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 출신 정운찬’(?)

    앞으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이렇게 불릴지도 모를 것 같다. 범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면서도 늘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선을 그어왔던 정 전 총장의 최근 행보가 심상치 않다. 범여권 내부에서도 정 전 총장의 정치참여는 이제 가부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라고 한다. 반년간 정 전 총장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던 탓인지 ‘애초부터 정 전 총장은 정치인이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실제 정 전 총장은 그간 범여권을 ‘애끓게’(?) 해 왔다. 정치의 ‘정’자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정치참여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는 ‘흔적 보여주기’는 늘 잊지 않았다. 마뜩찮은 대선주자 하나 없는 범여권은 그럴수록 더욱 정 전 총장만 바라봤다.

    이랬던 정 전 총장의 최근 행보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총장은 12일 오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스승 고 스코필드 박사의 37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라지만, 정치권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통상 현충원 방문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 만큼 정 전 총장의 결단이 임박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또 정 전 총장은 11일 오후에는 열린우리당 정대철 상임고문을 만났다. 이날 만남에 대해 정 전 총장은 “정치적 결심과 관련해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려는 목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정 전 총장은 10일에는 일부 기자들과의 통화에서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정치인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또 “그동안 정책 이슈 등 이론공부를 주로 했다면 이제 현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도 했다.

    범여권 안팎에서는 공식적인 정치참여에 앞서 사전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가늠해보는 일종의 막판 사전 점검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같이 정치적 행보를 보이면서도 정 전 총장은 아직도 정치참여 여부는 ‘고민 중’인 모습인데, 정 전 총장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도 ‘대충’(?)은 알만할 것 같다. 정 전 총장과 민주당, 열린당 집단탈당그룹인 통합신당모임 소속 일부 의원들의 12일 오찬 회동이 전격 무산된 것이 바로 그것. 당장 범여권에선 “누군가가 (정 전 총장을 이용한)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회동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고 이에 대한 일부 참석자들의 불편한 감정이 나오면서 무산되는, 이른바 해프닝인데 벌써부터 정 전 총장이 범여권 각 정파의 본격적인 정계개편 주도권 싸움에 이용되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다. 

    결국, 정 전 총장이 이같은 정치권의 생리를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고민의 또 다른 배경에는 지난 5․31 지방선거 ‘강금실 학습효과’도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급한 정치참여 선언은 자칫 ‘불쏘시개’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는 판단도 한 몫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역시 정치는 이런 정 전 총장을 기다려주지 않는 모습이다. 정 전 총장을 겨냥한 비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범여권 일각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정 전 총장의 정치력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정 전 총장에 대한 범여권의 기대가 얼마나 큰 줄은 알지만 4․25 재보선 대전 서구을 출마 등을 통해 사전에 어느 정도 검증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무턱대고 '정운찬 신드롬'에 빠져 서는 경계심에서다.  

    한나라당도 정 전 총장 움직임을 “스스로 정치행보도 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기웃정치인’, ‘귀동냥정치인’다운 행보”라며 “몸은 학교라는 안전지대에 숨겨두고 목만 내밀어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위험회피, 양지추구라는 나약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라고 했다. 또 “연일 계속되는 강연 일정으로 정치인의 냄세를 풀풀 내고 다니면서도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는 입장을 반복하는 것은 최소한의 학자적 진실성마저 의심케 한다”고도 했다.

    한나라당은 “독자신당 능력도 없고, 여권의 눈치도 보아야하고 교수로서의 체면도 살리고 싶은 고민은 이해하지만 떨어진 감이나 먹겠다는 식의 얄팍한 계산이라면 아예 꿈을 접길 바란다”며 “'제2의 고건'이 탄생할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정 전 총장의 그간 행보를 보면 정치참여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만 않았을 뿐 '닳고 닳은 관록'(?)의 정치인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자칫 '정치인 출신 정운찬'(?)으로 불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감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