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 '오늘과 내일'에 이 신문 홍찬식 논설위원이 쓴 '새 문화부 장관의 악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KBS 정연주 사장의 거취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다. KBS 구성원들은 ‘무능한 경영자’라며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 사장은 ‘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내년 11월까지 임기를 다 채우겠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방만 경영으로 비판받아온 공영방송 사장이 정권 교체기에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이 추하긴 해도 ‘법을 지키겠다’는 그의 완강한 버티기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코드 인사' 바로잡기 서둘러야

    그의 진퇴 문제는 지난 정부에서 ‘코드 인사’가 극심했던 문화계 쪽에도 눈을 돌리게 만든다. 현재 문화관광부 산하 단체에는 진보 진영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전부터 진보 진영이 문화 분야만큼은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이것이 정권 창출에도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해온 지난 정부는 문화적 주도권을 확고히 하는데 적극 나섰다. 그 과정에서 문화계 요직을 차지한 이들을 새 정부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문화계 최대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들 역시 쉽게 자리를 비울 것 같지는 않다. 임기가 정해져 있고 산하 단체에 정식 고용된 이들도 적지 않다. 정 사장처럼 ‘법대로 하자’고 맞서면 해결이 쉽지 않다. 돌이켜 보면 이런 불편한 상황은 5년 전 참여정부가 출범할 때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감독 출신으로 문화부 장관에 임명된 이창동 장관은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문화부 산하 단체장들이 신속하게 물갈이 됐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다’는 유명한 ‘멘트’가 그때 나온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 문화계를 어떻게 재편할지 골몰했다. 문화부 청사는 연일 진보 진영 인사들로 붐볐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격론을 벌이며 아이디어를 짜냈다. 이 장관이 문화계 새판 짜기의 선봉에 섰다.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 주도권은 유지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진보 진영은 특유의 응집력으로 그를 뒷받침했다.

    KBS의 정연주 사장도 못지않았다. 2003년 4월 취임식장에서 ‘동지 여러분’이란 말로 취임사를 시작해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악역(惡役)을 맡겠다”며 주요 간부들을 곧바로 그만두게 했다. 지난 정부의 ‘문화 권력’ 장악 작업은 이처럼 살벌했다.

    새 문화부 장관에 연극인 유인촌 씨가 내정됐다. 과연 그가 한쪽으로 치우친 문화의 추를 정상으로 되돌려 낼 수 있을까. 그가 내정자로 발표된 이후 한 말을 보면 의구심이 생긴다. 그는 “예술이 본래의 역할을 한다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그와 함께 유력한 문화부 장관후보로 거론됐던 박범훈 중앙대 총장도 “보수와 진보를 굳이 구분해야 하나. 좋은 재료를 찾아 잘 요리해내는 게 새 정부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념, 정치와의 결별 이끌기를

    실용 또는 화합이라는 이름 아래 대충 넘어가자는 말로 들린다. 보수 진영의 안이함 나약함이 드러난다. 그렇다고 참여정부가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최소한 문화의 탈정치화를 위한 정지 작업, 쇄신 작업은 있어야 한다. 그동안 문화를 권력 혹은 이념의 도구로 이용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문화계가 이념 논쟁에 쏠려 있는 동안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잘나가던 영화는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 서점에 가보면 딱딱한 우리 소설 대신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일본 소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류는 새로운 메뉴를 내놓지 못하고 빛을 잃어가고 있다.

    새 정부는 최소한의 ‘악역’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문화를 정치권력의 도구가 아닌 삶의 위안과 희망을 주는 본래의 역할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정부 지원에서도 정치력 있는 예술가가 아닌 실력 있는 예술가가 대접받아야 한다. 그 위에서 새 정부가 바라는 문화산업 강국도 실현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