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시론 '이명박 박근혜 이회창'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러다간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는 악몽의 순간이 닥쳐오고야 만다. 대선일 저녁, 10년이라는 긴긴 세월 좌파 무능정권 종식을 희구해온 보수·우파 유권자들에게. 정동영 후보 대통령 당선 확정 !- TV화면에서 팝콘 알갱이처럼 튀어나오는 자막. 이회창의 무소속 독자 출마는 ‘대통령 정동영’의 보증수표가 된다. 왜 그럴까?

    이회창의 파괴력이 1997년 대선 때 이인제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회창은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는데 여론조사에서 정동영을 단숨에 제치고 2위를 차지했다. 두번씩이나 1000만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이회창의 추억’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에 대한 이회창과 박근혜 고정표들의 불만은 한여름날 맨홀 뚜껑 안에 몰려 있는 가스처럼 꽉꽉 들어차 있다. 왜 이명박은 노무현의 남북정상회담을 더 세게 비판하지 않는가. 불안감도 가득차 있다. 이명박은 BBK의 한 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런 ‘아킬레스건’들을 지금 이회창이 건드리고 있다. 박근혜 지지층이 이회창 쪽으로 움직이면 이회창이 1위를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명박, 이회창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으니 보수·우파는 안심해도 된다? 순진한 계산법이다. 두 이씨는 골육상쟁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보수·우파는 두부 자르듯이 나눠지고. 여기에 범여권은 두 이씨를 겨냥해 융단폭격을 하며 후보단일화를 극적으로 연출한다. 두 이씨는 ‘공멸’하고, 정동영은 막판에 어부지리를 그물째로 걷어가고. 대선은 속절없이 저문다.

    1987년 김영삼, 김대중의 분열로 3위였던 노태우가 역전승하는 구도가 20년 만에 재현된다. 뭉치면 이기고, 흩어지면 진다는 대선 필승의 법칙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임을 상기시키듯이 그대로 맞아떨어질 것이다.

    보수·우파 세력을 뭉치지 못하게 만든 책임은 전적으로 이명박의 정치적 상상력 빈곤, 리더십 부재에 있다. 박근혜를 화끈하게 포용하지 않고 우는 아이한테 떡 하나 주듯 자리 몇 개로 생색내듯 함으로써 은둔에 들어가게 만든 데 따른 ‘후폭풍’이 바로 이회창 출마다. 적대적 기업 인수하듯, 사장 된 사람이 반대편 섰던 사람들 한직으로 몰아내듯 한다면 반드시 후환이 따른다. 그게 정치와 장사, 여의도와 기업이나 서울시청과 다른 점이다.

    박근혜는 미얀마 아웅산 수치 여사처럼 은둔하고 있다. 박근혜 진영은 지금 99%가 실업자가 돼 집에 있거나 한직으로 떼밀려 여의도를 배회하고 있다. 이명박이 박근혜와 쇠심줄같이 단단한 화학적 결합을 이뤘다면 이회창이 꿈을 꿀 틈새가 생기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이명박의 그릇 크기 문제다. 이재오의 입 하나 단속하지 않고 소매상처럼 주판알 튕기는 정치적 결단력·계산법을 갖고 역동적으로 요동칠 대선 정국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바로 지금 이명박에겐 기업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이명박이 박근혜를 대선전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끌어내고, 이회창의 후보등록(25, 26일)을 막아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손 맞잡고 정권 창출을 외치는 한 장의 사진이 나온다면? ‘BBK 김경준’ 10명이 금의환향해도, 범여권이 또 다른 미사일 몇 방을 날린다 해도 ‘이·박·이 트리오 대화합’의 파괴력을 뚫기 어렵다. 후보에 대한 테러로 후보 유고(有故) 사태가 날 수 있으니 ‘스페어 후보’로 이회창이 출마? 단합만 이뤄진다면 이명박은 교황처럼 방탄유리 덮은 유세차를 타고 손만 흔들고 다녀도 이길 수 있다.

    이명박은 박근혜에게 ‘이명박·박근혜 공동정권’에 육박하는 빅카드를 내밀어야 한다. 박근혜가 용수철처럼 뛰쳐나오게 하려면 실리와 명분이 필요하다. 이회창에겐 보수·우파의 큰어른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대통령만 되게 해주면 모든 걸 포기하겠으니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자세로. 안전한 승리를 위해 박근혜, 이회창을 ‘최대주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말이 아니라 실체와 내용으로. 박근혜는 이제 이명박이냐 아니냐의 선택이 아니라, 좌파·무능정권 연장으로 대한민국이 주저앉느냐 다시 일어서느냐 하는 대승적·대국적 관점에서 이명박을 다시 평가하고 결단해야 한다.

    이회창은 대선에 다시 나와선 안된다. 이것이 이명박·박근혜·이회창 모두 사는 유일한 길! 보수·우파의 정권창출에 깜박깜박 적신호가 켜져 있다. 역사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