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연말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정치권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정계개편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느냐 아니면 주도권을 쥐고 살아남느냐 하는, 생존의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물밑에서 한창이다. 정계개편의 절박감은 그 여타 정당보다도 열린우리당이 커보이는 상황이지만 내년 대선 승리를 보장받으려는 정계개편의 유혹은 모든 정파를대상으로 한다. 정계개편 주도권 싸움에 정치권이 사활을 걸고 나선 이유다.

    우선 열린당은 그 어떤 정당보다 정계개편의 절박감이 크다. 10%대의 저조한 지지율과 이렇다할 대선 후보조차 내세우지 못하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재집권의 길은 오로지 정계개편 뿐’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때문에 열린당은 정계개편 주도권 확보에 당의 운명을 걸고 나선 모습이다.

    그간 정계개편 논의 자제를 주문해 왔던 김근태 의장이 최근 “이대로 가면 역으로 정권교체를 당한다. 수구 기득권 대연합에 대항하는 민주개혁세력의 대연합이 만들어져야 한다”면서 ‘12월 초 정계개편론’을 꺼내든 점도 이같은 위기의식의 연장선상으로 풀이된다. 이탈과 동요을 막으면서 정계개편을 주도해 나가겠다는 것. 하지만 당내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열린당이 그리는 정계개편의 밑그림은 민주당은 물론, 고건 전 국무총리 등을 포함하는 민주개혁세력대연합에 맞춰진 양상이다. 최근 보수진영의 대연합 흐름에 맞서 차기 대선에서 일대일 대결 구도를 만들어보겠다는 구상인데, 이를 위해 일차적으로 보수대연합 차단에 당력을 집중하는 모습이다.

    최근 당 지도부의 비공개 회의에서는 일련의 보수세력대연합의 움직임을 우려하면서 보수세력의 조직·동향·자금 등의 흐름이 정리된 '보수대책보고서'와 관련한 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일부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또 전략기획통으로 꼽히는 민병두 의원은 한나라당 차기 대선 후보 ‘빅3’ 중의 한명인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겨냥 “한나라당의 지나친 보수화, 한나라당 외곽의 보수화 등 보수연대가 갖고 올 결과물에 대해서 우려하고 걱정한다면 본인이 결단할 수도 있다”면서 손 전 지사의 ‘열린당행(行)’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었다.

    열린당의 이같은 정계개편 밑그림의 중심 대상은 사실상 민주당과 고 전 총리라고 볼 수 있지만 이들의 반응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서 고민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근본적으로 당내 구심점이 취약하다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치유하려고 들고나온 방법이 ‘오픈프라이머리(완전개방형 국민경선제)’지만, ‘경쟁력 있는 후보가 없어질 정당에 왜 들어가겠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정치권은 열린당의 정계개편 주도권 확보 가능성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으면서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을 시작으로 벌어질 열린당 와해가 본격적인 정계개편의 신호탄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열린당보다 정계개편의 절박성은 덜 하지만, 두 번의 연속된 대선 패배에 대한 ‘학습효과’(?)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다. 확실한 대선후보를 가지고 고공비행 중인 당 지지율 등을 감안할 때 당내 일부의 자만심도 엿보이긴 하지만 이념·지역적 측면의 ‘외연 확장’이란, 부족한 2%를 갈구하는 모습이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열린당의 정계개편 주도권 확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별로 무게를 두지 않고 있다. 일단 여권발 ‘12월 정계개편론’ 등을 변변한 대선주자도 없는 열린당이 판을 흔들어 보려는 일종의 ‘정치꼼수’로 평가하면서 내부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 김성조 의원은 최근 한 라디오 시사프로에 출연, 여권발(發) ‘정계개편론’에 대해 “12월에 정계개편이 바로 가시화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열린당 주도로도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고 일축했다. 그는 “정계개편이 일어난다면 한나라당발(發) 중도보수연합 정계개편이 이뤄지고 이러한 방향을 따라서 주변이 정리되는 형태로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열린당이 지금 한나라당을 봉쇄하는 정계개편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니고 이념적 혹은 정책 위주의 정계개편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도 지난 21일 관훈토론에 참석, “여당에 지지율 높은 후보가 없어서 판을 흔들려고 하는데 그런 정계개편 시도에 우리가 말려들어선 안된다"면서 여당이 움직임에 강한 경계심을 내보였다. 그러나 민주당과의 연대문제에 대해서는 ”양당이 합쳐질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며 지금부터 정책연대를 조금씩 해나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에 대한 러브콜을 통해 열린당을 견제하면서 ‘호남’이라는 지역적 정치현실을 감안한 대선필승 전략을 차근차근 밟으며 차기 정계개편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열린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구애를 받고 있는 민주당은 올 연말 정치개편 등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대비, 한껏 몸값을 높이는 모습이다. '올 연말 정계개편의 핵은 민주당'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최근 여권에서 제기되는 ‘반한나라당 연대론’에 대해 “한나라당에 반대하려고 결사를 만들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반대할 테니까 우리를 밀어달라고 해서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느냐”며 “절대 성공할리 없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한 대표는 또 한나라당과 민주당간의 합당론을 언급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겨냥해서는 "한건주의"라고 폄훼하며 "대권주자라고 대권 욕심이 있는 모양인데 정치지도자로서 경륜이 부족하다"고 쏘아붙였다. 민주당은 열린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존재를 맘껏 과시하면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헤쳐모여식’ 제3의 정당 창당이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아웃복싱 정치’로 일관하면서 정치권의 외부 원심력 당사자로 존재했던 고 전 총리도 올 연말 정계개편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이에 대비한 움직임을 본격화활 채비를 갖추는 모습이다. 방미중인 고 전 총리는 21일(이하 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특파원들과 만나 “연말에 정치 질서에도 구조조정 움직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고 연합뉴스가 전했다. 올 연말 정계개편론에 불을 지피고 나선 것이다.

    고 전 총리는 대선출마 선언 시기를 묻는 질문에도 "적절한 시기에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힐 것"이라고 했으며, 신당 창당 문제에 대해서는 "중도 실용 개혁 세력의 연대 통합에 대한 여러 가지 공감대는 많이 확산됐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대신했다. 고 전 총리가 올 연말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특단의 결단을 할 것이라는 정치권 안팎의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당초 ‘빅3’ 구도에서 처지는 듯한 고 전 총리에 대해 열린당과 민주당 내 동요가 한풀 꺾였기 때문에 고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계개편도 현실성이 그리 부각되지 못하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