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라"

    범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한 인사는 최근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던 자리에서 불쑥 “고건 전 국무총리가 왜 낙마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침묵이 흐르자 이 인사는 “아침에만 해도 ‘알겠다’고 하던 의원들이 저녁에는 모른 체 하더라. 고 전 총리가 참 허탈해 했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하면서 씁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렇듯 요즘 정가에선 최근의 정치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다. ‘신의’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는 것이 정치의 현실이라고는 하나, 최근엔 너무 노골적이라는 자조섞인 푸념이 나온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치상황에서 의원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백번 이해한다 치더라도 그야말로 ‘믿을 놈 하나 없는’(?) 정치현실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2일 밤 서울 역삼동의 한 삼겹살집에서 ‘30대 직장인들과의 만남’을 갖는 자리에서 자신의 탈당 이유를 밝히면서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당내)‘소장파’들이 완전히 ‘세몰이’에 편입된 것을 보고 내 뜻을 펼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 언론매체가 전했다. 손 전 지사는 “(그런 상황에서)뭘 만들어 보겠다는 가능성도 희박해졌다”면서 개혁세력을 자처하는 ‘소장파’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내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아울러 범여권 내부에서도 최근 열린당의 현실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놓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을 언급하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는 소회를 풀어내고 있다. 열린당 창당에 주역으로 활약했고 노무현 대통령과 끝까지 함께 갈 것 같았던 주요 인사들이 자기부정을 일삼는 정치현실에 절로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올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 대통령과 차별화해보려는 ‘야욕’(?)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는 한탄이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던 초심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누가 노 대통령의 등에 칼을 먼저 꼽느냐’는 경쟁을 하는 정치현실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는 식의 반응이다. 또 ‘노 대통령 만들기 일등 공신’들마저도 “어렵게 대통령을 만들어놨더니…”라며 혀를 차며 탈당하고 있는 현실에도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설명들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정치권의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의원들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탓도 있겠지만, 대통합신당이다 뭐다 해서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커진 정치현실 때문이 아니냐는 진단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범여권의 한 의원은 “‘3김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닌데…”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때라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범여권의 대통합신당 작업이 부진한 것도 정치적 구심력이 없는 상황에다 ‘선뜻 기득권을 내놓지 못하는’ 이같은 정치인들의 현실이 맞물린 측면이 적지않다는 게 범여권 안팎의 목소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