. 범죄 행각을 캐고 들어갈 사건의 윤곽을 파악해내기가 매우 어려우니 밀고(密告)를 받아 처리해나감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필요성을 인정한 성종은 그 경우 원수진 사이끼리의 무고로 인해 피치 못할 피해가 발생할 것을 특히 염려하며, 그런 폐단이 생겨나지 않도록 특별히 신중을 기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뚫린 발뒤꿈치를 삼끈으로 묶인 여종

    당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우선 시체가 유기된 지역 인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문을 행하여갔다. 그러다보니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이 잡혀 들어와 고문을 당하기가 일쑤일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의 사건은 그 시체가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숨진 여인이 누구인가조차도 확인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그때는 신분제도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노비가 제 주인의 잘못을 관아에 고발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받고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사건의 성질상 죽은 여인의 실상에 관해 노비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노비만을 한정하여 제한하지 않으면서, 그 밀고함을 허용하여 단초를 찾아낼 것을 시초부터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노(私奴)가 자신의 조카딸인 여종 효양(孝養)이 그 주인에게 극한 형벌을 당한 후 어디로 사라진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고소해왔다. 사노 마미치(馬未致)의 밀고에 의해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공신이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르기도 한 유하(柳河)의 첩 소생 유효손(柳孝孫)이 잡아들여졌다. 그를 심문해가자 유효손은 의외로 당당하게 자신의 소행을 자백했다. 그 말인즉슨, 여종 효양이 여러 번 도망하는 것에 화가 나 불에 달군 쇠로 다리의 근육을 지져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그 발뒤꿈치를 뚫어 생긴 구멍을 삼끈으로 묶어두었다는 것이다. 비록 시체가 유기된 사건에 관련된 일은 아니었지만, 그 끔찍함이 너무나 잔인하여 나라에서도 형벌로 쓰기를 금하고 있는 포락형(炮烙刑)을 유효손이 사사롭게 행하였다는 것에 성종은 크게 노하였고, 유효손의 직첩을 회수함과 더불어 효양과 그 노비 일족들을 그에게서 빼앗아 관아에 속공(屬公)토록 했다. 노비들에게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사족들에게 현실상의 경제적 손실을 가함으로써 그런 행위를 금할 것을 경고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이다.

    유효손이 추국(推鞫)을 받을 동안 자신과 가족들이 유효손의 손을 벗어나 관아에 속공된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 한쪽의 두려움을 덜게 된 여종 효양이 그와 대면하였을 때, 그동안에 참고 참아왔던 원망의 소리를 쏟아내 갔다.

    “그동안 당신이 나를 강간하려는 것을 피해 도망 다니다 지금 내 꼴이 이 지경이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

    유효손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위압하려는 형세로 바라보자 효양이 다시 힘주어 말했다.

    “나를 강간하려 하지 않았다는 태도란 말인가?”

    분노를 터트리며 재차 다그치는 효양의 태도에 유효손은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사악한 욕정을 채워보고자 여종을 강간하려 했다가 매번 이를 피해 도망한 효양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여종 효양과 그 일족을 속공하라 한 성종의 조처에 대해 대신들이 연이어 불가함을 아뢰어왔다. 유효손의 행위는 잔인함이 극심하나 여종이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노비들을 빼앗아 속공시킨 것이 가중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번 조처로 인해 노비들이 그 주인을 어렵게 보지 않고 제 뜻대로만 행동해나갈 염려가 크니, 속공토록 한 조처를 취소해야 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성종은 한낱 얼자(孽子)일 뿐인 유효손의 포악함이 그와 같을진대, 하물며 그보다 더한 사대부 집안의 실정은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형편일 것이 명확한 사실이니, 이번 일을 크게 징계하여 모두를 경계함이 옳다하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리무중 시체유기 사건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밀고함을 권고하자 그동안 속만 태우며 어쩌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의 고소가 연이어 터져 나와 본 사건과 관계없는 옥사(獄事)로 인해 많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만큼 당시 사회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형편에 처해 있던 사람들의 쌓이고 쌓여있던 한들이 많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성종은 그런 폐단을 없애고 시체유기사건에 집중토록 하기 위해 뚜렷한 관련사항이 없을 시에는 비록 의심된다 하여도 고신을 행하지 말고 석방하여 내보낼 것을 명했다. 또한 사건의 파악이 더 이상 진척 없음을 이유로 해당 관리들을 교체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더불어 이는 필시 대가(大家)에서 생겨난 일이 분명하다 하며 관련이 있을 만한 사대부가를 일일이 기록하도록 하고, 관련 당사자로서 제일 먼저 그 사실을 고하는 자는 죄를 면해 줄 것이라는 특단의 조치까지 취했다. 그렇게 사건은 계속 돌고 돌아 제자리걸음만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보름이 훌쩍 넘어가는 때였다. 유기된 시신의 연령은 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뜨린 20세 미만으로 추정되는 젊은 나이의 여인이었다. 그러던 한 날 혐의자들을 잡아들여 추국하고 있던 한 장소에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로소 죄인을 잡았다는 소란이었다. 이화(李譁)라는 자가 범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조정에서는 또 한 번의 소란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었다. 심문이 진행되면서 이화와 관련되어 잡아들인 자들의 자백이 일치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성종은 이화를 옳게 회유하도록 어명을 내렸다. 여종을 죽인 죄가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일은 아니니, 그 실정을 자백하면 마땅히 가장 가벼운 벌에 처할 것이나 만약 감추어 나중에 발각되었을 시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사건이 풀려나가지 않자 성종은 노비들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주인의 일을 고발하도록 하는 것에 대한 가부를 검토할 것을 승정원에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강상(綱常)의 문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대로가 합당하다는 승정원의 대답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화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어가면서 이화의 집 여종 동비(同非)가 유기된 시체의 여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화가 자신의 억울함을 담은 상소를 올리자, 성종은 사족의 집안일은 가까운 사이라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집의 노비들이 더욱 상세한 사항을 알고 있게 되는 법이니, 노비들을 일일이 복초(服招)하여 얻어낸 것을 바탕으로 이화를 다시 신문해갈 것을 지시했다. 또한 이화가 여종 동비를 간통해왔는지를 집 노비들에게 다시금 확인토록 하기도 했다.

    내금위(內禁衛) 이화(李譁)

    다음날 승지(承旨) 김극준(金克俊)이 의금부에서 파악한 상황을 아뢰어왔다. 이화와 관계된 사람들 여럿이 이미 이화가 여종 동비(同非)를 간통해온 사실을 인정했고, 다른 집의 여종 둘도 이화가 일찍이 여종 동비를 간통해오다 이화가 자신에게 마음을 두지 않음을 미워하여 음문을 베어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를 이화의 가노(家奴)에게서 들었음을 자백했다는 것이다. 또 이화의 집 여종 넷이 그것이 사실임을 재차 말하였고, 이화 본인 역시 3월부터 간음해온 동비가 자신은 멀리하면서도 서로 좋아하는 사내종은 방에 머무르게 하며 서로 통간하였기에 화가 나 살해하였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이에 이화가 아니라하더라도 그의 자손들이 이번 사건에 관계되어 자백한 집 노비들에게 보복을 하려 할 것이니, 이화의 집 노비들을 관아에 속공하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정에서는 여인 시체 유기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 내금위 이화에 대한 양형(量刑)이 논의되고 있었다. 우부승지(右副承旨)가 여종 동비를 살해한 이화의 죄가 참대시(斬待時 : 곡식이 무르익기를 끝내는 추분을 기다려 처형하던 참형)에 해당함을 아뢰어왔다. 여종을 살해한 것이 목숨을 빼앗는 중죄는 아니지만, 임금의 준엄한 명을 어기고 이실직고하지 않은 죄가 컸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좌우의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벌이 너무나 무거움을 아뢰었다. 그러나 일벌백계하겠다는 성종의 강한 의지를 꺾어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조정은 이 일로 소란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날과는 달리 성종의 지엄한 뜻을 직접 거스르지는 않았으나, 임금의 덕을 베풀어 이화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은 용서해줄 것을 간곡하게 주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화는 물론 뭇 신하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다했다고 생각한 성종은,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과 그르다고 하는 것을 가려 그대로 따르는 것 또한 옛 성인들을 본받아야 할 임금의 할 바라 말하면서 한걸음 물러서며 이화의 사형을 면해줄 것을 지시했다. 당시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신분제도의 근간을 훼손하지 못할 고민도 컸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이화는 직첩을 다시 돌려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당시의 사신(史臣)은 조용히 말하고 있다. 이화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독하고 사나웠기 때문에 여종 동비를 학대하는 것이 몹시 참혹하였지만, 여종 동비는 한쪽 다리가 썩어 떨어진 채 죽었으니 떠내려 온 여인의 시체가 아니었던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화에 대한 추국이 시작되자 사건을 억지로 맞추어 이화를 범인으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의심할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화가 여종 동비를 살해한 것은 확실하지만 유기된 여인의 시체가 동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음문이 날카로운 칼로 찢겨져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처참한 형체로 떠내려 온 여인의 시체는 과연 누구였다는 것인가? 아마도 그 범인은 무덤에 누워있는 채로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는 악몽에 시달리고만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