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2일자 사설 <이러려면 국정원은 국가 보안 업무에서 손을 떼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또 북한을 다녀온 모양이다. 다음달 2~4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중요 협상을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장은 지난달 초에도 두 차례 평양을 찾아 2차 남북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돌아왔었다. 요즘 국정원과 국정원장은 아예 대북 연락책이나 접대 부서, 접대 담당으로 본업을 바꾼 듯하다.

    국정원은 국가 안보에 관한 주요 정보를 수집하고 국가를 파괴하려는 외부의 교란 활동을 차단하는 부서다. 미국 CIA나 영국 MI-5와 같은 기관이다. CIA국장이나 MI-5장이 미·소, 영·소 정상회담 준비나 연락책으로 소련을 방문하는 일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간첩을 잡아 국가 안보를 지키는 고유 업무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익명과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방첩기관장이 언론의 플래시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이다. 서독도 1970년 이후 동독 붕괴 때까지 4차례 동독과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서독 정보기관장이 동독을 찾아가 정상회담 심부름을 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 방첩부서는 이런 세계의 상식과는 완전 딴판이다. 국정원장이 청와대 기자회견에 나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자랑하고, 대통령이 국정원을 찾아가 “국정원이 유용한 대북 대화 통로”라면서 “다음 대통령에게 북한과 대화하려면 국정원을 믿으면 된다고 당부하겠다”고까지 이야기하는 판이다. 국정원장은 동창회 홈페이지에 자기의 휴대전화번호까지 공시하는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국가 보위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까지 이런 거꾸로 된 상식을 아직 갖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이 남북 대화 심부름을 한 시초는 박정희 정권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에서 7·4공동성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후 전두환 정권도 남북정상회담을 해보려고 장세동 안기부장을 평양에 보냈다. 그러나 당시는 정보기관이 국내 정치와 국가 안보 업무를 총괄하고, 국내 정치를 위해서 안보를 활용 또는 악용하던 시대다. 대통령은 틈만 나면 그 시대를 암흑의 시대, 부끄러운 시대라면서 자신이 새 시대를 열었다고 자랑해 왔다. 그런 대통령이 어두운 시절의 유산을 무슨 커다란 자랑인 줄 알고 그대로 본받고 있으니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북한은 통일을 위해 교류할 수밖에 없는 상대인 동시에 우리를 파괴·전복하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고 있는 국가 안보의 핵심 위협이기도 한 존재다. 그래서 대북 교류를 위해 통일부가 있고, 북한의 대남 파괴 활동을 막기 위해 국정원이 있는 것이다. 국민이 해마다 용처도 묻지 않고 막대한 세금을 국정원에 주고 있는 것은 어떤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는 업무를 쉬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다.

    국정원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악수를 하는 그 순간에도 북한의 동태를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는 안보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국정원은 국민들이 대북 연락책이나 대북 접대 업무를 위해 자기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안겨준 것으로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이 정부엔 대북 교류 부서만 있고 나라 지키는 부서는 실종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대북 정책의 정부내 견제와 균형도 작동할 수가 없다.

    김대중 정부 이후 지금까지 10년간 국정원이 붙잡은 간첩은 20명도 안 된다. 국정원 스스로 2005년말 국회에 낸 보고서에서 “북한이 최근 5년간 단파나 모스 부호로 남한의 공작원에게 보낸 지령통신 670건을 포착했다”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정부는 “대북 협상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정원과 통일부를 대북 협상·교류 전담 부서로 통합하고 간첩을 잡고 북의 동태와 정보를 수집·감시하는 기능과 권한은 검찰이나 경찰에 이관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맡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