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 '오후여담'란에 이 신문 윤창중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만약 이재오가 한나라당 대표 경선에서 패배 한 뒤 ‘패자는 할 말이 없다’며 순응적으로 나왔다면 어땠을까. 언론의 한 귀퉁이에 짧은 인터뷰 기사 정도로 묻혀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잠행해 주목을 끈 뒤 선암사에 나타나 판을 다시 차렸다. “국회의원 3선을 하고 원내대표를 한 나에게 색깔론을…” 이 한마디로 당 대표 강재섭은 수세에 몰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역전극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정치 감각. 탁월하다. 야생마와 같은 ‘야당인의 맛’도 풀풀 풍긴다. 이재오는 2004년 3월 박근혜가 당 대표로 뽑힐 것이 확실시되자 “갑자기 탤런트처럼 등장한 ‘독재자의 딸’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 탈당하겠다”고 기개를 과시했다.

    박근혜도 못참는 스타일이다. “(내가) 대통령의 딸이라고 생각한다면 (총선 때)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안되는 것이고, 도와준다고 해도 받아들이면 안되는 것 아니냐. 너무 치사하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두 사람은 ‘웬수’가 됐다. 그러나 이재오는 자신이 원내대표로 선출되자 박근혜에게 살갑고도 깍듯하게 대했다. 그는 박근혜가 당대표를 떠날 때 환송사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하면서 참으로 많은 일을 배웠다”고 극찬했다. 그런 그가 경선에서 패배하자 “박근혜한테 배신 당했다”고 공격했다. 또 있다. 그는 경선 때 ‘우파 대연합’을 이루겠다고 공약했다. 그런데 한나라당 지도부가 보수 일색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이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말에 앞뒤가 없다. 그렇다고 ‘도로 민정당’이 잘된 것은 아니지만.

    선암사 칩거를 마치고 당사에 출근한 날 그는 한나라당의 수해 복구 작업 참여를 역설하더니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다음날 수해 대책을 논의하는 최고위원·중진연석회의에는 무단결근하고 재·보선 지원유세를 벌였다. 이번엔 당내 대선후보 경선제도의 불공정성을 또 들고 나왔다. 선암사 칩거로 떴다고 해서 ‘오버’하고 있는 것일까. 계산이 불리해지면 심술을 부리는 것을 놓고 ‘몽니를 부린다’고 한다. 이재오는 이 정도 했으면 깨끗한 경선 승복의 다짐도 필요하다. ‘불복’은 불공정보다 악(惡)하다. 한나라당 지지층은 ‘경선 불복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패자에게 보내는 동정심에도 한계가 있다. 길어지면 딴 살림을 차리려는 몽니처럼 보인다.