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3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시론 <'이명박-박근혜 공동정권'의 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불안한 출발이다. 이명박이 경선 후 ‘대선 후보’로 보낸 10여일을 반추해보면. 그는 후보 확정 다음날 아침 놀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아니라 박근혜가 스타가 됐네. 한나라당 당사에 첫 출근한 이명박은 속내를 보였다. “당의 색깔과 기능을 바꾸겠다.” 울고 싶었던 박근혜 진영과 지지자들의 뺨을 때린 격이었다. 컨테이너 당사에서 당을 이만큼 재건했는데, 경선 승복의 대가에 대한 화답이 ‘이명박 싹쓸이당(黨)’으로 돌아오다니. 이튿날 이명박은 더 나갔다. “당이 첩첩이다. CEO형으로 바꾸겠다.” 10년 야당에서 최소 인력에 최저 월급으로 풍찬노숙해 온 당료들의 폐부를 찔렀다. 사흘째 되던 날 이명박은 후퇴했다. “누가 혁명하자고 했느냐.” 그러나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 진영이 외연 확대라는 이름으로 외부 친이(親李) 세력을 끌어들일 가능성을 시사하며 원내대표와 사무총장을 골수 이명박맨들로 채우자, ‘박근혜 없는 한나라당’에 대비하기 위해 포석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서로가 파경을 앞두고 별거를 준비하듯.
박근혜 진영은 지금 암염(岩鹽)과 같은 화학적 단결로 사막을 헤매는 탈레반처럼 끼리끼리 살아갈 방도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박근혜는 경선 불복으로 돌아서거나 탈당하지는 않되 대선 기간 내내 삼성동 자택에서 은둔하며 백의종군할 성격이다. 이명박이 박근혜와의 1.5%포인트 차(差)가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를 CEO형 시각으로 분석하면 두 진영이 화합할 가능성은 없다. 박근혜도 1.5%포인트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명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표라도 이겼으면 이긴 것 아니냐. 그건 ‘산수(算數)’지 ‘정치적 셈법’은 아니다.
박정희의 철옹성 유신체제를 무너지게 만든 동인은 1978년 10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이 신민당한테 득표율에서 1.1%포인트 진 데 있었다. 그러나 유신 선거의 희한한 의석 셈법으로 유신정권이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갔다. 공화당 정권은 민심에서 1.1%포인트 패배한 사실을 외면하며 승리했다고 우겼다. 똑같다. 이명박이 당원·대의원·일반국민 선거에서 패배한 사실을 외면하면 마지막 승자가 되는 길로부터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이명박 측은 수도권과 호남권에서 이긴 걸 외연확대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는 1980~90년대 김대중당(黨)의 지지기반과 일치한다. 범여 후보가 결정되면 이명박에겐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박근혜의 지지기반이자 한나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영남권, 그리고 충청권·강원도에서의 패배를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명박에게 이번 경선은 ‘홈 그라운드’에서 치른 경기였다. 경기 심판, 진행요원, 관중 대부분이 이명박 대세론을 의식한 위장 중립이었지 않은가. 정직하게 봐야 한다. 그런데도 신승했다. 본선은 ‘어웨이 게임’. 박근혜 진영에서 쓰던 부지깽이까지 끌어들이는 거당체제로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이명박 지지도가 50%를 넘으니 박근혜 없는 ‘이명박당’으로도 이길 수 있다고? 뉴라이트를 영입하고 충청도와 연대하면 이길 수 있다? 박근혜와의 화학적 결합에 실패한 외연확대는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다.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서 김영삼과 차별화했다가 부산·경남표가 돌아서서 이인제가 500만표를 얻은 이인제 학습효과를 벌써 잊었는가. 박근혜는 임기말 YS 대통령보다 몇배 더 위력적이다.
이명박이 CEO형 실용주의적 사고를 해야 할 대목은 ‘권력 분점’이다.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집권사(史)는 연립정권의 연속 아닌가. YS의 3당합당→DJP연합→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그러면 다음은 ‘이·박 공동정권 카드’만이 해법이 된다. 이명박은 대선 전략에서부터 집권 이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놓고 박근혜로부터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정치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박근혜가 이명박을 향한 화살을 대신 맞아줄 수 있도록 감동시키는 인간적 호소도. 김대중·노무현 공동감독의 ‘제3회 선거 기적 드라마’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명박은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이·박 공동정권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